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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검은 마이바흐가 산자락을 등에 진 저택 안마당으로 천천히 들어갔다. 뒤쪽의 철문이 소리도 없이 닫혔다.
  • 마당에는 가지런히 다듬은 초록 수목이 분수를 둘러싸고 있었다. 멀리 본관의 유럽식 첨탑이 노을에 따뜻하게 빛났다.
  • 운전기사가 공손히 문을 열었다. 한민아가 하이힐을 또각이며 내리더니 익숙하면서도 어색한 풍경을 훑었다.
  • 집사가 계단 아래서 이미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를 보자 몸을 살짝 숙였다. “아가씨, 가주님이랑 도련님이 서재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 한민아는 고개를 끄덕이고 집사를 따라 본관으로 들어갔다.
  • 복도 양옆에는 대대로 내려온 한씨 가문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다.
  • 맨 끝 한 칸이 비어 있었다. 마치 그녀 자리를 비워둔 듯했다.
  • 서재 문이 열렸다.
  • 테이블 뒤에 앉아 있던 중년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에 복잡한 감정이 스쳤다.
  • 그는 이씨 가문의 현 가주 한경수이자 한민아가 수년째 못 본 친아버지였다.
  • 옆에 서 있던 젊은 남자가 성큼 다가왔다. 손에는 서류 한 벌이 들려 있었다.
  • 그는 한민아의 오빠 한민혁이었다. 이마 사이로 묵직한 기품이 배어 있었다. “이건 우리 가문 산하 ‘환우 그룹’ 지분 양도서야. 정확하게 51%거든. 집에 온 걸 환영해.”
  • 한민아가 서류를 받아 들었다. 손끝이 종이에 적힌 ‘환우 그룹’ 글자를 스쳤지만 눈빛은 별다른 흔들림이 없었다.
  • 그녀는 이 51% 뒤에 한씨 가문 전체의 책임과 기대가 달려 있다는 걸 알고 있었다 .
  • 한민혁이 몸을 돌려 서랍에서 또 다른 서류를 꺼내더니 한민아 앞에 내려놨다. “이건 너랑 이준우의 이혼 합의서야. 아버지도 이미 확인하셨어.”
  • 한경수가 딸을 보며 천천히 말했다. “맞지 않는 혼인이라면 일찍 끝내는 게 맞지. 한씨 가문은 널 억울한 혼인에 갇히도록 내버려두지 않아.”
  • 한민아는 펜을 집어들고 추호의 망설임도 없이 이혼 합의서의 서명란에 자기 이름을 또렷이 썼다.
  • 펜끝은 날카롭고 단호했다. 지금의 결심 그대로였다. 과거의 온갖 일들은 이 순간부터 완전히 넘겨버렸다.
  • 한민혁이 도장을 하나 건넸다. 한씨 가문을 상징하는 인장이었다.
  • “여기에 도장을 찍으면 이혼 합의는 법적 효력이 생겨. 이씨 가문 쪽은 우리가 알아서 얘기할게.”
  • 한민아는 인장을 받아 들고 지정된 위치에 또렷하게 찍었다.
  • 한경수는 침착한 딸의 모습을 바라봤다. 눈에 잠깐 짠한 기색이 번졌다가 곧 인정과 칭찬으로 바뀌었다.
  • “이제부터는 환우 그룹 업무를 빨리 익혀야 해. 모르는 건 큰오빠한테 바로 물어봐.”
  • 한민혁이 고개를 끄덕이며 거들었다. “요즘 그룹에서 큰 프로젝트가 몇 개 굴러가고 있어. 그중 북성의 ‘그 프로젝트’는 무조건 따와야 해.”
  • 한민아가 오빠를 올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북성 프로젝트는 구체적으로 어떤 분야를 다뤄? 지금 경쟁자는 누구야?”
  • 환우 그룹 지분을 맡았으면 곧바로 일에 뛰어들어야 했다. 그게 그녀의 책임이었다.
  • 한민혁이 프로젝트 자료 한 벌을 꺼내 건넸다. “주로 바이오 제약 분야야. 지금 가장 큰 경쟁자는 이씨 가문 산하 제약 그룹이야.”
  • 이씨 가문이란 말에 한민혁의 말투가 살짝 멈칫했다. 시선이 저도 모르게 한민아에게 갔다.
  • 한민아는 자료를 받아 첫 장을 펼쳤다. ‘바이오 제약’이라는 단어에 눈길이 멈췄고 시선이 한층 날카로워졌다.
  • 그녀가 예전 해외 유학 때 전공이 바로 바이오 제약이었다. 이 분야는 사실 낯설지 않았다.
  • “이씨 가문은 바이오 제약 쪽에서 오래 파고들었지. 절대 만만치 않아. 그래도 우리는 나름 강점이 있어.”
  • 한민혁이 자신감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린 핵심 기술 하나를 쥐고 있어. 이 프로젝트만 따내면 이 분야에서 주도권을 잡을 수 있어.”
  • 한민아는 자료를 덮고 아버지와 오빠를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어. 자료를 빨리 파악하고 프로젝트 추진에 바로 들어갈게.”
  • 목소리는 단단했다.
  • 지난 결혼은 끝났기에 앞으로의 길은 스스로 더 단호하고 멀리 걸어갈 것이다.
  • 한민혁은 한민아가 이씨 가문에 흔들리지 않는 걸 보고 안도의 숨을 내쉬더니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래. 내일 너 데리고 그룹을 돌아보자. 핵심 팀도 소개해 줄게.”
  • 한경수가 자리에서 일어나 한민아의 곁으로 오더니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 밤 푹 쉬어. 내일부터는 새로운 삶을 맞이하자.”
  • 그녀가 살짝 고개를 숙였다. “아빠, 오빠, 고마워.”
  • 집사가 노크하고 서재로 들어오더니 공손히 말했다. “가주님, 도련님, 아가씨, 저녁 준비됐습니다.”
  • 한경수가 미소 지었다. “가자. 우리 가족이 같이 저녁 먹는 거 정말 오래간만이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