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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네가 마지막으로 내 얼굴 보러 안 오면, 난 평생 한으로 남을 거야…….”
  • 의사인 내 귀엔 그녀의 목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본인은 모를 거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지금 저쪽에서 어떤 가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을지.
  • 가슴 속에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나는 참지 못하고 수화기 너머로 내뱉었다.
  • “아프면 병원을 가! 왜 남의 남편한테 전화해서 난리야!”
  • “입 닥쳐, 강이린!”
  • 유준은 다급하게 휴대폰 마이크를 손으로 가리며 나에게 고함을 질렀다. 그 기세에 눌린 건지, 지수는 한술 더 떠 울먹이기 시작했다.
  • “됐어, 유준아……. 이린 언니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내가 그냥…… 하아…….”
  • “지수야, 쟤 말 듣지 마! 그 약 기운이 얼마나 독한지 내가 다 알아. 나 아니면 너 그거 혼자 못 버텨!”
  • “바보 같은 생각 하지 마! 내가 지금 바로 갈게!”
  • 유준은 애가 타는 목소리로 대답하더니, 나를 향해 멸시 어린 시선을 던졌다. 나에 대한 실망감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차오르는 눈물을 억지로 삼켰다. 5년의 연애, 그리고 2년의 결혼 생활. 그 모든 시간이 고작 '여사친'이라는 존재보다 가벼웠다. 지난 7년 동안 내가 했던 이 멍청한 사랑의 대가를 어떻게 치러야 할지 감도 오지 않았다.
  • “꺼져.”
  • 나는 감정을 죽인 채 담담하게 말했다. 그러자 유준의 얼굴에 순식간에 화색이 돌았다. 그는 내 볼에 가볍게 입을 맞추며 들뜬 목소리로 속삭였다.
  • “역시 우리 와이프, 의사라서 생명의 소중함을 아네! 이해해 줄 줄 알았어.”
  • “다녀와서 내가 진짜 잘할게. 보상 확실히 해줄게!”
  • 쾅—!
  •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나의 마지막 기대도 산산조각 났다. 나는 그 자세 그대로 한참을 멍하니 서 있다가, 천천히 손을 들어 뺨을 문질렀다. 그의 입술이 닿았던 온기가 남아있었지만, 마음은 이미 북극의 얼음장처럼 차갑게 식어버렸다.
  • 플라토닉한 부부? 심각한 심리적 장애? 그토록 우습고 조잡한 거짓말을 나는 2년 동안이나 믿어왔다.
  • 남편의 자존감을 지켜주겠다고 나 자신을 채찍질하며, 혹시 내 매력이 부족한 건 아닐까 자책했던 내 모습이 마치 거대한 광대처럼 느껴졌다.
  • 비참함을 추스르기도 전, 휴대폰이 마치 살인 예고라도 하듯 요란하게 울려댔다. 화면에 뜬 이름은 태윤. 유준의 가장 친한 친구 중 한 명이었다.
  • 잠시 망설이다 통화 버튼을 눌렀다.
  • “강이린!”
  • 태윤은 남편의 친구였지만, 단 한 번도 나를 존중한 적이 없었다. 아니, 애초에 나를 자기들 급에 맞지 않는 사람 취급했다는 게 맞겠지.
  • “너 유준이랑 어떻게 된 거야? 왜 갑자기 이혼 소리를 해? 야, 솔직히 네가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사람이 대인배답게 굴어야지.”
  • 내가 입을 떼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로 또 다른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 “이린 씨, 유준이한테 다 들었어요. 그날 지수 상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 몰라서 그래요? 유준이는 그냥 사람을 구한 거라고요! 질투도 정도껏 해야지, 우리 사이에 지수 잘못되는 걸 어떻게 눈 뜨고 봐요?”
  • 그들은 나에게 대답할 기회조차 주지 않은 채, 일방적으로 비난을 쏟아냈다. 그 모든 말들이 그저 가소롭고 역겨웠다.
  • 곧이어 SNS 알림이 미친 듯이 울리기 시작했다. 그들의 단톡방 멤버들이 나에게 DM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 [이린아, 화 좀 풀어. 유준이가 사랑하는 건 그래도 당신뿐이야.] [지수는 우리한테 친동생이나 다름없잖아. 오빠가 동생 좀 도와준 게 뭐가 대수라고 그래?]
  • 마지막으로 지수의 음성 메시지가 도착했다. 재생 버튼을 누르자, 그녀 특유의 털털한 척하는 목소리가 방 안에 울려 퍼졌다.
  • “언니…… 정말 미안해. 다 내 잘못이야……. 유준이한테 화내지 마. 차라리 나를 때려. 언니 화 풀릴 때까지 맞을게. 나 진짜 아무 말 안 할게!”
  • 대인배인 척 연기하는 그 목소리에 위액이 역류하는 기분이었다. 이 견고하고 숨 막히는 그들만의 리그에서,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철저한 이방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