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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나 한 번 더 할 수 있는데

  • # 04. 나 한 번 더 할 수 있는데
  • 방송 녹화가 끝나니 새벽에 가까운 시간이 되어있었다.
  • 네 시간 앉아서 이야기만 했던 나도 이렇게 몸이 넝마가 됐는데 정후는 오죽하겠나 싶어
  • 주말에 경기 없을 때 오라 연락하려던 그때,
  • 일부러 타이밍을 맞춘 것처럼 초인종이 딩동 울렸다.
  • 놀라 문을 여니 다 마르지도 않은 머리를 툭툭 털며 날 보며 웃는 정후의 얼굴이 보였다.
  • “주말에 와도 되는데.”
  • “더 좋아하는 사람이 바쁘게 움직여야지."
  • 정후가 내 목에 얼굴을 묻고 허리를 감은 채로 날 밀며 현관을 들어왔다.
  • 철컥-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기분 좋은 웃음이 터지는 우리.
  • 머리끝까지 차올랐던 피곤함이 단번에 가시는 순간이었다.
  • 집으로 들어온 정후는 나를 소파에 눕히고 얼굴 이곳저곳에 가벼운 뽀뽀를 하기 시작했다.
  • 정후의 손이 빠르게 내 옷 안으로 들어왔고 민감한 부분을 건드리는 손길에
  • 나는 달뜬 숨을 내뱉기 시작했다.
  • "하아- 정후야 잠시만."
  • "오늘은 못 참아, 그동안 마음고생 시킨 벌이야."
  • 벌이라면서 내 반응을 보고 배려하며 몸을 움직이는 정후였다.
  • 막 나갈 것처럼 굴면서 정작 막 나가지 않는 내 남자친구,
  • 내가 널 좋아하는 많은 이유들 중에 하나.
  • **
  • 침실로 옮긴 뒤 세 번의 절정이 지나간 뒤에야 나를 놓아주는 정후였다.
  • 야구선수라 그런지 체력 하나는 진짜 엄청나다 엄청나.
  • 어떻게 하루 종일 흙바닥에서 뒹굴고 이런 체력이 남아있을 수 있지.
  • 샤워 후 내가 나만의 생각에 빠져 푸스스 웃고 있을 찰나,
  • 정후가 내 볼을 쿡 찌르며 볼멘소리를 냈다.
  • "별로였어?"
  • "응?"
  • "왜 딴 생각을 해."
  • "네 체력이 새삼 대단하다는 생각하고 있었어."
  • "아 그런 거야?"
  • 그새 뾰로통해진 표정이 풀린 정후는 음흉한 표정을 지으며 내 귀에 속삭였다.
  • "나 한 번 더 할 수 있는데."
  • "난 못해!"
  • 내가 기겁을 하며 날 안고 있는 정후의 팔을 찰싹찰싹 때리자 정후가 농담이라고 말하며 나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 농담이라고 말했지만 내가 괜찮다는 기색을 보였으면 기어코 한 번 더 했을 정후였다.
  • 괜히 자극하지 말아야지, 다짐을 하고 있던 때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 방송 녹화하는 날이라 화면에 부어서 나올까 봐 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한 터였다.
  • 꼬르륵 소리가 날만도 하지.
  • "지현이 배고파?"
  • 정후가 쿡쿡 웃으며 안은 상태로 내 배를 간질였다.
  • "녹화 날이라 긴장돼서 아무것도 못 먹었어."
  • 나의 말에 정후가 사뭇 진지해진 표정으로 팔을 풀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밥을 안 먹으면 어떡해."
  • 밥 몇 끼 안 챙겨 먹으면 세상 큰일 나는 줄 아는 정후였다.
  • 저기, 정후야 밥 몇 끼 안 챙겨 먹어도 무슨 일이 일어나지는 않는데.
  • 내 생각이 입 밖으로 나가기도 전에 침대에서 일어나 내 손을 잡고 나를 방 밖으로 이끌었다.
  • "그냥 낮에 먹을래, 지금 먹으면 속 더부룩해."
  • "어허, 앉아 계세요."
  • 식욕이 없는 나의 투정을 들은 체 만 체 한 정후가 가스레인지에 물을 올리고 선반에서 라면을 꺼냈다.
  • 뭐 엄청난 요리를 할 것 같은 기세로 라면을 꺼내는 187cm 남자의 뒷모습이란 참 귀엽다.
  • 정후가 냉장고에서 대파를 꺼내어 도마에 송송 썰기 시작했다.
  • 운동선수라 요리에 조예가 깊지 않은 정후가 종종 직접 해주는 단골 메뉴 중에 하나가 대파 라면이었다.
  • 언젠가 내가 왜 굳이 대파를 넣냐 하니,
  • 자신이 요리를 잘 하지는 못하지만 해줄 수 있는 선에서는 뭐 하나라도 더 좋게 해주고 싶다는 자기의 마음이라나 뭐라나.
  • "아-"
  • 내가 옛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면발이 잘 풀리도록 긴 젓가락으로 면발을 돌리던 정후가 왼쪽 어깨를 잡고 작은 신음을 냈다.
  • 이미 자잘한 부상을 입은 적 있던 왼쪽 어깨였기에 나는 식탁의자에서 일어나 걱정스러운 마음으로 정후에게 다가갔다.
  • "어깨 다친 거야?"
  • "아니, 아니야. 그냥 살짝 결리네."
  • 정후는 근육통이 살짝 왔을 뿐이라며 어깨를 휙휙 돌리며 내게 아무렇지 않음을 표했다.
  • "진짜 괜찮은 거지?"
  • "그렇다니까."
  • "혹시 모르니까 병원 가봐."
  • "운동선수들 다 이 정도는 달고 살아. 괜찮아요."
  • "내가 안 괜찮아."
  • 심각해진 내 표정에 조만간 병원에 가겠다며 나를 달래는 정후였다.
  • 네가 걱정돼서 하는 말인데 왜 나를 달래 바보야.
  • 정후와 사귀면서 부상 때문에 마음 졸였던 일이 많았다.
  • 운동선수라는 직업 특성상 부상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겠지만
  • 막을 수 있는 건 막았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 호미로 막을 걸 가래로 막게 만들지 말란 말이야.
  • 정후는 유독 자신의 몸에 대해서는 둔감한 면이 있었다.
  • 이 정도는 괜찮아, 이 정도는 운동선수들 다 달고 살아.
  • 바보가 사람 마음도 모르고.
  • "너 다치면 나-"
  • 눈물이 그렁그렁 해진 나를 보며 정후가 당황한 모습으로 허둥지둥거렸다.
  • "왜 울고 그래, 나 진짜 병원 갈게. 진짜라니까?"
  • 평소엔 무던하게 굴지만 이런 부분에서는 마음이 여려지는 나였다.
  • "안 가기만 해봐."
  • "하늘 같은 여자친구 말 들어야지. 라면 다 됐으니까 얼른 앉기나 하세요."
  • 나는 감정을 추스른 채로 식탁에 앉아 정후가 놓아준 앞 그릇에 라면을 건져 호로록 먹기 시작했다.
  • 대파를 넣은 라면은 그냥 라면보다 얼큰한 맛이 있었다.
  • 평소 짬뽕을 좋아하는 나였기에 정후가 끓여준 대파라면은 내 취향을 완전히 저격했다.
  • 맛있게 라면을 먹는 내 모습을 보며 정후가 흐뭇하게 웃었다.
  • "내가 끓여준 라면이 최고지?"
  • "응, 이건 인정."
  • 라면을 먹다 말고 엄지를 치켜세우며 웃는 내 모습에 정후도 소리 내어 웃었다.
  • "오늘 녹화는 어땠어?"
  • "연예인들 진짜 존경, 나는 아무래도 방송 체질은 아닌 것 같아."
  • "왜?"
  • "조명은 뜨겁고 계속 앉아있으니까 허리는 아프고 내 머리는 뱅글뱅글."
  • 내가 고개를 돌리며 뱅글뱅글 돌아간다는 흉내를 내었다.
  • 정후는 나를 따라 하며 뱅글뱅글이야? 하면서 웃어댔다.
  • "아 엠씨 분이 남자친구랑 어떻게 만나게 됐냐고도 물어봤어."
  • "아 그래?"
  • 정후는 지금까지 실컷 웃다가 갑자기 눈을 돌리며 딴청을 피웠다.
  • 내가 첫 만남 이후로 전설의 '프로바이오틱스' 사건을 가지고 틈만 나면 놀려댔기에
  • 정후는 이 이야기를 그렇게 좋아하지는 않았다.
  • 그런데도 내가 이 이야기를 주기적으로 다시 꺼내게 되는 건
  • 이 이야기가 나오면 얼굴이 살짝 발그레해진 채로 부끄러워하는 정후의 얼굴이 너무 귀여웠기 때문에.
  • "내가 내 남자친구는 프로바이오틱스를-"
  • "방송에서 그 얘기를 했다고?"
  • "아니, 하려다가 그냥 평범하게 만났다고 했지."
  • 눈웃음을 치며 혀를 쏙 내미는 내 모습에 정후가 못 말린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 "못됐어, 남지현."
  • "그래서 내가 싫어?"
  • "그럴 리가 없잖아."
  • 그런 모습까지도 사랑하지, 주문을 외는 것처럼 나를 향해 말하는 정후였다.
  • 내 가슴 구석구석까지 충만하게 사랑을 채워주는 주문.
  • 내가 사랑하는, 평범하지만 평범하지 않은 순간들.
  • 내 남은 삶을 이런 시간들로 채워나갔으면 좋겠어.
  • 그때, 애정 어린 눈길로 나를 쳐다보고 있던 정후가 말을 했다.
  • "지현아 나 곧 있으면 시즌 끝나는데"
  • "응."
  • "시즌 끝나면 우리 결혼할까?"
  • 결혼에 대한 내색을 전혀 하지 않던 정후가 꺼낸 '결혼'이라는 말은 당황스러웠다.
  • 싫어서 당황스러운 게 아니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
  • 언젠가 하게 될 결혼이긴 하지만, 그게 지금일 거라 생각한 적은 없었다.
  • 정후는 kbo에서 최고의 전성기를 달리고 있는 슈퍼스타였기에
  • 결혼을 한다면 지금보다 좀 더 나중이 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 "이렇게 갑자기?"
  • "난 계속 생각은 하고 있었어."
  • 지현과 만난 지 100일도 안됐을 때부터 줄곧 너와 결혼하고 싶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그럼 지현이 소름 돋는다고 기함할 것 같기에.
  • "나랑 결혼하자 남지현."
  • "아니, 잠시만."
  • 내가 싫은 기색을 보이는 거라 생각한 건지 눈꼬리가 축 처지는 정후였다.
  • 저런 모습을 보이면 내 마음이 약해지는 줄 알고 일부러 저러는 거지.
  • 3년간 나랑 사귀면서 여우 다 됐다, 임정후.
  • 정후와의 결혼이 싫은 건 절대 아니었다.
  • 언젠가 결혼을 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정후가 아닐까 생각도 했었다.
  • 내가 이러는 이유는 다만,
  • "싫은 게 아니라 내가 결혼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을 해본 적이 없어."
  • "너만 좋다고 하면 내가-"
  • "나한테 생각할 시간을 주라, 정후야."
  • 웃는 얼굴이지만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하는 나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정후였다.
  • 우리의 결혼,
  • 오랫동안 잔잔했던 바다에 파도가 찾아오고 있었다.
  • 지금까지와는 다른 쾌감을,
  • 때론 지금까지는 느껴보지 못한 무력감을
  • 안겨줄 거센 파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