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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님, 사모님 아이를 품고 컴백했습니다

대표님, 사모님 아이를 품고 컴백했습니다

Astraea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 이준우가 장기 기증 동의서를 한민아 앞에 밀어놨다.
  • “사인해. 채연한테 이 신장이 필요해. 사인하면 넌 여전히 내 아내야.”
  • 3년 동안 사랑했던 그 얼굴을 바라보는 한민아의 가슴이 서서히 얼어붙었다.
  • 그녀는 울며 매달리지 않았다. 오히려 싸늘하게 웃더니 그의 눈앞에서 종이를 산산이 찢어버렸다.
  • “이혼하자.”
  • 이준우가 멍하니 쳐다보는 사이, 그녀는 휴대폰을 꺼내 암호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 그러고는 딱 다섯 글자만 말했다. “나 돌아왔어.”
  • 그날 밤, 수도에 있는 이씨 가문의 차량 행렬이 골목 모퉁이에서 조용히 대기했다.
  • “아가씨, 돌아오신 걸 환영합니다.”
  • 집사가 공손히 인사하는데 그녀는 뒤도 안 보고 마이바흐에 올라탔다.
  • 5년 뒤 세계 경제 포럼. 한민아가 남매 쌍둥이와 함께 등장해 모두를 압도했다.
  • 행사장 밖에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졌다. 이준우는 눈이 충혈된 채 빗속에서 무릎을 꿇고 용서를 빌었다.
  • 그런데 그와 꼭 닮은 꼬마 남자아이가 싸늘한 얼굴로 가로막았다.
  • “아저씨, 우리 엄마한테서 떨어지세요.”
  • …….
  • 이준우가 갈기갈기 찢긴 동의서를 움켜쥐자 종잇조각이 손가락 사이로 우수수 떨어졌다.
  • 잘생긴 얼굴에는 서리가 내린 듯 싸늘했다. 그는 잘못 들은 건 아닌지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 “한민아, 방금 뭐라고 했어?”
  • “이혼하자고.” 한민아가 고개를 들었다. 눈동자에는 파문 하나 없었다.
  • 지난 3년간 쌓인 애정과 온기가 방금 그 순간 푹 꺼져 버렸다.
  • 이준우는 말도 안 되는 농담이나 들은 것처럼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밀당이야? 네가 감히? 우리 이씨 가문을 떠나면 하루도 못 버티는 주제에?”
  • 그가 한 발 다가서자 그림자가 드리웠다. “사인 말고 다른 선택지 따윈 없거든.”
  • 한민아는 더 이상 보지도 않고 그대로 휴대폰을 꺼냈다.
  • 그러고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긴 암호 번호를 눌렀다. 매끄러운 동작에 망설임은 하나도 없었다.
  • 전화가 연결되자 그녀는 또렷하게 말했다.
  • “나 돌아왔어.”
  • 그러고는 상대 반응을 기다리지도 않고 전화를 끊었다.
  • 고작 3초 남짓한 시간이었지만 이준우의 가슴속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
  • 그는 이 행동을 이해 못 했다. 지금의 그녀는 더더욱 알 수가 없었다.
  • “무슨 허세를 부리는 거야?” 그는 손을 뻗어 폰을 빼앗으려 했지만 한민아는 가볍게 피했다.
  • 그녀가 이미 싸 둔 캐리어를 끌어 올리자 바퀴가 반질한 바닥을 스치며 살짝 소리를 냈다.
  • “이준우.” 문가에 선 그녀가 발을 멈췄다. 하지만 고개는 돌리지 않았다. “윤채연이랑 영원히 잘 살길 바래.”
  • 이혼 합의서는 한민아의 변호사가 보냈다. 조항은 야박할 정도로 단순했다. 한민아는 이씨 가문의 모든 재산을 포기하고 빈손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 이준우는 조항을 보더니 코웃음 치며 사인했다. 사흘 내에 한민아가 기어올 거라고 믿고 있었다.
  • 심지어 그는 비서에게까지 지시했다. “계속 감시해. 얼마나 버티나 궁금하네.”
  • 그는 그녀가 처절하게 무너지는 꼴을 기다렸고 뼈저리게 후회하길 바랐다.
  • 그런데 보고는 뜻밖이었다.
  • 한민아는 저택을 나서자마자 값싼 체인 호텔로 곧장 향했고 카드 대신 현금으로 하룻밤만 결제했다.
  • 이씨 가문과 얽힌 모든 것에 미련이 티끌만큼도 없어 보였다.
  • 속이 뒤집힌 이준우는 무의식적으로 한민아 명의의 보조카드 사용 내역을 조회했다.
  • 결과를 확인한 그는 순간 멍해졌다. 지난 3년, 한도 무제한인 그 보조카드로 결제된 건 단 한 건도 없었다.
  • 모든 명세가 전부 0원이었다.
  • 즉 그녀는 그의 돈을 한 푼도 쓰지 않은 셈이었다.
  • 그 사실이 가느다란 바늘처럼 불쑥 그를 찔렀다.
  • 같은 시각, 한민아는 작은 캐리어를 끌고 길모퉁이에 서 있었다.
  • 밤바람이 긴 머리를 스치자 창백하지만 이상하리만큼 고요한 그녀의 옆얼굴이 드러났다.
  • 검은색 마이바흐 체펠린 몇 대가 소리도 없이 그녀 앞에 미끄러지듯 다가와 정확히 멈췄다.
  • 그 위압감에 주변 시선이 순식간에 쏠렸다.
  • 선두 차량 문이 열렸다. 옷차림이 반듯하고 머리 한 올 흐트러짐 없는 노신사가 허리를 깊게 굽혀 내렸다.
  • 그는 주변의 놀란 시선을 모조리 무시하고 한민아 앞으로 곧장 와서 극진히 고개를 숙였다.
  • “아가씨.” 그는 부드러운 캐시미어 숄을 두 손으로 내밀었다. 눌러 담은 흥분이 묻어나는 목소리였다. “가주님께서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 한민아는 숄을 받아 어깨에 가볍게 둘렀다. 따스한 감촉에 밤의 냉기가 스르르 가셨다.
  • 그녀는 몸을 숙여 차에 올랐다. 문이 사뿐 닫히자 바깥의 소음이 순식간에 차단됐다.
  • 차량 행렬은 매끈하게 도로로 합류하더니 화려한 도심 불빛 끝으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 이준우가 붙인 미행조는 흐릿한 테일라이트와 섬뜩하게 눈에 띄는 번호판 접두부만 겨우 찍었다.
  • 이준우는 ‘0원’ 명세서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전화를 받았다.
  • 수화기 너머에서 부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대표님… 놓, 놓쳤습니다. 사모님을 데려간 차량 행렬은 수도를 뜻하는 A 시리즈… A로 시작하는 특수 번호판이었습니다…”
  • 그는 휴대폰을 꽉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