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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 정신을 차렸을 때, 서이수는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 나는 팔에 꽂힌 링거 바늘을 거칠게 뽑아냈다. 억류한 피가 시트를 적셨지만 상관없다. 비틀거리며 병실을 뛰쳐나간 복도 모통이, 그곳에서 누군가와 통화 중인 서이수를 마주쳤다.
  •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여자처럼 달콤하게 응석을 부리고 있었다.
  • "태준 오빠, 오빠한테 줄 엄청난 선물이 있어! 나, 임신했어!"
  • 머릿속이 하얗게 점멸했다. 날 선 칼날이 심장을 난도질하는 기분이었다. 강태준, 그는 정말로 나를 배신했다. 그것도 모자라 그 여자와 아이까지 가졌다니. 그대로 돌아서려던 찰나, 서이수가 나를 발견하고 불러 세웠다.
  • "방금 검사 결과 나왔어. 연우야, 부럽니?"
  • 나에겐 지훈이뿐이었지만, 그마저도 강 씨 인질로 빼앗겼다.
  • "낳는 게 능사가 아니라 곁에서 키우는 게 진짜 능력이라며? 네가 예전에 그랬잖아."
  • 이수가 가소롭다는 듯 비웃었다.
  • "난 너랑 달라. 내가 가문에서 쫓겨났어도, 강 씨 집안에서 내 아이를 뺏어갈 순 없을걸? 이 아이, 기필코 낳을 거야. 그리고 네 아들 지훈이가 어떻게 쫓겨나는지 네 눈으로 똑똑히 보게 해줄게."
  • 그녀는 보란 듯이 손가락을 펴 보였다.
  • "아, 깜빡할 뻔했네. 이거 봐, 태준 오빠가 나만을 위해 직접 디자인해 준 반지야."
  • 내가 반응할 틈도 없었다. 서이수의 표정이 순식간에 일그러지더니. 내 손을 낚아채 자신의 뺨을 향해 강하게 내리쳤다.
  • 찰싹!
  • 날카로운 파열음과 함께 검은 그림자가 달려와 나를 거칠게 밀쳐냈다. 그대로 쓰러지는 내 위를 지나쳐 서이수를 품에 안았다. 강태준이었다.
  • "이연우! 너 미쳤어?!"
  • 차가운 바닥으로 나동그라진 나는 온몸을 짓누르는 통증에 일어설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강태준은 서이수를 부서질 듯 감싸 안았다. 그 눈빛에는 내가 한 번도 받아본 적 없는 애틋함과 안쓰러움이 일렁였다.
  • "태준 오빠, 연우 탓하지 마요. 다 내 잘못이야……. 빨리 가서 연우 다친 데 없나 좀 봐줘요."
  • 서이수는 그의 품에 기대어 가련하게 눈시울을 붉혔다. 하지만 강태준의 눈에는 오직 서이수뿐이었다. 나에게는 증오 섞인 시선조차 아깝다는 듯, 그가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를 내뱉었다.
  • "사람 칠 기운은 남아도는 모양이지? 이연우, 내 인내심 시험하지 마. 자칫하면 지훈이 얼굴, 죽을 때까지 영영 못 보게 될 줄 알아."
  • 심장이 멈춰버릴 것 같았다. 그가 내뱉은 독설보다, 그가 이수를 대하는 그 지극한 태도가 나를 더 깊은 벼랑으로 밀어 넣었다.
  • 강태준이 서이수의 하이힐을 손수 벗겨주고 그녀를 소중하게 안아 올린 채 멀어져 가는 뒷모습을.
  • 등 뒤로 멀어지는 그의 온기 없는 발소리가 마치 내 수명이 다해가는 소리처럼 들렸다.
  • ……
  • 다시 눈을 떴을 때도 변함없이 그 병실이었다.
  • 열린 창문 사이로 들이친 바람이 테이블 위에 놓인 암 진단서를 무심하게 흩뜨렸다. 이윽고 문을 열고 들어혼 의사가 차트를 한참 내려다보더니 나지막이물었다.
  • "보호자분은... 같이 안 오셨나요?"
  • 나는 창백한 안색으로 간신히 몸을 일으켜 고개를 끄덕였다. 의사는 안타까운 듯 나를 바라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뗐다.
  • "의사 선생님."
  • 나는 그가 하려는 위로를 단칼에 가로막았다.
  • "살고 싶어요. 정말 간절하게요. 오늘부터 바로 치료 시작할 수 있을까요?"
  • 의사는 의외라는 듯 눈썹을 움찔거렸다. 죽음의 문턱에서 이토록 서늘한 생존 본능을 보이는 환자는 처음이라는 표정이었다. 그는 내 허리까지 우아하게 내려오는 웨이브 머리카락을 보며 씁쓸한 듯 덧붙였다.
  • "치료 의지가 강하시니 다행입니다만,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당장 머리부터 밀어야 합니다.."
  • 병원을 나와 미용실을 찾던 길, 우연히 타투 샵 하나가 시야에 걸렸다. 그 순간 어깨뼈 위에 새겨진 치자꽃타투가 살을 파고드는 듯 아려왔다.
  • 결혼 전 여행에서 강태준과 나는 지진을 겪었다. 산속 숙소는 무너져 내릴 때 그는 나를 지키기 위해 온몸으로 낙석을 받아내며 함께 매몰됐다. 의식이 가물가물해지는 공포 속에서 나를 붙들었던 그의 절박한 목소리였다. 나가기만 하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신부로 만들어 주겠노라는 약속.
  • 구조가 늦어지면서 나는 극심한 탈수 증세로 죽어가고 있었다. 그때 강태준은 망설임 없이 자신의 팔뚝을 깨물어 흘러나오는 피를 내 입술에 적셔주었다.
  • 그 전까지 그를 향한 마음이 “설렘”이었다면', 그날 이후 그것은 “맹목이”이 되었다. 나는 그가 가장 좋아하던 치자꽃을 어깨에 새겨 그 사랑을 영원히 적셔주었다. 붉게 진물이 배어 나오던 내 어깨를 쓰다듬이며, 울먹이던 그의 표정이 지금도 선명한다.
  •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 이제 알겠어……. 그런데 연우야, 너무 아프잖아. 제발 아프지 마"
  • 나를 세상의 전부인 양 아껴주던 예전의 강태준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 그리고 사랑에 미쳐 눈부시게 반짝였던 이연우도, 오늘부로 완전히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