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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 지아의 목소리가 들리자마자 민우의 눈빛이 순식간에 생기로 돌았다. 방금 전까지 나를 향했던 그 지긋지긋한 짜증은 눈 녹듯 사라진 상태였다.
  • 그는 뒤도 안 돌아보고 문으로 향하며 차가운 말 한마디를 툭 던졌다.
  • “몸조리 잘하고 있어. 운전하기 힘들면 가정주치의 불러.”
  • “…….”
  • “주치의 번호는 내 컴퓨터에 저장돼 있으니까 찾아보고.”
  • 나는 벽을 짚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컴퓨터 책상 앞으로 갔다. 그런데 민우가 미처 로그아웃하지 못한 ‘Line’ 계정이 열려 있었다.
  • 화면이 밝아지며 단체 채팅방 알림이 연달아 떴다. [가족 단톡방]
  • 홀린 듯 클릭한 그곳의 프로필 사진은 민우와 지아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크리스마스트리를 배경으로 두 사람은 연인처럼 서로를 꽉 껴안은 채 환하게 웃고 있었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김경숙의 메시지였다.
  • [김경숙: 서윤이 그 불여시 같은 게 파티 때마다 초를 치네. 지아가 지보다 잘나서 질투하는 게 분명해, 그치?]
  • [사촌 지후: 지아 누나가 서윤 형수보다 백배는 낫죠.]
  • [지아: 됐어, 다들. 상관없는 사람 얘기는 그만해.]
  • [지아: 민우 오빠가 나 기분 풀어준다고 하와이 호화 콘도 수영장 통째로 빌렸어! 오늘 비키니 비즈니스 파티 있다는데 다들 갈 거지?]
  • 피가 거꾸로 솟았다. 비즈니스 협상이라던 말은 전부 개수작이었다. 이 기괴하고 부도덕한 집단 섹스 파티를 즐기려고 온 가족을 데리고 하와이로 떠나려는 것이었다.
  • 나는 심호흡을 하며 휴대폰을 꺼내 화면을 녹화하기 시작했다. 증거를 남겨야 했다.
  • 대화는 가관이었다.
  • [김경숙: 다들 지아가 뭐 챙겼는지 봐라. 민우 주려고 특별히 준비했대.]
  • 이어지는 사진 속에는 눈을 의심케 하는 파격적인 슬링샷 비키니가 찍혀 있었다. 곧바로 민우가 하트와 침을 흘리는 이모티콘을 도배했다.
  • 창밖의 눈송이가 유리에 부딪혀 서늘한 소리를 냈다. 몸이 떨리고 배가 끊어질 듯 아팠지만, 나는 이 악물고 녹화 버튼을 눌렀다.
  • 민우와 보낸 지난 1년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내가 미쳤지, 눈이 멀어도 단단히 멀었지.
  •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의 불화로 집을 나와 방황하던 시절, 여행지에서 만난 민우는 내 구원자 같았다. 그의 열렬한 구애에 속아 번개불에 콩 볶듯 혼인신고까지 마쳤다.
  • 양가 집안 모두 결혼식을 원치 않는 줄 알았다. 그도 나처럼 외로운 사람인 줄 알았으니까. 그런데 가족이 없는 게 아니라, 이런 역겨운 괴물 집단이었을 줄이야.
  • “서윤아, 나 이제 간다. 클라이언트가 자꾸 재촉하네.”
  • 민우가 옷을 챙기러 들어왔다. 여전히 무심한 얼굴이었다. 나는 그의 눈을 뚫어지게 노려보며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 “민우야, 진짜 어디 가는 거야?”
  • “…….”
  • “내가 몸이 안 좋다고 했잖아. 정말 상관없어?”
  • 그는 대놓고 눈등을 굴리며 짜증을 냈다.
  • “얼마나 안 좋다고 그래? 임신한 여자들 다 겪는 일이야. 매번 유난 좀 떨지 마.”
  • 내가 그의 소매를 붙잡으며 간절히 말했다.
  • “아니, 이건 평소랑 달라. 그냥 입덧 같은 게 아니라고…….”
  • 그때 지아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화려하게 공들인 메이크업을 한 그녀의 목소리엔 조롱이 가득했다.
  • “언니, 오빠 너무 나무라지 마요. 호르몬 때문에 예민해진 건 알겠는데.”
  • “……”
  • “애 가졌다고 온 세상 남자가 자기만 바라봐야 한다는 생각은 버려야지. 오빠가 일을 해야 언니랑 배 속의 애가 먹고살 거 아니에요? 안 그래?”
  • 민우는 지아의 말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내 손을 뿌리쳤다.
  • “돈 벌어다 준다는데 왜 난리야. 올 때 선물 사 올게.”
  • 그는 자연스럽게 지아의 어깨를 감싸 안더니 손을 아래로 훑었다. 지아의 드레스 지퍼가 살짝 내려가 있는 걸 발견한 그는 친밀하게 그녀의 등에 손바닥을 대고 지퍼를 천천히 올렸다.
  • 지퍼가 끝까지 올라가는 순간, 지아가 고의적으로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 “역시 오빠 손재주가 좋아. 내 D컵 가슴 때문에 혼자서는 도저히 못 올리겠더라고.”
  • 민우는 그녀의 머리칼을 정리해주며 픽 웃었다.
  • “허풍 떨지 마. 너 기껏해야 C잖아.”
  • “진짜라니까? 요 며칠 사이에 더 커진 것 같아. 못 믿겠으면 다시 재볼래?”
  • “그럼 내 손바닥으로 정밀하게 측정해 주실까?”
  • 두 사람은 낄낄거리며 계단 너머로 사라졌다.
  • 방 안은 숨 막힐 듯 고요해졌다. 나는 침대 가장자리에 앉아 한참 동안 심호흡을 한 뒤, 결국 가정주치의를 불렀다.
  • 주치의는 한참을 검진하더니, 극심한 심리적 타격으로 인한 조산기라며 약을 처방해 주었다. 아이가 겨우 진정되었을 때는 이미 깊은 밤이었다.
  • 하지만 나는 망설이지 않고 오랫동안 연락하지 않았던 번호를 눌렀다.
  • 상대방은 신호음이 채 두 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 “오랜만이네, 수호 야...”
  • “…….”
  • “하와이의 그 비즈니스 풀빌라, 네 소유 맞지? 내일 내 남편이 예약했어.”
  • 나는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덧붙였다.
  • “근데, 나랑 가는게 아니라 상간녀들을 데리고 간다네.”
  • 잠시 침묵하던 수화기 너머에서 낮고 묵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떻게 해줄까. 네가 원하는 대로 다 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