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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나는 어느 재계 거물들 모임에서 서해나를 본 적이 있었다.
  • 서해나는 서울 사교계의 핵인싸였다.
  • 서씨 가문 산하에는 회사도 수두룩했다.
  • 그녀가 지나가는 말로 한마디만 대충 흘려도, 그 덕에 혜택을 본 사람들은 평생 먹고살 돈을 벌 수 있었다.
  • 그날의 모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서해나가 홀에 발을 들여놓자마자, 그녀 주위에 사람들이 바로 빽빽이 몰렸다.
  • 다들 서해나와 친해지고 싶어 했다.
  • 파티의 중심도 홀 한가운데가 아니라, 서해나 근처였다.
  • 모두의 시선이 오직 서해나에게만 꽂혔다.
  • 나도 마찬가지였다.
  • 뒤를 바짝 따라다니던 나는 서해나가 사람들을 쓱 떨쳐낸 뒤, 샴페인을 들고 김시환 곁으로 가는 걸 똑똑히 봤다.
  • “시환 씨, 내 파트너가 돼 줄래?”
  • 내 기억 속에 두 사람은 아무런 접점도 없었다.
  • 그런데 두 사람 사이로 오가는 미묘한 눈빛을 본 순간, 가슴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 저도 모르게 김시환의 옷자락을 꽉 잡자 서해나도 이내 내 행동을 알아챘다.
  • 그러더니 입꼬리를 올리며 비웃는 듯한 표정으로 물었다.
  • “비서야?”
  • “여동생.”
  • 김시환은 망설임 없이 대답하며 나와 살짝 거리까지 뒀다.
  • 오기 전, 쓸데없는 구설수를 피하기 위해 우리 관계를 공개하지 않겠다고 나한테 말했다.
  • 그런데 그가 ‘여동생’이라고 내뱉는 순간, 심장이 그대로 바닥에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
  • 연회 내내 서해나는 원수를 보듯 노골적인 시선으로 나를 바라봤다. 워낙 영리한 여자였기에, 나와 김시환 사이를 쉽게 꿰뚫어 봤다.
  •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모른 척했다.
  • 오히려 먼저 내게 샴페인을 건네면서 ‘민주야, 민주야’ 하며 다정하게 불렀다.
  • 그녀의 다정함에 나는 경계심을 잃고 건넨 샴페인을 그대로 들이켰다.
  • 그 순간, 입안이 확 타오르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 손에 들고 있던 잔도 바닥에 떨어져 와장창 산산조각이 났다.
  • 유리잔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서해나의 웃음소리가 고막을 찔렀다.
  • “시환 씨, 여동생이 고추 물 탄 샴페인을 좋아하나 봐?”
  • 나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멍해진 얼굴로 주위를 훑었지만, 손님들은 하나같이 시선을 피하며 아무 일도 없다는 듯 굴었다.
  • 하지만 이 자리에서 서해나와 싸우고 싶진 않았다.
  • 타는 듯한 통증이 목을 타고 내려가며 위를 쿡쿡 찔렀다. 이내 속이 화끈거리며 뒤집히는 느낌까지 들었다.
  • 비틀거리며 벽을 짚고 밖으로 나가려 했지만 서해나와 그녀의 친구들이 나를 에워싸며,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다.
  • “뭐가 그렇게 급해?”
  • “넌 오늘의 럭키 걸이야. 이 고추 물 탄 샴페인 마신 사람은 너뿐이거든.”
  • “우리 규칙대로라면, 너 무대로 가서 솔로곡 한 곡 춰야 해.”
  • “이건 럭키 걸만 누리는 대우니까.”
  • 말은 참 그럴싸했다.
  • ‘럭키 걸이라고? 말도 안 돼. 서해나가 일부러 그런 거잖아.’
  • 하지만 서해나는 내 앞길을 막으며 물 한 모금도 못 마시게 했다.
  • 이내 그녀의 친구들이 나를 떠밀 듯 감싸서 무대 한가운데로 데려갔다.
  • 나는 도무지 반항할 틈이 없었다.
  • 무대에 선 순간, 홀 안의 시선이 전부 내게 쏠렸다.
  • 하지만 춤을 전혀 출 줄 모르는 나는 멍하니 무대 중앙에 서 있었다.
  • 귓가에는 낮은 비웃음만 들렸다.
  • 고추 물 때문에 볼이 점점 더 붉게 달아올랐다. 부끄러워서 발그스레해진 게 아니라 사레가 들려 완전히 시뻘게졌다.
  • 어쩔 수 없이 김시환을 향해 구원 요청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 하지만 고개를 든 그 순간, 마음이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 들었다.
  • 김시환의 시선은 오로지 서해나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우리의 끝이 정해진 건...
  • 그날 밤 이후, 김시환은 다시는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 서해나와 공식 석상에 자주 얼굴을 드러냈고, SNS마다 대놓고 애정을 과시했다.
  • 나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상기시켰다.
  • “김시환과는 끝났어. 마음이 떠난 사람이야, 나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
  • 그런데도 전화벨 소리만 울리면, 하던 일 내려놓고 쏜살같이 또 달려갔다.
  • 전화를 받기 직전까지도, 난 미련을 버리지 못한 채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 하지만 전화기 너머로 낯선 목소리가 들려왔다.
  • “유민주 씨, 주문하신 반지가 도착했습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