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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 그는 달래는 듯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은채야, 지금 네 기분이 안 좋은 건 알아.”
  • “하지만 너도 며칠동안 입원해야 하잖아. 집은 어차피 비어있고. 지후는 열이 펄펄 나는데 서희 혼자 애 보기가 너무 힘들어. 지후가 열만 내리면 바로 거처 알아봐서 나갈 테니까, 잠깐만 머물게 해주자. 응?”
  • 한서희가 때맞춰 그의 소매를 살짝 잡아당기며 가느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준우야, 됐어. 은채 씨 화나게 하지 마……. 나 지후를 데리고 호텔로 갈게.”
  • “안돼. 호텔은 환경이 안 좋아서 애 치료하기 힘들어.” 강준우는 반사적으로 서희의 손등을 토닥였다. 동작이 너무나 자연스럽고 다정했다.
  • 나를 다시 돌아봤을 때 그의 어조는 한층 굳어져 있었다. “은채야, 이건 상의하는 게 아니야. 서희 혼자 애 키우느라 고생한 세월을 생각해서라도 네가 좀 이해해줄 수 없니?”
  • “이해?” 나는 한서희를 감싸고 선 그의 뒷모습을 보며 지난 5년이 한바탕 농담처럼 느껴졌다. 눈동자에 남았던 마지막 온기가 꺼졌다. “강준우, 너랑 같이 고생하며 버틴 지난 5년은 도대체 뭐였어?”
  • “내가 널 위해 케임브리지 입학까지 포기했을 때, 너는 은채야말로 너를 제일 잘 안다고 했지. 내 전 재산을 네 회사에 쏟아부었을 땐 평생 날 책임지겠다고 했고. 그런데 지금 나는 여기 누워서 반쯤 죽어가고 있는데, 딴 여자랑 그 애를 우리 집으로 들이겠다고 내가 참으라는 거야?”
  • 강준우의 목젖이 꿀꺽 움직였다. 눈빛이 잠시 흔들리는 듯했다. 하지만 한서희의 가련한 눈빛과 마주치자 그는 금세 태도를 굳혔다. “은채야,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나 서희한테는 책임일 뿐이야, 너는……”
  • 한때 사랑했던 그 얼굴이 한순간에 낯설어졌다. 밀려오는 피로감과 구역질에 싸울 의욕조차 사라졌다.
  • “나가.”
  • “네 책임이든 뭐든, 네 아들이든 다 데리고 내 눈앞에서 사라져.”
  • “그 집에 한 발자국이라도 들여놓으면 바로 경찰 부를 거야.”
  • 서희가 다시 그의 소매를 끌었다. 눈가가 붉어진 채였다. “준우야, 가자. 더 이상 은채 씨 화나게 하지 마. 다 내 잘못이야.”
  • 강준우는 안쓰러운 표정으로 그녀를 내려다봤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며 나를 힐끗 보았다. “최고급 간병인 붙여줄 테니 푹 쉬고 있어.”
  • 병실 문이 닫히고 바깥세상과 단절되었다.
  • 나는 병상에 누운 채 해가 질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주치의가 새 보고서를 들고 들어왔다. 미간이 깊게 패여 있었다. “고은채 씨, 결과가 나왔습니다. 종양이 완전히 절제되지 않았어요. 최대한 빨리 재수술을 잡아야 합니다.”
  • 그는 보고서 속 ‘재발 고위험’ 문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이번 수술은 난도가 매우 높고 출혈 위험이 큽니다. 수술 후 합병증 확률도 60%가 넘고요.”
  • “지금 당장 보호자에게 연락해야 합니다. 수술 동의서 서명이 필요하고, 수술 뒤 적어도 일주일 동안은 24시간 곁을 지켜줄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혼자서는 절대 못 버팁니다.”
  • 나는 보고서의 글자를 뚫어져라 보며 이불을 꽉 쥐었다. 잘라내도 내게 남은 살길은 없었다.
  • “알겠습니다.” 나는 보고서를 밀어냈다.
  • “보호자로 등록된 강준우 씨죠? 지금 바로 전화해 보겠습니다.”
  • 내가 말릴 틈도 없이 의사는 번호를 눌렀다. 전화는 세 번이나 울리고서야 연결되었다. 강준우의 목소리엔 노골적인 짜증이 섞여 있었다. “여보세요?”
  • “안녕하세요, 고은채 씨 주치의입니다. 상태가 심각해서 재수술이 필요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