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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 투자 만찬장에는 재계 거물들만 모여 있었다.
  • 이민우는 한껏 의기양양해져 있었다.
  • 와인잔을 든 채 대기업 회장들 사이를 능숙하게 오가며 연신 웃음을 띠었다.
  • 문세라는 이민우 옆에 바짝 붙어 떨어질 줄 몰랐다.
  • 나는 서준이를 데리고 홀 한쪽 구석 테이블에 조용히 앉아 있었다.
  • 큰 고비를 넘긴 지 얼마 안 된 서준이는 아직도 얼굴이 핼쑥했다.
  •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이민우를 바라보는 눈에는 의아함과 서운함이 가득했다.
  • “엄마, 아빠는 왜 우리랑 같이 안 앉아?”
  • 나는 아이 머리를 조용히 쓸어내렸다.
  • 가슴 한복판이 콕 찌르듯 아팠다.
  • “아빠는 지금 일하는 중이야.”
  • 지금은 그렇게 말해 줄 수밖에 없었다.
  • 그제야 이민우가 우리 쪽을 돌아봤다.
  • 그는 문세라를 데리고, 배가 불룩 나온 중년 투자자 한 명과 함께 이쪽으로 걸어왔다.
  • “정 대표님, 소개해 드리겠습니다.”
  • 이민우가 문세라를 가리키며 입가에 뿌듯한 웃음을 걸쳤다.
  • “이쪽은 문세라 씨입니다. 앞으로 저희 회사와 함께하게 될 중요한 파트너입니다.”
  • “사업 수완도 아주 뛰어납니다.”
  • 그러고는 나를 턱짓으로 가리켰다.
  • 목소리에는 노골적인 멸시가 묻어 있었다.
  • “그리고 이쪽은 제 아내, 윤세아입니다.”
  • “그냥 전업주부라 사업 쪽은 전혀 모릅니다.”
  • 정재혁 대표의 시선이 내 얼굴과 몸을 천천히 훑었다.
  • 숨길 생각조차 없는 끈적한 눈빛이었다.
  • 문세라는 내 쪽을 보며 승리라도 한 듯 씨익 웃었다.
  • 사람들 앞에서 모욕을 당한 기분이었다.
  • 속이 뒤집힐 만큼 모멸감과 분노가 끓어올랐다.
  • 그래도 참았다.
  • 나는 서준이를 품 안으로 더 꼭 끌어안았다.
  • 이민우.
  • 누가 진짜 아무것도 모르는지, 곧 알게 될 거야.
  • 정재혁 대표와 이민우가 잔을 부딪쳤다.
  • 그리고는 서로 잘난 척을 해 대며 허세 가득한 말을 주고받았다.
  • 그때 문세라가 가식적인 웃음을 띠며 서준이 앞에 쭈그려 앉았다.
  • “서준아, 이모 기억나지?”
  • 서준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 오히려 내 품 안으로 더 파고들었다.
  • 문세라의 눈에 잠깐 불쾌한 기색이 스쳤다.
  • 그녀는 가방 안에서 예쁘게 포장된 사탕 하나를 꺼냈다.
  • “자, 서준아. 이모가 사탕 줄게.”
  • “이거 진짜 맛있어.”
  • 나는 포장지에 찍힌 작은 땅콩 그림을 봤다.
  • 순간, 동공이 확 좁아졌다.
  • 아직도 우리 애를 못 놔?
  • “서준이는 사탕 못 먹어요.”
  • 나는 차갑게 잘라 말했다.
  • 하지만 문세라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 사탕을 그대로 서준이 입술 가까이 들이밀었다.
  • “애가 사탕을 싫어하겠어요?”
  • “딱 하나쯤은 괜찮잖아요.”
  • 또 그 말이었다.
  • 괜찮다고.
  • 그 순간, 내 안에서 불길이 확 치솟았다.
  • 사탕이 서준이 입술에 닿기 직전—
  • 나는 벌떡 일어나 손을 치켜들었다.
  • 짝!
  • 맑고 날카로운 소리가 홀 안에 울려 퍼졌다.
  • 문세라의 뺨이 그대로 옆으로 돌아갔다.
  • 연회장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 모든 시선이 일제히 우리 쪽으로 쏠렸다.
  • 문세라는 뺨을 감싸 쥔 채 믿을 수 없다는 듯 나를 올려다봤다.
  • 하얀 볼 위에는 다섯 손가락 자국이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 “너... 감히 날 때려?”
  • 나는 그녀를 싸늘하게 내려다봤다.
  • “때려?”
  • “너 같은 인간은 맞아야 정신 차리지.”
  • 그제야 이민우가 정신이 든 듯 펄쩍 뛰었다.
  • “윤세아! 너 미쳤어?”
  • 그는 성큼 다가오더니 나를 거칠게 밀쳐 냈다.
  • 나는 중심을 잃은 채 테이블 모서리에 세게 부딪혔고, 그대로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 접시와 와인잔이 와장창 깨져 내렸다.
  • 서준이가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 “엄마!”
  • 이민우는 나를 보지도 않았다.
  • 그는 곧장 문세라를 감싸듯 부축하며 얼굴부터 살폈다.
  • “세라야, 괜찮아?”
  • “어디 다친 데 없어?”
  • 그러고는 나를 향해 사납게 눈을 부라렸다.
  • “미쳤어? 당장 세라한테 사과해.”
  • 나는 바닥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손바닥이 유리 파편에 베였는지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 그런데 이상하게 웃음이 났다.
  • 웃다 보니, 눈물까지 뚝뚝 떨어졌다.
  • “사과?”
  • 나는 젖은 웃음을 머금은 채 이를 악물었다.
  • “사과해야 할 사람은 너희지.”
  • “이민우.”
  • “너, 저 여자 때문에 네 친아들한테까지 손대서 거의 죽일 뻔했잖아.”
  • “문세라.”
  • “너는 내 아이를 해치려고 몇 번이나 손을 댔는데...”
  • “그 짓을 해 놓고도 불쌍한 척은 참 잘하네.”
  • 이민우의 얼굴이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 그가 달려와 내 옷깃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 그리고 손을 치켜들었다.
  • “어디서 헛소리를 지껄여!”
  • 나는 눈을 감았다.
  • 곧 따귀가 날아올 줄 알았다.
  • 하지만 예상했던 통증은 오지 않았다.
  • 차갑고 묵직한 목소리가 홀 안을 가로질렀다.
  • “그만해.”
  • 이민우의 손이 허공에서 딱 멈췄다.
  • 그도, 나도,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동시에 목소리가 들린 쪽을 돌아봤다.
  • 입구 쪽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풍기는 중년 남자가 서 있었다.
  • 윤태준 대표였다.
  • 오늘 이 투자 만찬장의 최고 VIP.
  • 은하그룹의 대표.
  • 이민우는 윤태준 대표를 보는 순간 얼굴에서 살기가 싹 사라졌다.
  • 대신 순식간에 비굴한 아부 웃음이 지었다.
  • 그는 나를 놓아버리고 황급히 옷매무새를 정리하고는 달려갔다.
  • “윤 대표님! 오셨군요!”
  • 두 손을 내밀며 악수를 하려 했다.
  • 하지만 윤태준 대표는 그를 힐끗 쳐다보지도 않았다.
  • 그저 이민우 옆을 스쳐 지나갔다.
  • 마치 눈앞의 쓰레기를 피하듯.
  • 사람들이 숨도 못 쉬고 지켜보는 가운데—
  • 윤태준 대표가 내 앞에 멈춰 섰다.
  • 그는 허리를 굽혀 조심스럽게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 그리고 나를 향해 공손하게 고개를 숙였다.
  • “윤 회장님.”
  • 연회장은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을 만큼 고요해졌다.
  • 이민우와 문세라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