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도 아니었다. "깨었나요?" 같은 것도 아니었다. 날 사랑하는 누군가가 구석에서 훌쩍이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 엄마의 목소리. 납작하고 실무적인 톤. 취소된 저녁 약속이나 의논하듯, 벽을 타고 스르륵 흘러들었다.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몸 안 어딘가 짐승 같은 감이 속삭였다. 가만있어. 아직 네가 있는 거 들키지 마. 그래서 눈을 감은 채, 숨을 느리게 고르고, 팔에 줄이 꽂힌 그 뻣뻣한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 아이들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금방 회복할 거야."
아버지가 말했다.
"민지는 강하니까."
"지금 당장 전부 알게 할 필요는 없어요."
도우진. 내 남편. 상황을 관리할 때 나오는 그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
"우선 쉬게 하죠."
쉬게 하자. 마치 나를 일정에 맞춰 처리해야 하는 문제라도 되는 양.
혀끝을 입천장에 붙이고 셋을 셌다. 옆의 기계가 울었다. 한 번. 두 번. 위의 형광등 불빛이 감긴 눈꺼풀을 통해 분홍빛으로 스며들었다. 소독약 냄새는 목 뒤에 끈덕지게 들러붙어, 헛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곳들이 다 욱신거렸다. 다친 느낌이라기보단, 뭔가가 뽑겨나간 기억이 몸에 박힌 듯한, 뼛속까지 스민 통증.
의사는 일찍 왔었다. 말보다 얼굴이 더 선명했다. 불가능한 소식을 너무 자주 전해 더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람의, 훈련된 무표정. 임신 말기, 그리고 합병증이 있었다고 했다.
"정말 유감입니다, 이민지 씨는..."
그리고 그다음 말. 그 뒤로 줄곧 되감아 돌려본 그 말. 멍든 자리를 누르듯 계속 눌러보게 만드는 그 말. 다시는 임신을 유지할 수 없을 거라고.
나는 누운 채로 '제물'이라는 단어가 찬물처럼 온몸을 관통하는 걸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짐승 얘기가 아니다. 돈이나 합병도 아니고, 회의장에서 하는 상징 쇼도 아니다.
내 아기들 얘기다.
내 두 손은 매트리스에 납작 붙어 있었다. 그 상태로 억지로 고정했다.
"완전히 무너질 것 같은데."
오빠 이진호가 말했다. 그나마 불편해하는 기색이 있는 사람은 이진호 하나였고, 그 불편함도 한 4초쯤. 그는 곧 덧붙였다.
"그래도 버틸 거예요. 이민지는 늘 잘 견뎌내잖아요."
"그래서 민지로 정한 거야."
엄마가 거의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서 나로 정했대.
나는 이 집에서 서른두 해를 보냈다. 서른두 해 동안 어떻게든 충분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왜 이 집의 온기가 항상 내 앞에서 뚝 끊기는지 이해해보려고도 했다. 왜 이소윤은 부드러운 눈길을 받고, 나는 고개 끄덕임만 받는지. 왜 내 저녁 식탁이 늘 남의 집 식탁 같은 기분이었는지. 다 내 머릿속 문제라고도 했다. 내가 예민하다고도 했다. 가족은 원래 복잡하고, 사람마다 사랑 표현이 다르고, 내가 더 잘하면 된다고, 더 크게 사랑하고, 더 많이 베풀면 된다고.
서른두 해.
선택됐다. 도구처럼.
"차는 흔적 남은 거 없지?"
아버지가 물었다.
"완벽했습니다."
도우진이 말했다.
"추적할 방법이 없어요."
차. 내 사고. 그 사고로 내 아기들이 사라졌고, 의사의 신중하고 준비된 말에 따르면, 나는 다시는 임신을 유지하지 못하게 됐다. 그건 사고가 아니었다. 빙판도, 터진 타이어도, 신호위반도 아니었다.
그걸 꾸민 사람이 내 남편이었다.
나는 계속 숨을 쉬었다. 코로 들이마시고, 느리고 일정하게. 하먼 인더스트리 갈라 행사가 너무 시끄럽고 눈부셔서, 화장실에 숨어 들어가, 이강태의 이름만 따라붙는 말없는 딸이 아닌, 그냥 평범한 한 사람으로 단 1분이라도 버티고 싶을 때마다 반복하던 그 호흡법 그대로.
들이마시고.
내쉬고.
"금요일에 소윤이가 발표식만 나가면 돼."
엄마가 말했다.
"민지는 슬퍼하다가 또 괜찮아지겠지. 우린 곁에서 도와주면 되고... 나머지는 몰라도 돼."
"근데 알게 되면요?"
이진호가 물었다.
잠깐. 아주 잠깐의 정적.
"그럴 일 없어."
아버지가 말했다.
그냥 그렇게. 망설임도, 단서도, 목소리의 흔들림도 없이. 그럴 일 없어. 평생 한 번도 널 놀라게 한 적 없는 사람에게 하는 말. 머릿속에 완벽히 지도 그려져 있고 통제해온 사람이라, 그 사람이 기대 밖으로 벗어날 가능성 자체를 진짜로는 상상하지 않는 톤.
아버지는 날 본 적이 없었다.
아무도 없었다.
의자 긁히는 소리가 났다. 발자국. 문이 열리고 닫혔다. 긴 침묵이 방 안에 가라앉았다. 나는 그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완전히 혼자인 게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눈을 떴다.
천장은 하얗고, 한쪽 모서리엔 물 자국이 퍼져 있었다. 팔 안쪽에 꽂힌 링거가 내가 움직이자 살짝 당겼다. 좁은 창 밖 하늘은 이른 아침 특유의 회색. 도시가 오늘을 어떤 하루로 만들지 아직 못 정한, 색 빠진 시간대였다.
고개를 돌려 침대 옆 의자를 봤다. 방금 전까지 누가 앉아 있었는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아마 도우진. 자기 손으로 아내를 이 병원에 보내놓고 병문안을 온 남편. 탁자엔 커피컵이 있었다. 김이 아주 조금 올라왔다. 그가 마시는 브랜드. 4년 내내 내 주방에 쌓아두던 그 커피. 나한테 뭘 좋아하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으면서. 사소한 거다. 평소엔 못 보는 사소함. 하지만 병원 침대에 누워서, 나를 선택했어야 할 사람이 나를 얼마나 투명인간 취급했는지 낱낱이 생각하다 보면 보이는 그런 사소함.
나는 내가 상상하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막연히 떠올려보곤 했다. 이런 걸 알게 되면 난 산산조각 날 거라고. 숨 못 쉴 때까지 울 거라고. 소리 지를 거라고. 뭐라도 집어 던질 거라고.
근데 내가 느낀 건 고요였다. 무섭게 또렷해지는 고요. 너무 오래 같이 살아서 존재 자체를 잊고 있던 잡음이 딱 끊기는 순간처럼, 그 뒤에 남는 침묵이 귀를 찌를 만큼 아픈 그런 고요. 이 집에 대해 내가 가졌던 모든 혼란, 내 직감을 의심했던 모든 순간, 내가 예민하고, 집착하고, 과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모든 때가 한 줄로 딱 맞아떨어졌다.
내가 과했던 게 아니었다. 난 그들의 길을 막고 있었을 뿐이다.
손바닥을 배에 납작 붙였다.
빈자리.
창밖 하늘이 조금씩 변했다. 회색 가장자리가 얇게 밝아졌다. 이른 아침 특유의 망설임. 태양이 오늘이란 날을 과연 내줄 만한지 의심하는 듯했다. 나는 그걸 한참 지켜봤다. 숨을 쉬었다. 고요가 할 일을 하게 뒀다.
그때 탁자 위 폰이 진동했다.
천천히 손을 뻗었다. 팔이 뻣뻣해서, 링거가 다시 한 번 잡아당겼다. 모르는 번호. 내려놓을 뻔했다가 다시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