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다음 날 아침, 윤아린이 가장 먼저 내 방을 찾아왔다.
- 분홍색 잠옷 차림에 머리는 느슨하게 틀어 올려져 있었고, 막 잠에서 깬 듯 두 볼은 발그레했다. 하지만 그녀의 눈빛만큼은 칼날처럼 번뜩였다. 문을 열고 들어온 순간부터 그녀의 시선은 내 목덜미에 걸린 비둘기 핏빛 루비 펜던트에서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았다.
- "서아 언니."
- 그녀가 생긋 웃었다.
- "도윤 오빠가 다음 주에 약혼식을 열어 준대요. 그런데 전 제대로 된 보석 하나가 없어요."
- 아린은 내 화장대 서랍을 제 집처럼 열어 이것저것 뒤적였다.
- "아버지가 언니가 골라 주라고 하셨는데… 그래도 전 언니 목걸이가 제일 예쁜 것 같아요. 웨딩드레스랑도 딱 어울릴 것 같고."
- 나는 창가에 선 채 움직이지 않았다.
- "안 돼. 빌려줄 생각 없어."
- 그녀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러더니 순식간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 "언니… 하루만 빌려주세요. 약혼식에서만 하고 바로 돌려드릴게요. 저 아무것도 없잖아요…. 도윤 오빠도 원래는 언니 거였는데, 언니가 저한테 양보해 준 거잖아요…."
- 말이 끝나기도 전에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녀는 한 걸음 물러나 문틀에 몸을 기댔다. 어깨를 잔뜩 움츠리고 턱은 살짝 치켜든 채, 사탕을 빼앗긴 아이처럼 서럽게 울었다.
- 저 자세는 열두 살부터 지금까지 수도 없이 연습한 것이었다. 매번 저런 표정으로 자신을 불쌍한 피해자로 만들었고, 사람들은 늘 그렇게 믿었다. 내가 계모의 딸을 괴롭히는 오만한 언니라고.
- "언니… 화내지 마세요…."
- 나는 그녀와 같은 수준의 연기를 할 생각은 없었다. 적어도 재벌가 장녀로서의 품위만큼은 지킬 생각이었다.
- "난 화난 게 아니야. 분명히 말하는 거야. 내 물건에는 손댈 생각도 하지 마. 알아들었어?"
- 순간 아린의 울음소리가 갑자기 높아졌다. 날카롭고 귀를 찢는 듯한 울음이 복도를 가로질러 옆방 문까지 열어젖혔다.
- 철컥. 문이 열렸다. 셔츠 단추를 두 개쯤 풀어 헤친 강도윤이 인상을 찌푸린 채 문간에 섰다. 헝클어진 머리에서는 막 잠에서 깬 기색이 그대로 묻어났다.
- "무슨 일이야?"
- 아린은 그대로 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 "도윤 오빠…. 제가 언니한테 목걸이를 하루만 빌려 달랬는데…. 언니가 저더러 꺼지래요…. 저 같은 건 자기 물건에 손도 대면 안 된다고…."
- 강도윤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나를 바라봤다.
- "서아. 목걸이 하나 가지고 왜 이렇게 이기적이야."
- 나는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 "그 목걸이는 우리 엄마 유품이야. 그건 너도 알잖아."
- "알아."
- 그의 목소리가 한층 차가워졌다.
- "그래서? 아린이는 하루만 빌려 달라는 거잖아. 약혼식 끝나면 돌려준다는데, 그렇게까지 고집을 부려야겠어?"
- 나는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아린을 바라보다가 피식 웃었다.
- "아린. 네 옷장에 있는 맞춤 드레스는 누가 맞춰 준 건데? 네가 하고 다니는 보석 중에 내 것 빌려 갔다가 안 돌려준 게 몇 개인지는 세어 봤어? 이젠 우리 엄마 유품까지 탐내는 거야?"
- "그만."
- 강도윤이 단호하게 내 말을 끊었다. 푸른 눈동자에 남아 있던 마지막 온기마저 완전히 식어 버렸다.
- 그는 아린을 놓아주고 내 쪽으로 걸어왔다.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은 걸음이었지만, 한 걸음 한 걸음이 내 인내심을 짓밟았다.
- "서아. 계속 엄마 유품, 엄마 유품 하는데."
- 그가 비웃듯 입꼬리를 올렸다.
- "네 엄마 죽은 지도 몇 년이나 됐잖아. 이런 낡은 목걸이가 뭐가 그렇게 대단해?"
- 그 순간 그의 손이 내 목을 향해 뻗어왔다. 나는 본능적으로 뒤로 한 걸음 물러났지만 등을 화장대 모서리에 세게 부딪치고 말았다. 강도윤이 더 빨랐다. 그는 내 목에 걸린 목걸이를 움켜쥐더니 그대로 힘껏 잡아당겼다.
- 툭. 실이 끊어지는 소리와 함께 핏빛 루비 펜던트가 쇄골을 스치며 길게 상처를 남겼다. 붉은 핏방울이 천천히 배어 나왔고, 진주들은 바닥으로 쏟아져 사방으로 흩어졌다. 몇 개는 침대 밑으로 굴러 들어갔고, 몇 개는 벽 모서리에 부딪혀 멈춰 섰다.
- 나는 말없이 바닥을 내려다봤다. 어릴 적 엄마는 창가에 앉아 밤을 꼬박 새우며 이 목걸이를 만들었다. 가는 실을 진주 구멍 하나하나에 꿰어 넣다가 바늘에 손가락을 찔려 피를 흘리기도 했다.
- "서아야."
- "이 진주 하나하나에는 엄마의 사랑이 담겨 있어. 엄마는 우리 서아가 평생 건강하고 행복했으면 좋겠어."
- 그 목소리가 아직도 선명했다. 하지만 지금 그 사랑은 모두 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 강도윤의 손에는 끊어진 실 한 토막만 남아 있었다. 힘없이 늘어진 실이 그의 손끝을 파고들어 희미한 하얀 자국을 남겼다.
- 그때 문가에서 윤아린의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아악!"
- 그 비명은 가늘고 날카로웠다. 마치 산산조각 난 것이 내 것이 아니라 자기 것인 양.
- 나는 한순간도 망설이지 않았다. 화장대 위에 놓인 유리컵을 집어 들고, 그가 미처 반응하기도 전에 그대로 그의 머리를 향해 내리쳤다.
- 쨍!
- 유리가 산산이 깨지며 파편이 사방으로 튀었다. 강도윤은 고통에 얼굴을 돌리며 본능적으로 손을 들어 막았다.
- 바로 그 순간이었다. 나는 그의 손목을 붙잡아 있는 힘껏 비틀었다.
- 우드득. 뼈가 어긋나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렸다. 곧이어 그의 분노 어린 비명이 터져 나왔다.
- "윤서아! 뭐 하는 거야?!"
- 나는 대답 대신 그의 무릎을 힘껏 걷어찼다. 그는 균형을 잃고 그대로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크게 뜬 순간, 나는 하이힐을 들어 그대로 그의 오른손 위를 짓밟았다.
- 가느다란 굽이 손등을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는 낮게 신음하며 손가락을 활짝 폈다가 다시 움켜쥐었다. 굽 끝이 손가락 사이 살을 파고들자, 비명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 문가에 서 있던 윤아린이 악을 쓰듯 소리쳤다.
- "사람 살려요! 언니가 미쳤어요! 누가 좀 와 주세요!"
- 나는 그녀를 쳐다보지도 않았다. 강도윤의 역겨운 신음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시한 채, 조용히 바닥에 흩어진 진주를 하나씩 주워 담기 시작했다. 강도윤은 떨리는 손으로 다친 손을 감싸 쥔 채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서아… 화 풀어. 내가 새로 사 줄게. 그러면 되잖아."
- 나는 끝내 그를 보지 않았다. 보고 싶지도 않았다.
- "못 사."
- 나는 담담하게 말했다.
- "강도윤. 우리 엄마가 나한테 남겨 준 건, 넌 평생을 다 바쳐도 갚지 못해."
- 윤아린은 문틀에 몸을 붙인 채 잔뜩 움츠러들어 있었다. 입술은 잘게 떨렸고, 눈물은 아직 볼을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지만 울음은 이미 멈춰 있었다.
- 나는 그녀의 곁을 지나쳐 그대로 밖으로 걸어 나갔다.
- 아버지의 서재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문을 밀고 들어가자 아버지는 책상 앞에 앉아 있었고, 탁자 위에는 한성가에서 보내온 편지가 펼쳐져 있었다.
- 아버지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아버지."
- 나는 주워 온 진주와 루비 펜던트를 책상 위에 조용히 내려놓았다.
- "한성가에 전해주세요."
- "윤서아는 언제든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 아버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는 루비 펜던트에 손을 뻗었지만, 손끝은 허공에서 멈춘 채 끝내 닿지 못하고 다시 거두어졌다.
- "네 어머니가…."
- "어머니는 저를 사랑하셨고, 아버지를 사랑하셨고, 이 가문도 사랑하셨어요. 전 어머니를 실망시키지 않을 거예요."
- 나는 몸을 돌려 문을 향해 걸었다. 등 뒤에서 들려온 아버지의 목소리는 갈라져 있었다.
- "한성가 후계자는 이미 병으로 쓰러져 몸도 제대로 못 쓴다고 하더구나. 그들은 그저 아이를 낳아 줄 사람만 필요할 뿐이야. 아이를 낳고 나면… 네가 어떻게 되든…."
- 나는 문손잡이를 잡은 채 잠시 멈췄다. 그리고 뒤돌아보지 않은 채 조용히 말했다.
- "아버지. 절 믿으세요. 전 반드시 살아남을 테니까요."
-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나는 윤서아다. 어릴 때부터 재벌가 장녀로 길러졌다. 상황을 읽을 줄 알고, 사람의 속내를 볼 줄 알며, 언제 무엇을 선택해야 하는지도 안다. 가문을 위해서도, 나 자신을 위해서도. 나는 해낼 수 있다.
- 복도에는 수정 샹들리에가 아직도 눈부시게 빛나고 있었다. 창밖 분수에서는 여전히 물줄기가 솟아올랐고, 하늘에는 미처 지지 못한 달이 희미하게 걸려 있었다. 수면 위로 부서지는 수많은 빛 조각이 밤새 어머니가 한 알 한 알 꿰어 주셨던 진주처럼 흩어져 보였다.
- 모두 산산이 부서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 나는 옷장을 열어 어머니가 오래전부터 준비해 두셨던 하얀 드레스를 꺼냈다. 그리고 조용히 문 뒤에 걸어 두었다.
유료회차
결제 방식을 선택해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