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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넌 나한테서 도망 못 가

  • 
  • #03. 넌 나한테서 도망 못 가.
  • 날이 맑게 갠 월요일 오전이었다.
  • 창문으로 들어오는 가을의 따뜻한 햇살이 지현을 광합성 시켜주고 있었다.
  • 햇살이 들어오는 소파에 앉아 따뜻한 물 한 잔을 홀짝이던 지현은 오랜만에 완전한 평화로움을 느꼈다.
  • 어젯밤 자신의 집에서 자고 가겠단 정후를 어르고 달래어 겨우 돌려보낸 터였다.
  • 헤어진다는 말을 무르겠다 했는데도 뭐가 그리 불안한지 돌아가는 길에 자신을 계속해서 돌아보던 정후였다.
  • 두 걸음 가고 돌아보고
  • 또다시 두 걸음 가고 돌아보고
  • 결국엔 다시,
  • “우리 헤어지는 거 아닌 거 맞지?”
  • “그렇다니까.”
  • 셀 수 없이 확인을 받고도 결국 다시 한번 뛰어와 날 꼭 끌어안아야 안심이 된다는 듯 딱 숨을 쉴 수 있을 만큼만 틈을 내주었다.
  • “넌 나한테서 도망 못 가, 남지현.”
  • 지난밤의 기억을 떠올리다 보니 지현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 180이 훌쩍 넘는 남자가 쩔쩔대는 모습은 귀여워도 너무 귀여웠다.
  • 분명 힘들어서 헤어지자고 한 거였지만 힘들어서 잊고 있었던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 정후와 사귀면서 겪은 힘듦만큼이나 그의 사랑이 주는 행복이 컸다는걸.
  • 일상에 지쳐 서로가 서로에게만 줄 수 있는 행복을 잊고 살았던 건 아닐까.
  • ‘남지현, 너도 참 바보 같다.’
  • 감았던 눈을 뜬 지현의 눈길이 집 안 곳곳에 닿았다.
  • 집 곳곳에는 우리의 지난 3년을 보여주는 물건이 많았다.
  • 야구 유니폼을 입은 정후의 품에 안겨 활짝 웃고 있는 내 모습이 나온 사진, 정후가 해외 경기에서 사다 준 인형, 정후가 사다 준 무선 스피커•••.
  • 그렇게 매정하게 이별을 고해놓고서 정후가 준 물건들을 하나도 치우지 않은 나도 참 모순이었다.
  • 나 진짜 헤어질 마음이 있었던 건 맞니.
  • 당시에는 힘겨운 진심이라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보니 나도 진짜 헤어질 마음은 없었구나.
  • 만약 정후가 날 잡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 어쩌면 정후가 날 잡을 거라는 확신에서 나온 행동이었는지도 모르겠다.
  • 스스로가 생각해도 이기적인데 이런 이기적인 나를 애타게 붙잡아준 정후가 고마웠다.
  • 정후와 연락이 안 됐던 며칠 동안 정후가 힘들어했던 것만큼 지현도 못지않게 힘들었다.
  • 화면에 뜨는 정후의 이름을 보고도 모른 척하는 그 상황이 절로 가슴이 욱신거렸다.
  • 훈련이 끝나면 시간이 몇 시든 자신의 연락을 확인하고 정성껏 보내주던 정후의 메시지가 없으니 밤이 너무 공허했다.
  • 이별을 고하고 나서야 알았다, 내가 내 생각보다 널 더 많이 사랑했음을.
  • 이별을 겪어봤다면 이별이 주는 감정들을 추슬러라도 봤을 텐데 정후는 고작 두 번째였다.
  • 첫 번째 연애는 연애라고 하지도 못할 풋사랑이었기에 진짜 연애라고 할 만한 건 정후가 처음이었다.
  • 진짜 첫 이별의 대상이 그였기에 지현 또한 서툴렀다.
  • ‘다 아는 것처럼 굴어도 내가 이렇게 서툴러.’
  • [내 사랑 잘 잤어?]
  • 지현의 웃음이 터졌다. 몇 번이나 지우고 다시 쓰며 고심해서 보낸 흔적이 보이는 정후의 톡.
  • 정후는 사랑한다는 말에 인색한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내 사랑’과 같은 칭호를 밥 먹듯이 쓰는 성격도 아니었다.
  • [잘 잤지, 오늘 경기도 파이팅 해.]
  • [그게 전부야?]
  • [그럼?]
  • [너도 내 사랑이라고 해줘야지.]
  • [싫은데?]
  • 장난스러운 답장을 보내자마자 정후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 전화를 받자마자 하룻밤 새에 마음이 변한 거냐는 등 불안한 마음의 소리를 토해냈다.
  • 내가 헤어지자고 한 충격이 컸나 답지 않게 장난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 “장난이야, 나도 사랑해 정후야.”
  • [남지현 진짜.. 이따 집으로 갈게.]
  • “너 오늘 경기 있잖아. 끝나고 쉬지.”
  • [너 보는 게 쉬는 거야.]
  • 오랜만에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하고 전화를 끊는 정후였다.
  • 그렇게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는데 지나치게 초조해하고 불안해하는 정후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 한 번의 이별 아닌 이별이 지나간 뒤 정후도 나도 전과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 정후는 전보다 나한테 더 집중하고 표현하려 노력하는 듯 보였다.
  • 네가 그렇게 노력하는데 나도 전과 똑같이 맥 없이 있을 수는 없지.
  • 나도 달라질게, 정후야.
  • 영어 번역이라는 직업 특성상 나는 집에서 벗어나는 일이 드물었다.
  • 나가는 것을 좋아하는데 번역 프리랜서로 자리 잡기까지 일에 몰두하다 보니 밥도 운동도 다 집에서 했기에 밖에 나가는 일은 정후의 경기를 보러 가지 않는 한 손에 꼽았다.
  • 모든 걸 집에서 편리하게 해결하게 해주는 21세기에서 집 밖에 안 나가는 생활 습관이 완성되는 건 말도 안 되게 쉬웠다.
  • 집에만 있으니 본래 나가는 걸 좋아하는 성격도 자연스럽게 내향적으로 바뀌었고 좁은 세상에서 좁은 것만 보다 보니 정후로 인한 외로움이 더 치명적으로 다가왔다.
  • 너의 사랑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위해서는 나 스스로 일어서서 내 영역을 만드는 연습을 해야겠지.
  • 내가 나로 온전할 수 있어야 너와 함께 있을 때도 행복할 수 있는 건데 알고 있으면서도 내 눈앞에 흐린 막을 설치해두고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모른 척해왔던 건지도 모르겠다.
  • **
  • 가을과 잘 어울리는 시원한 바람이 지현의 뺨을 때렸다. 정말 오랜만에 풀 세팅을 하고 나오는 밖이었다.
  • 부자연스러운 걸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지만 이렇게 나와보니 가끔은 꾸밀 필요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 살랑대는 바람결이 오늘 하는 모든 일들이 다 잘 될 거라고 말해주는 것만 같아.
  • 방송국에 가기까지 시간이 조금 남았기에 방송국 건물 근처 벤치에 앉아 세상을 둘러보았다.
  • 커피 한 잔을 들고 깔깔 웃으며 대화하는 사람, 킥보드를 타고 쌩- 달리는 사람, 뭐가 그리 급한지 헉헉대며 어딘가를 뛰어가는 사람.
  • 저마다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살아가고 있다.
  • 이런 풍경을 보고 있자면 세상에 그렇게 심각할 일이 없다는 생각이 들어.
  • 그래 별거 없지, 알고 있는데도 잊고 사는 것들이 너무 많다.
  • **
  • “어머 선배 못 본 사이에 더 예뻐졌네요!”
  • 방송국에서 나누어준 도시락의 반찬을 입에 집어넣으며 너스레를 떠는 인영이었다.
  • “하여튼 띄워주기는, 체하니까 반찬 한 개씩 집어먹어.”
  • “따뜻한 마음은 그대로다 선배. 내가 남자였으면 선배한테 사귀어달라고 매달렸을 거에요.”
  • 인영은 대학 같은 과 동문이었다.
  • 문서 번역을 전문으로 하는 나와 달리 통번역 대학원에 진학해서 동시통역사로 입지를 다지고 있는 멋진 후배였다.
  • 오늘은 ‘언어 전문가’특집 예능 방송에 인영과 같이 섭외를 받은 참이었다.
  • 그동안 방송 섭외는 꾸준하게 들어왔지만 성격이 방송 체질이 아니라 생각해서 거절해왔는데 이제 다양한 경험을 해볼 기회들을 애써 걷어차지는 말아야지.
  • 첫 방송이라 긴장을 많이 했는데 같은 대학 후배 인영과 같이 촬영을 하게 된 건 여러모로 다행이었다.
  • 인영은 방송이 처음인 자신과 달리 꽤 자주 tv에 출연을 하는 이미 인지도가 있는 사람이었다.
  • “유인영님, 남지현님 준비해 주세요.”
  • 스태프의 말이 우리의 짧은 대화를 끊었고 우리는 자리에서 일어나 녹화 전 최종 점검을 했다.
  • [긴장하지 마 넌 짱이니까]
  • 녹화에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확인한 핸드폰에는 정후가 보낸 문자가 와 있었다.
  • 경기에 집중하라니까 기어코 문자를 보낸 정후였다.
  • 문자로 들려오는 정후의 음성지원에 지현의 웃음이 풋- 터졌다.
  • 그래 긴장하지만 말자 남지현.
  • **
  • 녹화는 3시간 동안 이어졌다. 방송 촬영이 어려운 일임은 대충 짐작하고 있었지만 실제로 겪은 촬영은 생각보다 더 많은 체력을 요구했다.
  • 풀 메이크업 상태로 3시간 동안 같은 자세로 뜨거운 조명을 받고 있으려니 절로 현기증이 올라왔다.
  • 방송하는 사람들 정말 대단하다.
  • 새삼스러운 존경심이 드는 지현이었다.
  • 방송이 처음이라 지친 기색이 보이는 자신과 달리 인영은 어디서 기운을 계속 충전 받기라도 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된 높은 텐션을 보여주었다.
  • 인영이 더욱 대단하게 보이는 순간이었다.
  • 방송이 거의 다 끝나갈 때쯤 진행자가 지현에게 마지막 질문이라며 의뭉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그럼 마지막 질문드리겠습니다. 약간 실례가 되는 질문일 수도 있는데 남지현 번역가님은 남자친구 있으신가요?”
  • 무슨 질문인가 했더니, 생각보다는 당황스럽지 않은 질문.
  • “네 있습니다.”
  • 지현의 대답에 같이 출연한 남자 출연자들이 탄식을 내뱉었다.
  • 그럴 줄 알았다 저런 분이 남자친구가 없을 리가 없다며 폭소를 부르는 예능적 반응이었다.
  • 분위기를 살피던 인영은 거기에 한마디를 더 첨언했다.
  • “지현 언니 남자친구 질투 장난 아니니까 다들 조심하세요.”
  • 인영의 말에 장내는 웃음 섞인 야유를 보냈다.
  • 인영이 덧붙인 말이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었다.
  • 진행자는 남자친구가 똑같이 번역가냐며 질문을 해왔고 나는 여기서 정후의 존재를 밝힐 수는 없기에 나는 웃는 얼굴로 말을 둘러댔다.
  • “아이 그럼 남자친구분과 어떻게 처음 만나게 됐는지만 알려주세요!”
  • 월척을 낚았다는 듯 끈질기게 물어오는 진행자에 나는 자연스레 정후와의 첫 만남을 회상했다.
  • 그때는 충격적이었지만 지금 생각하면 웃기기만 한 너와의 첫 만남.
  • 나는 그때 집에서 작업이 잘 풀리지 않아 동네 친구 승현이를 불러 카페에서 딸기 스무디를 마시며 번역 작업을 하고 있었고 정후는 숙소 동료와 함께 음료수를 마시러 나왔던 터였다.
  • 주문하는 곳과 가까운 좌석에 앉아 주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었는데 정후의 목소리는 그 많은 사람들 중에서도 튀는 면이 있었다.
  • 먼저 주문하는 사람을 두고 그다음에 서서 동료와 함께 하던 이야기.
  • 번역 문장을 고민하던 때, 정후의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 “프로바이오틱스? 그거 무슨 여신 이름 아니냐?”
  • 확성기라도 두고 얘기한 것처럼 크게 들렸고 나는 순간 나도 모르게 딸기 스무디를 풉-내뱉었다.
  • 바로 근처 좌석에서 갑자기 음료를 뱉어대니 정후의 시선도 나를 향했고 그와 동시에 우리의 시선이 마주쳤다.
  • 이글이글한 정후의 눈이 부담스러워 나는 애써 눈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노트북으로 내렸다.
  • “야 이 미친 새끼야, 프로바이오틱스는 유산균이고 여신은 아프로디테!”
  • 정후의 동료가 나를 쳐다보던 정후의 등짝을 때리면서 비난했고 쪽팔리니까 얼른 이리로 오라고 정후를 잡아끌었다.
  • 동료에게 끌려간 정후를 보며 나는 친구와 동시에 쿡쿡댔다. 무시하는 게 아니라 정말 신선한 충격이었고 그래서 생긴 어이없음이 나를 웃겼다.
  • 그렇게 소소한 웃음으로 끝날 줄 알았던 우리의 만남이었는데 네가 내게 다시 돌아와 말을 걸었고,
  • “저기, 방금 저보고 웃으셨죠.”
  • “아, 기분 상하셨으면 죄송해요. 비웃으려는 의도는 아니었어요.”
  • 건장한 성인 남성이 주는 위압감에 살짝 움츠러들었지만 나는 표내지 않은 채 너한테 대답했고, 너는 내 말을 듣고 활짝 웃었지. 저렇게 생긴 사람이 이렇게 유쾌한 웃음을 지을 수 있구나 생각이 들 만큼 활짝.
  • “그런 얘기가 아니라 번호 좀 주세요.”
  • “네?”
  • “그쪽이 너무 제 이상형이라.”
  • 멀리서 빨리 오라고 욕설을 내뿜던 정후의 동료가 놀라 양손에 음료수를 든 채 그대로 굳었고, 내 앞에 앉아있던 친구도 놀라 입을 떡 벌렸다.
  • 그렇게 어딘가 이상하고 어딘가 웃긴 모습으로 우리의 인연은 시작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