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 밧줄을 나뭇가지에 묶고 바위 위에 올라선 순간, 어린 시절의 테론이 눈앞을 스쳤다.
- 처음부터 테론이 나를 좋아했던 건 아니다.
- 내가 태어나면 부모님의 사랑을 빼앗길 거라고 믿었으니까.
- 그래서 나는 밤낮없이 물레를 돌려 고운 천을 짰다.
- 그 천을 팔아 테론이 가장 좋아하는 검과 방패를 사 줬다.
- 그가 훈련 중 누군가를 다치게 했을 때는 대신 벌을 받기도 했다.
- 한번은 다친 몸으로 훈련을 계속하다 열병까지 앓았다.
- 나는 빗속을 뚫고 신전까지 약을 구하러 달려갔고, 밤새 그의 곁을 지켰다.
- 진심에는 진심이 돌아올 거라고 믿었다.
- 시간이 흐르자 테론도 나를 여동생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 그는 나를 ‘사랑하는 내 동생’이라고 불렀다.
- 내 생일이면 서툰 손으로 삐뚤빼뚤한 화관까지 엮어 머리에 씌워 줬다.
- 하지만 세실리아가 나타나자 그 모든 것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 그녀가 눈물 한 방울만 흘려도 테론은 내가 수년 동안 자신을 위해 했던 일을 모조리 잊었다.
- 나는 발밑의 바위를 걷어찼다.
- 밧줄이 곧장 목을 조였다.
- 의식이 희미해지려는 순간, 번쩍이는 은빛 섬광이 밧줄을 단숨에 잘라 냈다.
- 나는 한 남자의 품으로 떨어졌다.
- 숨을 헐떡이며 기침을 쏟아 내자 수치심이 밀려왔다.
- 입술만 달싹인 채 멍하니 허공을 바라봤다.
- “왜 아직 살아 있지?”
- “운명의 세 여신이 원한 게 이건가?”
- “칼리스타, 너 정신 나갔어?”
- 낯익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내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아스클레피오스의 아들, 마카온이었다.
- 한때 나를 고통 속에서 직접 건져 냈다가, 결국 제 손으로 다시 어둠 속에 밀어 넣은 사람이기도 했다.
- 마카온은 나보다 몇 살 많았다.
- 테베의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모두의 맏형처럼 여겨지는 사람이었다.
- 그의 아버지 아스클레피오스는 치유의 신이었다.
- 마카온 역시 젊은 나이에도 테베에서 가장 존경받는 의사였다.
- 헤라의 저주 때문에 처음으로 밤을 꼬박 새운 날, 어머니는 나를 마카온의 진료소로 보냈다.
- 그때만 해도 저주의 힘을 내 의지로 간신히 억누를 수 있었다.
- 가족을 걱정시키지 않으려고 남들처럼 웃고 떠드는 척했다.
- 밤만 되면 홀로 침상에 웅크려 영혼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떨며 견뎠다.
- 그때 내 침상 곁에 앉아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 준 사람이 마카온이었다.
- 그는 내게 말했다.
- “괜찮은 척하지 마. 네가 느끼는 고통은 진짜야. 널 낫게 할 수 있다면 내가 할 수 있는 건 뭐든 해 볼게.”
- 내가 약초를 구별하는 법을 배울 때도 마카온은 늘 곁에 있었다.
- 봄 축제에도 함께 갔다.
- 심지어 나를 델포이의 신전까지 데려가, 그가 사랑하는 할아버지이자 태양신인 아폴론께 함께 예를 올렸다.
- 그곳에서 아름다운 사랑의 시도 함께 들었다.
- 델포이의 무녀는 마카온이 집에 손님으로 데려온 젊은 여자는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 그때 나는 마카온이라면 내가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붙잡아 줄지도 모른다고 믿었다.
- 하지만 세실리아가 그를 찾아가 울면서 말했다.
- “마카온, 칼리스타가 건달들을 돈으로 매수해 나를 욕보이게 했어요. 나는 매일 밤 그날의 악몽을 꿔요. 정말 더는 살고 싶지 않아요.”
- 그날 마카온은 내 앞에서 세실리아를 끌어안고 다정하게 말했다.
- “무서워하지 마. 내가 지켜 줄게.”
- 내가 진실을 설명하려 하자, 나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처음으로 낯설게 느껴졌다.
- “나가, 칼리스타.”
- 마카온은 나를 경계하는 눈으로 바라봤다.
- “네가 말하던 그 모든 고통도 어쩌면 나를 속여 동정심을 사려던 수작이었겠지.”
- 이제 그 마카온이 다시 내 앞에 서 있었다.
- 잘려 나간 밧줄은 땅바닥에 널브러져 있었고, 목은 여전히 타는 듯 화끈거렸다.
- 나는 그를 바라보며 나조차 낯설 만큼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
- “오늘 세실리아와 반드로스의 혼례잖아요. 안 가요?”
- 마카온의 표정이 순간 굳었다.
- 그는 성가시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 “잠깐 바람 좀 쐬러 나오면 안 돼?”
- 그 이유는 내가 누구보다 잘 알았다.
- 마카온도 세실리아를 사랑했으니까.
- 그녀의 곁에 남기 위해 아테네에서 의술을 더 배울 기회까지 포기한 사람이었다.
- 그런 세실리아가 오늘 다른 남자와 혼인했으니 마음이 편할 리 없었다.
- 마카온의 시선이 잘린 밧줄로 향했다.
- 그의 목소리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 “그런데 넌? 왜 하필 내가 지나는 길목에서 죽으려 한 거지?”
- 그가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었다.
- “내가 올 걸 알고 또 마음 약해지게 만들려고 그런 거야? 제발 다른 수법 좀 써. 저주 때문에 죽을 만큼 괴로운 척하는 건 이제 내 앞에서 그만해.”
- 이제는 가슴이 아프지도 않았다.
- 계속 얻어맞다 보면 사람도 결국 무뎌지는 모양이었다.
- 우스운 건, 내가 어떤 고통을 견뎌 왔는지 가장 먼저 알아준 사람이 바로 마카온이었다는 사실이다.
- 나는 땅에서 몸을 일으켜 등을 돌렸다.
- 아무에게도 방해받지 않을 방법을 찾아야 했다.
- 내가 이토록 순순히 물러난 적이 없어서였을까.
- 마카온은 뭔가 이상하다는 걸 눈치챘다.
- 그는 성큼 다가와 내 팔을 움켜잡고 억지로 나를 진료소까지 끌고 갔다.
- “오늘 밤은 널 혼자 둘 수 없어.”
- 마카온은 하인을 불러 테론에게 이 사실을 알리라고 지시했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진료소 밖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 테론이 도착했다.
- 그 뒤로는 방금 혼례를 마친 반드로스와 꽃 장식이 가득한 드레스를 입은 세실리아가 따라 들어왔다.
- 세실리아는 나를 보자마자 얼굴이 새하얗게 질리더니 반드로스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 반드로스는 그녀를 감싸며 나를 차갑게 바라봤다.
- “칼리스타, 우리한테 동정받겠다고 정말 이런 짓까지 해야 했어?”
- 그가 목소리를 높였다.
- “오늘은 세실리아와 나의 혼례였어. 꼭 세실리아의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까지 망쳐야 했어? 네가 그 애한테 저지른 짓으로도 아직 부족해?”
- 그들의 눈빛은 모두 똑같았다.
- 혐오와 경계.
- 내가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들이 감싸고 있는 성스러운 신부를 해칠 것처럼 바라봤다.
- 문득 웃음이 치밀었다.
- 가슴 가장 깊은 곳에서 통증이 미친 듯이 밀려와 그대로 비명이라도 지를 것 같았다.
- 그래서 차라리 웃어 버렸다.
- “세실리아가 그 건달들에게 욕을 본 적 따위는 애초에 없었다고 하면요?”
- 모두의 표정이 달라졌다.
- 나는 반드로스의 품에 숨은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또박또박 말했다.
- “그날 그자들에게 끌려가 모욕당한 사람은 나였어요.”
- 그리고 분명하게 덧붙였다.
- “그자들을 사주한 사람은 세실리아였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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