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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타임스스퀘어의 칼바람이 너무 매서웠던 탓일까.
  • 박세린은 눈앞이 핑 도는 걸 느끼기도 전에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사방은 새하얗게 번져 있었다.
  •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던 그녀가 입술을 달싹였다.
  • “나…… 죽은 건가?
  • 천국이라도 온 거야?”
  • 생각이 더 이어지기도 전에, 문밖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이도현이었다.
  • 그리고 그 옆엔 형제처럼 지내던 친구가 있었다.
  • “도현아, 대체 언제까지 서유라를 세린이인 척 내세울 생각이야?”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 한참 뒤에야 이도현이 낮게 입을 열었다.
  • “나도 모르겠어. 처음엔 세린이가 너무 불쌍했고, 서유라가 너무 미웠어. 내 옆에 두고 괴롭히면 조금이라도 죗값을 치르게 할 수 있을 줄 알았지.”
  • “근데 네 회사도 이미 상장했잖아. 그런데도 아직까지 이러는 건…… 설마, 진짜로 서유라한테 마음이라도 간 거냐?”
  • 이도현의 목소리엔 고통이 묻어 있었다.
  • “가끔 세린이가 그 여자 때문에 그렇게 됐다는 걸 떠올리면, 이를 갈 만큼 밉다. 침대에서 일부러 더 거칠게 굴고, 모욕하고, 있는 대로 미움을 쏟아냈어.”
  • “그런데도 걔는 매번 아무 말 없이 다 받아냈어. 그러다가 세린이랑 조금 닮은 눈으로 날 올려다보면…… 이상하게 또 마음이 약해져.”
  • 그는 잠시 숨을 고르더니 더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 “너도 알잖아. 세린이는 몸이 안 좋아서 늘 조심할 수밖에 없었어. 같이 있을 때마다 마음껏 다가갈 수도 없었고.”
  • “근데 서유라랑 있으면…… 그제야 내가 진짜 남자인 것 같았어.”
  • 문밖의 남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숨을 삼켰다.
  • “너 진짜 미쳤구나. 브레이크에 손대서 널 죽이려 했던 여자야. 네 아내를 평생 휠체어 신세 지게 만들고, 아이까지 잃게 만든 여자라고. 그런 여자랑 잤다고? 그것도 모자라 이제는 세린이인 척까지 시켜?”
  • “그만해.”
  • 이도현이 곧장 말을 잘랐다.
  • “김성덕이 그 애 어머니 목숨을 쥐고 협박했어. 서유라도 결국은 이용당한 거야.”
  • “김성덕은 이미 파산시켰고, 감옥에도 처넣었어. 그걸로 다 끝났어.”
  • “세린이가 음악에만 빠져 세상 돌아가는 일엔 관심도 없으면, 영영 모를 일이야.”
  • “내가 수시로 세린이 휴대폰도 확인할 거고, 걔 눈앞에 뜨면 안 되는 건 전부 막을 거야.”
  • 그는 스스로를 타이르듯, 혹은 확신시키듯 덧붙였다.
  • “그러면 세린이는 계속 행복하다고 믿고 살 수 있어.”
  • 박세린은 이불 속으로 몸을 웅크렸다.
  • 입을 틀어막은 채, 소리도 내지 못하고 어깨만 잘게 떨었다.
  • 눈을 감자 오래전 기억들이 둑이 터진 것처럼 한꺼번에 밀려들었다.
  • 이도현의 창업 꿈을 함께하기로, 그래서 자신의 음악을 내려놓기로 결심했던 날.
  • 허름한 월셋방에서 그가 그녀를 끌어안고, 꼭 세상에서 제일 좋은 피아노를 사 주겠다고 몇 번이고 다짐하던 목소리.
  • 반지하가 장마에 잠겨 급히 짐을 싸 들고 옥탑방으로 올라갔던 날도 떠올랐다.
  • 여름이 와도 에어컨은커녕 냉장고 하나 살 돈조차 없었다.
  • 낡은 선풍기는 뜨거운 바람만 휘휘 뿜어댔다.
  • 그럴 때마다 이도현은 별짓을 다 했다.
  • 빈 페트병에 물을 가득 담아 동네 슈퍼에 맡겨 얼려 오기도 했고, 그걸 잘게 깨 그녀를 위해 이것저것 시원한 간식을 만들어 주기도 했다.
  • 둘은 버스에 한 시간 넘게 시달리듯 서서 가고, 또 한참을 걸어 거래처를 찾아가곤 했다.
  • 어렵게 계약 하나를 따내고 나면, 둘 다 녹초가 돼 서로를 보며 웃었다.
  • 그날도 그랬다.
  • 간신히 계약을 따내고 돌아오던 길, 박세린의 뒤꿈치는 하이힐에 까여 물집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 이도현은 사람들 오가는 길 한복판에 쪼그려 앉아 그녀 발에 약을 발라 줬다.
  • 그러고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그녀를 업고 버스 정류장까지 걸어갔다.
  • 그 모든 기억을 억지로 밀어내듯, 박세린은 눈가를 훔쳤다.
  • 그리고 옷주머니에서 낡은 휴대폰 하나를 꺼냈다.
  • 아무도 모르는 번호로, 짧은 문자를 보냈다.
  • ‘지금이라도 후회한다고 하면……
  • 돌아갈 수 있어?’
  • 잠시 뒤, 답장이 왔다.
  • ‘물론이지. 축하한다. 드디어 사랑의 쓴맛을 알았네.’
  • 장난스러운 문장을 보는 순간, 조여 오던 가슴이 조금은 풀렸다.
  • 박세린은 곧바로 다시 문자를 보냈다.
  • ‘좋아. 그럼 이 신분부터 빨리 정리해 줘.
  • 원래 내 신분으로 돌아갈래. 가능한 한 빨리 여기서 떠나고 싶어.’
  • 곧 답장이 돌아왔다.
  • ‘정말 끝낼 거야?
  • 넌 한때 그 남자 때문에 목숨까지 버릴 수 있다고 했잖아.’
  • 그 문장을 읽는 순간, 박세린은 웃음조차 나오지 않았다.
  • 이도현만을 위해 살았고, 이도현을 위해서라면 정말 죽을 수도 있다고 믿었던 예전의 자신이 어처구니없게 느껴졌다.
  • 그녀는 망설임 없이 단 한마디를 찍어 보냈다.
  • ‘확실해.’
  • 이번엔 답이 더 빨랐다.
  • ‘알겠어. 내가 처리할게.’
  • 박세린은 곧장 덧붙였다.
  • ‘최대한 빨리.
  •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
  • 문자를 확인한 뒤, 그녀는 휴대폰을 다시 이불 속 깊숙이 숨겼다.
  • 그리고 아무 소리 없이 눈을 감았다.
  • 이도현.
  • 정말 그렇다면, 이제 우리도 끝이다.
  • 이제부터는
  • 서로의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