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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 내 말이 끝나자마자 세실리아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다. 채 한 박자도 지나지 않아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난… 그런 짓 안 했어요….”
  • 세실리아는 반드로스의 옷깃을 꽉 움켜쥔 채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칼리스타, 너 오늘까지도 날 모함하는 거야? 나를 망가뜨린 건 너잖아….”
  • 마치 내 말 한마디 한마디가 그녀를 끔찍한 악몽 속으로 다시 밀어 넣기라도 한 듯, 세상에서 가장 가엾은 사람처럼 흐느꼈다.
  • “그만해!”
  • 테론이 가장 먼저 나를 윽박질렀다.
  • “잘못한 건 너면서 혼례 날까지 세실리아에게 뒤집어씌워? 당장 사과해, 칼리스타!”
  • 마카온의 얼굴도 딱딱하게 굳었다.
  • “칼리스타, 지금 네 상태가 엉망인 건 알아. 하지만 이런 끔찍한 거짓말까지 지어내선 안 돼. 세실리아에게 사과해.”
  • 반드로스는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여 세실리아의 눈물을 닦아 주며 낮은 목소리로 달랬다.
  • “저런 말은 신경 쓰지 마. 아무도 저런 거짓말을 믿지 않아.”
  • 그래, 결국은 늘 이런 식이었다.
  • 세실리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이들에게 그녀의 말은 무엇이든 진실이었다. 반면 내가 무슨 말을 해도, 내가 겪은 일을 있는 그대로 털어놔도 돌아오는 건 악독한 거짓말쟁이라는 낙인뿐이었다.
  • 수년 동안 나는 나 자신을 증명하려고 발버둥 쳤다. 신의 아들들이 내 말을 조금이라도 들어 주길 바라며 악착같이 매달렸다.
  • 돌이켜 보면 나는 참 어리석었다.
  • 살아남기 위해 그들의 발치에 스스로 엎드렸고, 그 발에 몇 번이고 짓밟히도록 내버려 뒀다.
  • 신들에게 형벌을 받은 시시포스처럼 내 고통에도 끝이 없었다. 사랑도 믿음도 결코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 오랫동안 내 곁에 남아 준 건 헤라의 저주뿐이었다. 온몸 구석구석으로 번지는 통증만이 나를 떠나지 않았다.
  • 나는 지쳤다.
  • 이대로 죽음을 맞아도 이제는 괜찮을 것 같았다.
  • ‘적어도 죽음은 내 해명을 거짓이라 몰아붙이지 않겠지. 또다시 나를 억울하게 만들지도 않을 테고.’
  • 앞을 가로막은 이들을 밀치고 나가려는데, 테론이 내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 “어딜 가려는 거야?”
  • 그의 목소리에는 의심이 가득했다.
  • “도망쳤다가 세실리아를 또 해칠 기회라도 노리려는 거야?”
  • 나는 멍하니 테론을 바라봤다.
  • 방금 전 분명 내가 진짜 피해자라고 말했는데도, 그의 머릿속에는 여전히 내가 세실리아를 해칠 거라는 생각뿐이었다.
  • 테론이 차갑게 말했다.
  • “오늘 밤 넌 아무 데도 못 가. 마카온의 진료실에 있어. 마카온과 내가 번갈아 지킬 테니까 세실리아 근처에 갈 생각은 꿈도 꾸지 마!”
  • 그 말을 들은 반드로스가 만족한 듯 긴 숨을 내쉬었다. 그는 세실리아의 손을 잡고 태연하게 말했다.
  • “연회는 아직 안 끝났어. 내가 먼저 세실리아를 데려갈게.”
  • 반드로스의 보호를 받으며 내 곁을 지나던 세실리아가 슬쩍 고개를 들어 나를 올려다봤다.
  • 그 눈에는 두려움 따윈 없었다.
  • 승자의 오만한 우월감만 번뜩였다.
  • 곧 문이 닫히며 내 앞에 남은 마지막 빛줄기마저 사라졌다.
  • 나는 마카온의 진료실에 갇혔다. 테론과 마카온은 번갈아 문 앞을 지키며 출입구 근처에도 가지 못하게 막았다.
  • 그들은 빵과 물, 치즈를 가져다줬지만 나는 손도 대지 않았다.
  • 빨리 끝내는 것조차 막겠다면 먹지도, 마시지도, 자지도 않을 생각이었다.
  • 아무리 제우스의 딸이라 해도 삶의 의지를 버린 채 버티기만 한다면, 언젠가는 이 몸에 남은 신력도 모두 바닥날 것이다.
  • 죽음이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며 벽에 기대 창밖의 달빛을 공허하게 바라봤다.
  • 아르테미스처럼 숲에서 자유롭게 살 수만 있다면, 평온과 건강이 내 곁에 머물러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 하지만 내 몸을 흐르는 것은 저주의 고통뿐이었다. 몸을 웅크렸지만 더는 손바닥에 손톱을 박지도 않았다.
  • 이제는 그 통증조차 나를 움직이지 못했다.
  •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 마침내 마카온이 이상함을 눈치챘다. 그는 성큼 다가와 내 손을 붙잡고 억지로 고개를 들게 했다.
  • “칼리스타, 나 좀 봐.”
  • 그가 내 어깨를 거칠게 흔들었다.
  • “내가 누군지 아직 알겠어?”
  • 나는 마카온을 조용히 바라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옆에 서 있던 테론의 얼굴에도 마침내 당황한 기색이 떠올랐다.
  • “얘 왜 이래?”
  • 마카온은 내 맥을 짚은 뒤 이마를 만졌다. 그의 표정은 점점 더 심각하게 굳어 갔다.
  • “칼리스타는… 의식을 누구도 닿을 수 없는 곳에 가둬 버린 것 같아.”
  • 마카온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 “관심을 끌려고 이러는 게 아니야. 정말 자기 자신을 죽게 만들려는 거야.”
  • 테론은 얼어붙은 얼굴로 서 있었다.
  • 마카온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 “이번에는… 헤라의 저주가 정말 칼리스타를 완전히 삼켜 버릴지도 몰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