곁으로 늘어뜨린 그의 주먹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꽉 맞물렸다, 터질 듯 불거진 손등 위로는 푸른 힘줄이 그가 임계치에 다다른 분노를 억누르고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강해수, 도대체 무슨 짓을 꾸미고 있는 거야?”
그가 어금니 사이로 문장을 짓씹으며 낫게 으르렁거렸다.
“무슨 짓인지, 거기 아주 친절하게 적어뒀잖아?”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자백서’를 무심하게 턱짓으로 가라켰다.
“죗값을 치르려는 거야. 네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강이레를 내가 죽였으니까. 난 천벌을 받아 마땅한 년이고, 지금 당장이라도 감옥 구석에 처박혀야 하잖아.”
나의 이 오만하고도 무미건조한 태도가 그의 이성을 끊어놓았다.
쾅!
그가 거칠게 탁자를 내리쳤다. 자백서가 허공으로 치솟았다가, 마치 나를 비웃기라도 하듯 팔랑이며 바닥으로 추락했다.
“네 그 역겨운 거짓말을 내가 믿을 것 같아? 3년 전 경찰 조사에서 이미 결론 난 일이야! 이레는 우울증으로 자살한 거고, 너랑은 상관없다고 판결 났단 말이야! 그런데 대체 왜 이제 와서 이런 추악한 쇼를 벌이는 건데!”
“당신 보라고.”
나는 생글거리며 웃으며 그를 응시했다.
“알잖아, 넌 경찰 따위 안 믿는 거. 오로지 네 오만한 확신만 믿지. 3년 내내 내가 그 애를 죽였다고 저주하며 살았으면서, 이제 와서 왜 결백한 척 위선이야? 자, 내가 그 죄를 기꺼이 뒤집어써 주겠다는데 뭐가 문제야? 네 손으로 직접 나를 끌고 가서 감옥에 처넣어. 그래야…… 네 속이 시원할 거 아냐.”
내 말은 그의 가슴 속 깊은 곳에 숨겨진 잔인한 욕망을 정확히 꿰뚫었다. 분노로 이글거리던 그의 눈빛이 일순간 처참하게 볼품없이 무너져 내렸다. 성진우는 내가 대체 무슨 속셈으로 이런 미친 짓을 벌이는 건지 가늠하려는 듯,한참이나 내 안색을 살폈다..
옆에 있던 서유라는 이미 사색이 된 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진우 씨…… 언니가 어디 아픈 게 아닐까요? 일단 병원부터 데려가야 할 것 같은데….”
참으로 가증스러운 청순가련 연기였다. 나는 차가운 시선으로 그녀를 훑어 내렸다.
“네가 끼어들 자리가 아닐 텐데? 아직 이 집 안방엔 내가 앉아있는데, 벌써 안주인 노릇이라도 하고 싶은 거야?”
유라의 눈시울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 아랫입술을 깨물며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한 눈물을 머금었다. 저 가련한 모습은 남자들의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최고의 무기다. 아니나 다를까, 성진우는 즉시 유라를 제 등 뒤로 숨기며 내게 호통을 쳤다.
“강해수! 할 말 있으면 나한테 해. 엄한 사람 잡지 말고!”
“잡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웃긴 농담이라도 들은 것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성진우, 불륜녀를 당당히 집 안까지 들이고서 나보고 웃어주길 바라? 잊었나 본데, 법적으로 네 아내는 나야.”
“너―!”
“그만해.”
나는 웃음기를 싹 거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위장을 짓누르는 격통에 순간 눈앞이 아득해졌지만, 쓰러지지 않으려고 이를 악물고 버텼다.
“잔말 말고 갈 거야, 말 거야? 안 가겠다면 지금 당장 강이레 유골함을 창밖으로 던져버릴 거야. 마지막 모습은커녕 뼛가루조차 구경 못 하게 만들어줄 테니까 .”
“네가 감히!”
“내가 못 할 것 같아?”
잡아먹을 듯한 그의 시선에도 나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공기는 터질 듯 팽팽하게 맞섰다.
결국, 먼저 꺾인 쪽은 그였다.
“좋아.”
그는 어금니를 짓씹으며 그 한마디를 내뱉었다.
“가주지. 네가 대체 어디까지 미쳐 날뛰나 내 눈으로 똑똑히 지켜보겠어.”
그는 유라를 향해 고개를 돌려 다정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여기서 기다려. 금방 올게.”
유라는 걱정스러운 눈으로 그를 바라보다가, 다시 겁에 질린 듯 나를 훔쳐보고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경찰서로 향하는 차 안의 공기는 숨이 막힐 정도로 무거웠다. 성진우는 입을 굳게 다문 채 운전대만 잡고 있었고 날 선 옆얼굴은 차갑게 벼려진 칼날처럼 경직되어 있었다.
나는 차창에 머리를 기댄 채 빠르게 뒤로 밀려나는 거리의 풍경을 응시했다. 위장을 뒤트는 통증은 쉼 없이 밀려오는 파도 같았다.나는 가방 안에서 진통제 한 알을 더듬어 꺼내 물도 없이 그대로 삼켰다.
얼마 지나지 않아 약기운이 돌며 통증이 잦아들었다. 고개를 돌려 그의 서늘한 옆모습을 보며 응시하며 내가 먼저 정적을 깨뜨렸다.
“성진우, 내가 왜 갑자기 마음을 바꿔서 ‘죗값’을 치르겠다고 하는 건지 궁금하지 않아?”
그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코웃음을 쳤다.
“뻔하잖아. 이딴 식으로 내 동정심이라도 유발해서 이혼만은 막아보겠다는 거겠지. 강해수, 네 수법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이 천박해.”
“그래?”
나는 희미하게 미소를 지을 뿐, 굳이 부정하지 않았다. 동정심? 아니, 그딴 건 필요 없어. 난 그저 네 오만한 심장에, 평생 아물지 않을 선명한 칼자국 하나를 새겨주고 싶을 뿐이야.
경찰서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망설임 없이 민원실로 향했다.
“자수하러 왔습니다.”
접수창구의 젊은 형사가 당황한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내 내 뒤를 뒤따라 성진우를 발견하고는 놀라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진우 대표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3년 전 사건을 담당했던 형사인 모양이다. 진우의 안색은 험악해졌지만, 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나는 미리 출력해온 자백서를 책상 위에 내던지면 또박또박 내뱉었다..
“3년 전 강이레의 죽음은 사고도, 자살도 아니었어요. 내가, 내가 그 애를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정식으로 자수할게요.”
형사는 자백서를 읽어 내려갈수록 미간을 처참하게 찌푸렸다. 그는 나를 보다가, 얼굴이 잿빛으로 변한 성진우를 번갈아 살피며 혼란스러워했다.
“강해수 씨, 이게… 정말 사실입니까? 하지만 그 사건은 이미 종결됐고, 모든 증거가 자살임을 입증하고 있었는데….”
“증거 따위,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는 거니까요.”
나는 그의 말을 가차 없이 끊고 눈물 섞인 열연을 시작했다.
강이레가 성진우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것에 눈이 멀어 얼마나 원한을 품었는지, 얼마나 잔인한 말로 그 애의 정신을 갉아먹었는지, 다른 남자와 부적절한 관계라는 가짜 사진을 만들어 어떻게 그 애를 벼랑 끝으로 등 떠밀어냈는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