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든 사랑
chenyu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 박세린은 휠체어에 앉은 채 타임스스퀘어의 매서운 바람을 그대로 맞으며 대형 스크린을 올려다봤다.
- 스크린 속 이도현은 작년 박세린이 골라 준 짙은 회색 정장을 입고 있었다.
- 그는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여자와 손을 맞잡은 채, 나스닥 타종대 위에 나란히 서 있었다.
- 종이 울렸다.
- 여자가 웃었다.
- 이내 화면이 그녀의 얼굴을 바짝 당겼다.
- 웃는 순간마다 눈가에 또렷해지는 작은 눈물점.
- 그제야 박세린은 알아봤다.
- 이도현의 비서, 서유라였다.
- 머리를 둔기로 얻어맞은 것처럼 귓속이 웅웅 울렸다.
- 10년 전, 둘이 함께 창업하던 시절이었다.
- 한 번은 거래처 사람에게 심하게 모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 그날 밤, 이도현은 그녀를 꼭 끌어안고 말했다.
- “우리 꼭 같이 나스닥에 서자.
- 우리 이름으로 종 치는 날, 반드시 올 거야.”
- 이제 그 종은 정말 울렸다.
- 하지만 그의 곁에 선 사람은 박세린이 아니었다.
- “와, 이 대표 부부 진짜 부럽다.”
- 옆에 있던 패딩 차림의 젊은 여자가 친구를 툭 쳤다.
- “나 인터뷰 영상 봤어. 이 대표 제일 힘들 때 사모님이 알바 세 개씩 뛰면서 종잣돈 모아줬다더라? 그러고 상장하는 날까지 같이 올라가서 종도 치고. 이 정도면 진짜 같이 고생해서 같이 성공한 거지.”
- “그러게. 이 대표가 사모님 보는 눈빛 봤냐? 완전 꿀 떨어지던데.”
- 박세린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 목소리가 제 뜻대로 되지 않았다.
- “사모님이요?
- 어느 사모님 말씀하시는 거예요?”
- 여자가 박세린을 돌아봤다.
- “누구긴 누구예요. 이 대표랑 여기까지 같이 온 박세린 씨 말이죠. 원래는 얼굴 안 비추는 걸 좋아하던 분이라던데, 반년 전부터는 행사마다 이 대표 옆에 꼭 붙어 있잖아요. 경제 뉴스에도 맨날 나오고. 못 보셨어요?”
- “제가…….”
- 휠체어 팔걸이를 붙든 박세린의 손이 사납게 떨렸다.
- “제가 이도현 아내예요.
- 저 여자는…… 비서고요.”
- 말이 떨어지자 주위의 시선이 일제히 꽂혔다.
- 노골적인 경멸이 얼굴마다 번졌다.
- 후드티 차림의 젊은 남자가 인상을 찌푸렸다.
- “아주머니, 괜찮으세요? 저 이 대표 사모님 몇 번 봤거든요. 지난주 자선 갈라에서도 무대 올라와서 직접 인사하던데요. 명찰에도 분명 박세린이라고 적혀 있었고. 적어도 아주머니는 아니었어요.”
- “그러니까요. 두 사람 금슬 좋기로 유명한데, 괜히 돈 많은 사람한테 묻어가려는 거 아니에요? 아니면…… 너무 부러워서 헛것이라도 보는 거고.”
- “아니에요! 그런 거 아니에요!”
- 다급해진 박세린은 황급히 휴대폰을 찾았다.
- 혼인관계증명서 캡처본이라도 보여 주면 될 것 같았다.
- 하지만 가방을 뒤적이던 손이 그대로 멈췄다.
- 늘 쓰던 그 휴대폰을 집에 두고 나왔다는 걸, 그제야 떠올린 것이다.
- “저 진짜 박세린 맞아요. 이도현이 창업할 때 저랑 반지하에서 같이 살았고, 위출혈로 쓰러졌을 땐 제가 병원에서 밤낮으로 간호했고, 그 사람이…….”
- 박세린은 할 수 있는 말을 닥치는 대로 쏟아냈다.
- 하지만 누구도 믿지 않았다.
- “됐어요, 됐어.”
- 누군가 짜증스럽게 말을 잘랐다.
- “여기서 이상한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진짜 정신 이상한 사람 같으니까.”
- 사람들의 눈빛은 떼쓰는 미친 사람을 보는 것처럼 차가웠다.
- 그때, 대형 스크린 속에서 이도현이 서유라의 어깨를 감싸 안듯 끌어당긴 채 인터뷰를 받고 있었다.
- 기자가 물었다.
- “이 대표님, 오늘 부인과 함께 타종대에 오르셨는데요. 부인께 꼭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실까요?”
- 이도현이 웃으며 답했다.
- “제 아내가 없었다면 지금의 저도 없었을 겁니다. 앞으로 제 인생에서 중요한 순간은 모두 아내와 함께하고 싶습니다.”
- 서유라는 사랑이 뚝뚝 묻어나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 5년 전이었다.
- 이도현의 경쟁사가 자동차 브레이크에 손을 댔다.
- 이상하다는 걸 알아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 마지막 순간, 박세린은 핸들을 제 쪽으로 꺾었다.
- 이도현은 무사했다.
- 대신 박세린은 아이를 잃었다.
- 그리고 다시는 두 발로 설 수 없게 됐다.
- 박세린은 자신이 이제 그의 짐밖에 안 된다며 이혼하자고 했다.
- 자유를 주겠다고도 했다.
- 그때 이도현은 눈이 벌겋게 충혈된 채 그녀를 끌어안고 말했다.
- “아니야. 내 아내는 평생 너 하나야.
- 다른 여잔 필요 없어.”
- “괜찮아.
- 아이도…… 우리 다시 가지면 돼.”
- 잘나가는 신흥 사업가였던 이도현 곁엔 들러붙는 여자들이 줄을 이었다.
- 그는 하나같이 차갑게 잘라냈다.
- 서유라도 그중 하나였다.
- 박세린과 어딘가 닮았다는 걸 무기 삼아, 뻔뻔할 만큼 끈질기게 매달리던 여자.
- 이도현이 몇 번을 경고해도 물러나지 않자, 결국 그는 강수를 뒀다.
- 해성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 그날, 서유라를 해성 밖으로 내쫓고 돌아온 이도현은 박세린에게 이렇게 말했다.
- “자기야, 감히 네 자리 넘보는 여자들은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전부 정리해 버릴 거야.”
- 그런데 어느 날, 박세린은 이도현 회사에서 다시 서유라를 봤다.
- 그때 이도현은 먼저 변명하듯 말했다.
- “내가 예전에 너무 심하게 몰아붙였더니, 그 애 어머니가 수술비도 못 마련하게 됐어. 딱해서 회사에 잡무라도 맡겨 둔 거야.”
- 서유라는 그 자리에서 한껏 움츠러들어 있었다.
- 겁먹은 얼굴에 잔뜩 주눅 든 기색이었다.
- 박세린은 그 말을 믿었다.
- 그리고 그 일을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 그 뒤로 각종 행사에 함께 나서는 날이 잦아지면서 박세린의 몸은 점점 버티지 못했다.
- 이도현은 그녀를 배려하는 척, 집에서 쉬라고 했다.
- 수년을 악착같이 버텨 온 끝에 겨우 찾아온 숨 돌릴 틈이었다.
- 박세린은 바깥일엔 아예 신경을 꺼 버린 채, 다시 음악 작업에만 몰두했다.
- 그사이 서유라는 너무도 자연스럽게 이도현의 옆자리를 차지해 갔다.
- 그리고 박세린만,
- 끝까지 아무것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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