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4화

  • “바닥에 발이라도 붙었어? 빨리 가서 처리 안 해?! 이러다 날 새겠다!”
  • 내가 멍하니 서 있는 걸 보자 김지훈이 또 신경질적으로 소리쳤다.
  • 이서준도 특유의 음흉한 미소를 띤 채 내 쪽으로 다가왔다.
  • “거기서 멍하니 뭐 하시는 거예요? 근데 생각해 보니 이태민이라는 사람 네가 직접 입사 처리한 거잖아요. 벌써 3년이 됐는데 난 아직도 얼굴이랑 이름이 매치가 안 되던데. 너는 꽤 잘 아시겠네요?”
  • 순간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설마 이서준이 이미 나를 의심하고 있는 건가?
  • 이태민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는다. 다른 직원들처럼 출퇴근 기록을 남길 리도 없었다. 그의 근태 기록은 내가 매달 인사평가와 급여 정산을 처리하면서 직접 끼워 넣은 가짜였다.
  • 나는 억지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 “직원 자료가 워낙 많습니다. 오래전에 입사한 사람이라… 최대한 빨리 찾아보겠습니다.”
  • 사무실 문을 나서는 순간, 온몸의 힘이 한꺼번에 빠져나갔다. 다리가 풀려 그대로 주저앉을 뻔했다.
  • 어떡하지...
  • 만약 전화를 일부러 안 받는 척하면 김지훈은 분명 경찰에 신고해서 유가족부터 찾으려 할 것이다.
  • 경찰이 끼어드는 순간 끝이다. 신원 조회 과정에서 죽은 사람은 이태민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날 테고, 결국 내가 급여를 빼돌려 왔다는 증거까지 모조리 들통나게 될 거다.
  • 그렇다고 통화가 되면, 가족 역할을 할 사람은 또 어디서 구해 오라는 건가?
  • 나는 떨리는 손으로 담배를 꺼내 물었다. 불을 붙이는 순간 머릿속을 스치는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 김지훈은 이 공장의 사장이다. 공장에서 사람이 죽는 사고가 터졌으니, 어쩌면 나보다 더 다급한 건 그일지도 모른다.
  • “돈이 얼마가 들든 상관없으니까, 빨리 유가족한테 비밀유지합의서부터 받아.” 아까 그 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그는 어떻게든 이 일을 최대한 빨리 덮어버리려 하고 있었다.
  • 이런 사망 산재 사고는 보통 유가족 측과 비공식 합의로 처리된다. 노동부 신고를 막는 조건으로 거액의 합의금을 지급하는 식이다. 금액은 대개 3억에서 5억 사이.
  • 어차피 기계에 끼어 죽은 사람도 신원조차 확실하지 않다.
  • 게다가 이태민이라는 이름도 가짜였다.
  • 그럼 차라리 사람 하나를 구해 이태민의 유가족인 척하게 하고 그 합의금을 받아내면 된다.
  • 그렇게만 된다면 모든 게 완벽하게 맞아떨어진다. 죽은 사람의 신원도 자연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 김지훈은 원하는 비밀유지합의서를 손에 넣게 되고, 나는 아내의 신장이식 수술비를 마련할 수 있다.
  • 그 생각에 숨이 거칠어졌다. 긴장과 흥분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다리가 미세하게 떨리기 시작했다. 나는 얼굴을 쓸어내리며 억지로 마음을 진정시켰다.
  • 이건 올인하는 도박이다. 반드시 이겨야 해. 아내 수술비를 위해, 난 이번 판에 모든 걸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