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3화

  • 사흘 뒤, 화려한 조명 아래 자선 만찬이 열렸다.
  • 재계의 권력자들이 총집결한 이 자리, 예전의 나였다면 아예 발을 들일 자격조차 없었을 곳이었다.
  • 늘 무대 뒤에서 그림자처럼 일만 하던 내가, 오늘만큼은 이상현이 보내온 값비싼 드레스를 입고 주인공 중 한 명으로 서 있었다.
  • 처음으로 그에게 명품을 선물 받은 때가 하필 이런 상황이라니, 참으로 지독한 비극이다.
  • 거울 속의 나는 정교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우아한 선을 그리는 드레스는 몸매를 완벽하게 잡아주었지만 거울에 비친 얼굴에는 지우기 힘든 병색이 짙게 배어있다.
  • 나는 립스틱을 꺼내 손가락 끝으로 톡톡 찍어 볼에 생기를 더했다. 마치 피 한 방울을 얹듯 붉은색을 보탰지만 죽음이 그림자처럼 들러붙은 침침함까지는 가려지지 않았다.
  • “그 우울한 표정 좀 집어치워, 알았어?”
  • 귀에 꽂힌 초소형 이어피스 너머로 이상현의 서늘한 목소리가 울렸다.
  • “들어가면 일단 구석에 앉아. 내가 신호를 줄 때까지 기다리고.”
  • 이제 그는 달콤한 가면에 신경 쓸 여유조차 없는 듯했다. 예전에는 내게 무리한 요구를 할 때마다 사랑이니 미래니 하는 말들로 그럴싸하게 포장하더니, 내가 시한부라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부터는 오로지 노골적인 명령뿐이었다.
  • 심지어 나를 실시간으로 조종하려 이어피스까지 채운 그의 치밀함에 치가 떨렸다.
  • “서연주, 준비해. 네 목표는 태양 그룹의 김진수 대표야. 남색 정장 보이지? 지금 재무부 쪽 인사랑 대화 중이야. 지금 가.”
  • 김진수는 이상현의 업계 라이벌이자, 예전부터 나에게 노골적인 호감을 표시하던 인물이다. 솔직히 말하면 소름 끼치도록 역겨운 노인네였지만 그는 강씨 그룹의 핵심 파트너이기도 했다. 강주혁에게 닿기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첫 번째 관문이다.
  • 나는 트레이에서 샴페인 한 잔을 집어 들었다. 하이힐 소리가 대리석 바닥을 톡톡 울릴 때마다 가슴을 쿡쿡 찌르는 통증이 느껴졌지만 숨을 고르며 한 걸음씩 내디뎠다.
  • 오늘 이상현이 내게 맡긴 배역은 명확했다. 그에게 처절하게 차였으면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려 발버둥 치는 비련의 여주인공...
  • 이어피스 속 이상현의 지시는 계속되었다.
  • “그 노인네한테 가서 내 욕을 해. 날 증오하면서도 아직 놓지 못한 느낌으로. 그런 꼰대들이 딱 좋아할 만한 막장 러브스토리니까.”
  • 나는 남색 정장을 입은 사내를 향해 천천히 발을 뗐다. 그와 불과 두 걸음 거리를 남겨두었을 때, 나는 일부러 힘이 빠진 듯 발목을 꺾었다.
  • 손에 든 샴페인 잔이 위태롭게 기울더니 투명한 금빛 액체가 쏟아져 내려 김진수 대표의 바짓단을 정확히 적셨다. 나는 당황한 기색을 가득 담아 짧은 비명을 내뱉었다.
  • “어머, 세상에! 정말 죄송해요! 제가 어쩌다 이런 실수를... 얼른 닦아드릴게요!”
  • 김진수는 즉각 미간을 찌푸리며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내 얼굴을 확인한 순간, 불쾌함은 찰나의 놀라움으로 바뀌었다.
  • “연주 씨?”
  • 그는 나를 단번에 알아보고는 위로하듯 내 손목을 슬쩍 잡아끌었다. 근엄한 척 무게를 잡고 있었지만, 눈빛에 서린 노골적인 탐욕과 끈적한 목소리까지는 숨기지 못했다.
  • “내가 어떻게 연주 씨 탓하겠어? 긴장 풀어도 돼. 그런데 안색이 왜 이렇게 안 좋나?”
  • 나는 떨리는 몸을 간신히 추스르며 힘겹게 고개를 저었다.
  • “그게... 상현이랑 헤어지고 나니 모든 게 낯설게만 느껴져서요.”
  • 내 말에 김진수가 눈을 번뜩였다. 그는 내 귓가에 바짝 다가와 흥미로운 듯 속삭였다.
  • “듣자 하니, 두 사람이 갈라선 게 그 유나은이라는 아가씨 때문이라던데. 맞나?”
  • 나는 고개를 깊게 숙였다. 그가 내뱉는 뜨거운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일 때마다 구역질이 치밀었지만 눈썹을 가늘게 떨며 억지로 참아냈다.
  • “상현이 선택이니 어쩔 수 없죠. 전 그저 버려진 비서일 뿐인데, 제가 무슨 말을 하겠어요.”
  • 김진수의 눈빛에 확신 섞인 흥미가 깊게 깔렸다.
  • “우리 사랑스러운 연주 씨, 그건 틀린 말이지. 업계 사람이라면 누구나 알아. 당신이 이상현의 가장 완벽한 오른팔이었다는 걸. 지난 10년 동안 한별 그룹이 이룬 성공 중에 당신 손을 안 거친 게 어디 있겠어?”
  • 내 눈가는 순식간에 촉촉하게 젖어 들었다. ‘10년’이라는 단어가 비수처럼 꽂히자 연기가 아닌 진심 섞인 비애가 목을 메게 했다.
  • “다 지나간 이야기일 뿐이에요. 이제 그 사람은 STAR 프로젝트를 손에 넣었으니까요. 더 이상 저는 필요 없다고 하더군요.”
  • “STAR 프로젝트?”
  • 나는 아차 싶은 듯 입을 꾹 다물며 몸을 굳혔다.
  •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제가 실언을 했네요. 죄송해요, 김 대표님. 전 이만...”
  • “잠깐.”
  • 그가 다급히 손을 뻗어 나를 막아섰다.
  • “그 STAR 프로젝트라는 거, 그게 도대체 뭐야?”
  • 나는 입술을 깨물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 찰나, 이어피스를 통해 이상현의 차가운 명령이 내 고막을 때렸다.
  • “서연주, 준비한 가짜 정보 다 뱉어. 저 노인네가 탐욕에 눈이 멀어 내가 판 함정으로 처박히게.”
  • 나는 그에게 바짝 다가서며 주변의 눈치를 보는 척 목소리를 한껏 낮추었다.
  • “김 대표님, 이건 제가 곁에서 우연히 들은 거라 확실하지는 않아요. 하지만 기존의 금융판을 완전히 뒤흔들 수 있는 전혀 새로운 데이터 알고리즘 같았어요.”
  • 나는 김진수의 동공이 커지는 것이 느껴지자 쐐기를 박듯 말을 이었다.
  • “상현이가 가진 모든 자금은 물론, 개인 자산까지 전부 거기에 쏟아부었더라고요. 그런데... 전 사실 너무 불안해요.”
  • “왜?”
  • “전 그런 기술적인 건 잘 몰라요. 하지만 프로젝트를 너무 서두르느라 필수적인 심사 절차까지 몇 개 건너뛰는 걸 봤거든요. 제가 말려도 봤지만, 제 말은 이제 들으려고도 안 하니...”
  • 그 순간, 김진수의 눈빛이 탐욕으로 번뜩였다.
  • 거액의 자본이 투입된 혁신적인 프로젝트, 그리고 사랑을 잃고 영혼까지 탈탈 털린 듯한 나의 초췌한 몰골...
  • 이 모든 것이 내가 흘린 가짜 정보에 지독하리만큼 완벽한 신빙성을 더해주었다.
  • 그의 눈에 비친 나는 그저 판단력을 상실한 채 옛 연인에게 복수하려는 가련하고 멍청한 여자였을 것이다. 상대를 단숨에 집어삼킬 호재를 눈앞에 둔 포식자가 이 미끼를 거절할 리 없었다.
  • 나는 목적을 달성했다는 생각에 서둘러 인사를 건네고 그 불쾌한 자리에서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채 두 걸음을 떼기도 전에, 누군가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
  • 나는 생각보다 강한 손아귀 힘에 놀라 고개를 번쩍 들었다.
  • 시선 끝에 걸린 남자는 나보다 머리 하나는 더 컸다.
  • 몸에 맞춘 듯 완벽하게 떨어지는 칠흑 같은 수트, 상대를 압도하는 곧고 단단한 체격, 그리고 찰나의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을 만큼 치명적으로 잘생긴 얼굴...
  • 강씨 그룹의 수장이자 이 도시에서 말 한마디로 모든 판을 뒤흔드는 절대자, 강주혁이었다.
  • ‘강 대표님이 왜 지금 내 앞에 있는 거지? ’
  • 당혹감에 입술을 뗐을 때, 그가 먼저 허리를 굽혀 내 귓가에 입술을 바짝 가져다 댔다. 뜨거운 숨결이 귓불을 스치며 소름 돋게 간지러웠다.
  • “연기가 꽤 훌륭하네요. 그 멍청한 물고기한테 아주 흥미로운 미끼를 던졌던데.”
  • ‘어떻게 안 거지?’
  • 등줄기에 서늘한 소름이 돋았다. 나는 본능적으로 한 걸음 물러나 거리를 두려고 했다.
  • 하지만 그는 기다렸다는 듯 내 뒷목을 커다란 손으로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차가운 감촉에 몸이 굳어버린 찰나, 그의 손끝이 내 귀를 스치고 지나갔다.
  • 순간, 귓가를 시끄럽게 울리던 이상현의 지시가 뚝 끊겼다.
  • 강주혁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의 길고 매끈한 손가락 사이에는 방금 내 귀에서 빼낸 초소형 이어피스가 들려 있었다. 마치 아주 진귀하고 값비싼 보석을 다루듯 우아하고 느린 손짓이었다.
  • 그는 충격에 얼어붙은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 지었다. 그리고 이내 헝클어진 내 머리칼을 조심스레 넘겨 주었다.
  • “연주 씨 전남편은 여전하네요. 참 천박하고 멍청하고. 그런 삼류 같은 놈이, 연주 씨 같은 미인에게 어울릴 리가 없잖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