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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 버리고 선택한 딸

날 버리고 선택한 딸

SirBeast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그녀가 눈뜨자마자 맞닥뜨린 것

  • "아기들은 더 이상 없어. 솔직히, 강태 씨, 이게 차라리 나아."
  • 세상으로 돌아왔을 때 내가 처음 들은 말이 그거였다.
  • 내 이름도 아니었다. "깨었나요?" 같은 것도 아니었다. 날 사랑하는 누군가가 구석에서 훌쩍이는 소리도 아니었다. 그냥 우리 엄마의 목소리. 납작하고 실무적인 톤. 취소된 저녁 약속이나 의논하듯, 벽을 타고 스르륵 흘러들었다.
  • 나는 움직이지 않았다. 이유는 모른다. 몸 안 어딘가 짐승 같은 감이 속삭였다. 가만있어. 아직 네가 있는 거 들키지 마. 그래서 눈을 감은 채, 숨을 느리게 고르고, 팔에 줄이 꽂힌 그 뻣뻣한 병원 침대에 누워 있었다. 내 아이들이 있던 자리는 텅 비어 있었고.
  • "금방 회복할 거야."
  • 아버지가 말했다.
  • "민지는 강하니까."
  • "지금 당장 전부 알게 할 필요는 없어요."
  • 도우진. 내 남편. 상황을 관리할 때 나오는 그 낮고 조심스러운 목소리.
  • "우선 쉬게 하죠."
  • 쉬게 하자. 마치 나를 일정에 맞춰 처리해야 하는 문제라도 되는 양.
  • 혀끝을 입천장에 붙이고 셋을 셌다. 옆의 기계가 울었다. 한 번. 두 번. 위의 형광등 불빛이 감긴 눈꺼풀을 통해 분홍빛으로 스며들었다. 소독약 냄새는 목 뒤에 끈덕지게 들러붙어, 헛구역질이 올라올 지경이었다. 이름 붙일 수 없는 곳들이 다 욱신거렸다. 다친 느낌이라기보단, 뭔가가 뽑겨나간 기억이 몸에 박힌 듯한, 뼛속까지 스민 통증.
  • 의사는 일찍 왔었다. 말보다 얼굴이 더 선명했다. 불가능한 소식을 너무 자주 전해 더는 대가를 치르지 않는 사람의, 훈련된 무표정. 임신 말기, 그리고 합병증이 있었다고 했다.
  • "정말 유감입니다, 이민지 씨는..."
  • 그리고 그다음 말. 그 뒤로 줄곧 되감아 돌려본 그 말. 멍든 자리를 누르듯 계속 눌러보게 만드는 그 말. 다시는 임신을 유지할 수 없을 거라고.
  • "타이밍이 딱 맞았어."
  • 엄마가 말했다.
  • "소윤이의 발표식이 이틀 뒤잖아. 민지가 깨어나서 캐묻기 시작하면 일만 복잡해졌을 거야."
  • 나는 숫자를 세던 걸 멈췄다.
  • 발표식.
  • "모든 준비는 끝났다."
  • 아버지가 말했다. 거래가 깔끔하게 성사됐을 때 내는 그 만족스러운 톤이었다.
  • "무당이 확인했어. 발표 전에 제물을 바쳐야 한대. 그게 조건이야."
  • "발표식은 금요일이었죠?"
  • 도우진이 말했다.
  • "맞아, 금요일."
  • 아버지가 맞장구쳤다.
  • 나는 누운 채로 '제물'이라는 단어가 찬물처럼 온몸을 관통하는 걸 느꼈다. 그리고 생각했다. 짐승 얘기가 아니다. 돈이나 합병도 아니고, 회의장에서 하는 상징 쇼도 아니다.
  • 내 아기들 얘기다.
  • 내 두 손은 매트리스에 납작 붙어 있었다. 그 상태로 억지로 고정했다.
  • "완전히 무너질 것 같은데."
  • 오빠 이진호가 말했다. 그나마 불편해하는 기색이 있는 사람은 이진호 하나였고, 그 불편함도 한 4초쯤. 그는 곧 덧붙였다.
  • "그래도 버틸 거예요. 이민지는 늘 잘 견뎌내잖아요."
  • "그래서 민지로 정한 거야."
  • 엄마가 거의 다정하게 말했다.
  • 그래서 나로 정했대.
  • 나는 이 집에서 서른두 해를 보냈다. 서른두 해 동안 어떻게든 충분한 사람이 되려고 애썼다. 왜 이 집의 온기가 항상 내 앞에서 뚝 끊기는지 이해해보려고도 했다. 왜 이소윤은 부드러운 눈길을 받고, 나는 고개 끄덕임만 받는지. 왜 내 저녁 식탁이 늘 남의 집 식탁 같은 기분이었는지. 다 내 머릿속 문제라고도 했다. 내가 예민하다고도 했다. 가족은 원래 복잡하고, 사람마다 사랑 표현이 다르고, 내가 더 잘하면 된다고, 더 크게 사랑하고, 더 많이 베풀면 된다고.
  • 서른두 해.
  • 선택됐다. 도구처럼.
  • "차는 흔적 남은 거 없지?"
  • 아버지가 물었다.
  • "완벽했습니다."
  • 도우진이 말했다.
  • "추적할 방법이 없어요."
  • 차. 내 사고. 그 사고로 내 아기들이 사라졌고, 의사의 신중하고 준비된 말에 따르면, 나는 다시는 임신을 유지하지 못하게 됐다. 그건 사고가 아니었다. 빙판도, 터진 타이어도, 신호위반도 아니었다.
  • 그걸 꾸민 사람이 내 남편이었다.
  • 나는 계속 숨을 쉬었다. 코로 들이마시고, 느리고 일정하게. 하먼 인더스트리 갈라 행사가 너무 시끄럽고 눈부셔서, 화장실에 숨어 들어가, 이강태의 이름만 따라붙는 말없는 딸이 아닌, 그냥 평범한 한 사람으로 단 1분이라도 버티고 싶을 때마다 반복하던 그 호흡법 그대로.
  • 들이마시고.
  • 내쉬고.
  • "금요일에 소윤이가 발표식만 나가면 돼."
  • 엄마가 말했다.
  • "민지는 슬퍼하다가 또 괜찮아지겠지. 우린 곁에서 도와주면 되고... 나머지는 몰라도 돼."
  • "근데 알게 되면요?"
  • 이진호가 물었다.
  • 잠깐. 아주 잠깐의 정적.
  • "그럴 일 없어."
  • 아버지가 말했다.
  • 그냥 그렇게. 망설임도, 단서도, 목소리의 흔들림도 없이. 그럴 일 없어. 평생 한 번도 널 놀라게 한 적 없는 사람에게 하는 말. 머릿속에 완벽히 지도 그려져 있고 통제해온 사람이라, 그 사람이 기대 밖으로 벗어날 가능성 자체를 진짜로는 상상하지 않는 톤.
  • 아버지는 날 본 적이 없었다.
  • 아무도 없었다.
  • 의자 긁히는 소리가 났다. 발자국. 문이 열리고 닫혔다. 긴 침묵이 방 안에 가라앉았다. 나는 그 한복판에 누워 있었다. 완전히 혼자인 게 확실해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눈을 떴다.
  • 천장은 하얗고, 한쪽 모서리엔 물 자국이 퍼져 있었다. 팔 안쪽에 꽂힌 링거가 내가 움직이자 살짝 당겼다. 좁은 창 밖 하늘은 이른 아침 특유의 회색. 도시가 오늘을 어떤 하루로 만들지 아직 못 정한, 색 빠진 시간대였다.
  • 고개를 돌려 침대 옆 의자를 봤다. 방금 전까지 누가 앉아 있었는지 온기가 남아 있었다. 아마 도우진. 자기 손으로 아내를 이 병원에 보내놓고 병문안을 온 남편. 탁자엔 커피컵이 있었다. 김이 아주 조금 올라왔다. 그가 마시는 브랜드. 4년 내내 내 주방에 쌓아두던 그 커피. 나한테 뭘 좋아하는지 한 번도 묻지 않았으면서. 사소한 거다. 평소엔 못 보는 사소함. 하지만 병원 침대에 누워서, 나를 선택했어야 할 사람이 나를 얼마나 투명인간 취급했는지 낱낱이 생각하다 보면 보이는 그런 사소함.
  • 나는 내가 상상하던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막연히 떠올려보곤 했다. 이런 걸 알게 되면 난 산산조각 날 거라고. 숨 못 쉴 때까지 울 거라고. 소리 지를 거라고. 뭐라도 집어 던질 거라고.
  • 근데 내가 느낀 건 고요였다. 무섭게 또렷해지는 고요. 너무 오래 같이 살아서 존재 자체를 잊고 있던 잡음이 딱 끊기는 순간처럼, 그 뒤에 남는 침묵이 귀를 찌를 만큼 아픈 그런 고요. 이 집에 대해 내가 가졌던 모든 혼란, 내 직감을 의심했던 모든 순간, 내가 예민하고, 집착하고, 과한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몰아붙였던 모든 때가 한 줄로 딱 맞아떨어졌다.
  • 내가 과했던 게 아니었다. 난 그들의 길을 막고 있었을 뿐이다.
  • 손바닥을 배에 납작 붙였다.
  • 빈자리.
  • 창밖 하늘이 조금씩 변했다. 회색 가장자리가 얇게 밝아졌다. 이른 아침 특유의 망설임. 태양이 오늘이란 날을 과연 내줄 만한지 의심하는 듯했다. 나는 그걸 한참 지켜봤다. 숨을 쉬었다. 고요가 할 일을 하게 뒀다.
  • 그때 탁자 위 폰이 진동했다.
  • 천천히 손을 뻗었다. 팔이 뻣뻣해서, 링거가 다시 한 번 잡아당겼다. 모르는 번호. 내려놓을 뻔했다가 다시 열었다.
  • "지금 이거 읽고 있어도 티 내지 마세요. 문쪽에 지켜보는 사람이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