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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 날이 저물 때까지 내가 집에 들어가지 않자, 지후는 기다렸다는 듯 익숙하고 다정한 메시지들을 쏟아냈다.
  • [서윤아, 어디야? 눈이 이렇게 많이 오는데 위험해. 위치 찍어주면 내가 지금 바로 갈게.] [왜 답이 없어? 아침에 마중 못 나간 것 때문에 아직도 화난 거야?] [화내면 주름 생겨, 우리 공주님. 네가 좋아하는 수플레 사놨으니까 제발 화 풀어, 응?]
  • 애정과 걱정이 듬뿍 담긴 글자들. 예전 같았으면 가슴 설레며 미소 지었을 그 다정함이, 이제는 구역질 나는 오물처럼 느껴졌다. 한유라와 함께 드레스를 고르던 그 손으로 나를 향해 이 가증스러운 문장들을 타이핑했을 그를 생각하니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 내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이번에는 그의 비서에게서 영상 하나가 도착했다. 화면 속 지후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쏟을 듯 붉어진 눈시울로 나를 찾아 헤매고 있었다. 우리가 함께했던 추억이 깃든 장소들을 샅샅이 뒤지며 절박한 연기를 펼치는 와중에도, 틈틈이 내게 걱정 어린 메시지를 보내는 치밀함까지 보이며.
  • 영상 뒤에는 비서의 다급한 메시지가 이어졌다.
  • [서윤 씨, 대표님이 서윤 씨를 못 찾아서 지금 거의 미치기 직전이에요! 제발 빨리 연락 좀 주시고 집으로 돌아가 주세요. 부탁드립니다!]
  • 아주 잠시, 10년의 세월이 만든 미련한 마음 한구석이 흔들렸다. 하지만 그 찰나의 흔들림은 집에 도착하자마자 처참히 부서져 내렸다. 현관문을 열기도 전, 도어록 너머로 흘러나오는 한유라의 목소리가 내 발을 묶었다.
  • “지후야, 오늘 여기서 자고 가게 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서윤이가 우리 연락하는 거 싫어하잖아. 지금 둘이 싸운 것 같은데, 가서 달래줘야 하는 거 아니야?”
  • 비밀번호를 누르려던 내 손이 허공에서 굳어버렸다. 이어지는 지후의 목소리는 소름 끼칠 정도로 서늘했고, 짜증이 가득 섞여 있었다.
  • “그 나이 처먹고 애도 아니고, 뭘 자꾸 달래줘? 그리고 내가 실수로 그 부모 좀 죽였다고 해서, 평생 그 계집애 비위나 맞추며 살아야 해?” “어차피 대충 찾는 척 연기 좀 해주면 감동받아서 울고불고 매달릴 게 뻔한데. 난 이미 너를 위해서 내 행복까지 포기하고 남은 인생을 그 여자한테 담보 잡혔어. 도대체 뭘 더 바라는 거야?”
  • 더 이상 들어줄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의 목소리가 날카로운 칼날이 되어 내 온몸을 난도질했다. 나는 비명을 지르려는 입을 틀어막고, 비틀거리며 그 자리를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 아파트 단지 입구에서 운명처럼 한유라와 마주쳤다.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는 승리감과 비열한 적대감이 가득했다. 한유라는 기다렸다는 듯 내 앞을 가로막아 섰다.
  • “오랜만이네, 은서윤. 지난 몇 년간 나 피하느라 고생 많았지?”
  • 한유라는 가증스러운 웃음을 흘리며 내 앞을 가로막았다.
  • “나 곧 성진 그룹 차현우 씨랑 결혼해. 이게 다 너희 집안 덕분이야. 아니, 정확히는 ‘서윤이’ 덕분이지. 너희 집 후원이 없었으면 내가 어떻게 여기까지 왔겠어? 안 그래?”
  • 나는 이를 악물고 그녀를 노려보며 낮게 읊조렸다.
  • “하고 싶은 말이 뭐야?”
  • “별건 아니고, 내 결혼식에 꼭 초대하고 싶어서. 아, 그리고 이건 몰랐지? 내 결혼 생활이 평탄하도록, 지후가 기꺼이 내 ‘백업’이 되어주기로 했거든. 자기가 내 뒤를 지키는 든든한 뒷배가 되겠다나 뭐라나.”
  • 한유라는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내 심장에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 “네 남자가 나를 위해 평생을 바치겠다는데, 기분이 어때?”
  • 그녀의 눈에 스치는 비열한 우월감을 보며 나는 형용할 수 없는 살의를 느꼈다. 하지만 그 비참한 순간에도, 나는 여전히 지후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치욕적인 사실을 깨달았다. 10년이라는 세월 동안 내 몸의 일부처럼 자리 잡은 본능적인 사랑.
  • 하지만 그 사랑은 이제 부모님을 죽인 원수들이 내뱉는 조롱 앞에서 치명적인 맹독으로 변했다. 나는 치밀어 오르는 분노와 구역질을 억누르며 차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 “그래, 갈게. 결혼식, 반드시 가야지.”
  • 그들을 완벽하게 무너뜨리려면, 일단 그들이 세운 그 견고한 계획 속으로 내가 직접 걸어 들어가야 하니까. 그 화려한 예식장을 지옥의 단두대로 만들어줄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