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다음 화
완벽한 작별: 심장을 원하는 당신에게

완벽한 작별: 심장을 원하는 당신에게

lucky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악마의 거래

  • 중환자실(ICU) 앞, 싸늘한 복도.
  • 탁-
  • 강혁이 서류 뭉치를 내 앞 의자에 거칠게 내던졌다.
  • “서명해.”
  • 목소리에는 온기라곤 찾아볼 수 없었다. 나를 내려다보는 그의 눈동자가 섬뜩하게 번들거렸다.
  • 그것은 장기 기증 동의서였다.
  • 그는 내 아버지의 심장을 원하고 있었다. 그토록 끔찍이 여기는 그 여자, 신다온을 살리기 위해서.
  • “세린아, 어차피 당신의 그 도박꾼 아버지는 곧 죽어.”
  • 강혁이 내 손목을 낚아챘다. 어찌나 세게 쥐었는지 뼈가 으스러질 것만 같았다.
  • “사회에 기생하는 구더기 같은 인생이었는데, 다온이를 살려서 마지막으로 가치라는 걸 좀 증명하고 가는 게 낫지 않겠어?”
  • 나는 그를 빤히 올려다보았다.
  • 지난 10년간 사랑했던 남자. 내 아이의 아버지.
  • 일주일 전, 바로 이 복도에서였다.
  • 우리 아들, 강이안이 피투성이가 된 채 응급실로 실려 들어갔던 것이.
  • 신다온이 계단 위에서 이안을 밀쳤다. 나는 분명히 보았다.
  • 하지만 뒤늦게 달려온 강혁이 본 것은, 그의 품에 안겨 사시나무 떨듯 떨며 우는 신다온뿐이었다. 그녀는 자신이 너무 놀랐다며 피해자 행세를 했다.
  • 강혁은 신다온을 품에 안고 다정하게 달랬다. 그리고 나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는 판결을 내렸다.
  • “이안이는 발을 헛디딘 거야. 사고였다고. 다신 밀쳐서 굴러졌다는 그런 근거도 없는헛소리하지 마.”
  • 그는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병원 CCTV를 삭제하고, 목격자들의 입을 막았다. 명백한 살인 미수를 단순 사고로 덮어버린 것이다.
  • 그런데 지금. 그는 내 아들의 심장을 꺼내 그 살인자에게 주려 하고 있다.
  • 그는 지금 ICU에 누워 뇌사 판정을 받은 사람이, 그가 그토록 경멸하던 내 아버지라고 믿고 있다.
  • 하지만 그곳에 누워있는 건, 우리의 친아들이다.
  • 책상위에 놓인 기증 동의서 및 최종 이식 적합 판정 보고서.‘... 수혜자 신다온과 최종 이식 적합 판정’이라는 문구.
  • 그러나 강혁은 모를 것이다. 이식 데이터가 가리키는 대상은 내 아버지가 아니라 그가 한때 끔찍이도 아꼈던 아들이라는 것을.
  • 나는 반박하지 않았다. 울부짖지도 않았다.
  • 그저, 가슴 한구석이 텅 비어버린 것 같았다. 복도의 찬 바람이 그 구멍 사이로 윙윙거리며 지나갔다.
  • 나는 조용히 펜을 들었다.
  • 사각, 사각.
  • 펜촉이 종이 위를 긁으며 건조한 소리를 냈다. 나는 내 이름을 적어 내려갔다.
  • “김세린”
  • 한 획, 한 획. 뼈에 새기듯이.
  • 내가 순순히 따르자 강혁은 그제야 내 손목을 놓아주었다. 광기로 번들거리던 눈빛이 사라지고, 익숙한 경멸과 비웃음이 그 자리를 채웠다.
  • “그래도 양심은 남아있었군.”
  • 강혁은 신다온에게 새 생명을 줄 종이 조각을 챙겨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발걸음은 경쾌했고, 역겨울 정도의 희열이 묻어났다.
  • 그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래서 보지 못했을 것이다.
  • 내 눈동자 깊은 곳에서 타오르기 시작한 불꽃을. 우리 모두를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그 뜨거운 불길을.
  • 강혁이 병실 문을 열고 들어갔다. 나는 그림자처럼 소리 없이 그 뒤를 따랐다.
  • 신다온의 병실은 봄날처럼 따뜻했고, 화려한 꽃바구니들로 가득 차 있었다. 환자복을 입은 신다온은 창백한 얼굴로 보호본능을 자극하고 있었다.
  • 강혁이 다가가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감싸 쥐었다.
  • “다온아, 괜찮아, 다 잘 된 거야”
  • 나에게 단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 “심장을 구했어. 이제 곧 괜찮아질 거야.”
  • 신다온의 큰 눈망울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더니, 이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고마워, 혁아...”
  • 그녀가 가늘게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 “그리고... 언니한테도 고맙다고 전해줘. 언니네 아버님... 언니도 많이 힘들 텐데...”
  • 그녀의 입에서 나온 ‘언니’라는 단어는 똥통에 빠트린 사탕처럼 역겨웠다.
  • 강혁은 콧방귀를 뀌며 비웃었다.
  • “고맙긴 뭐가 고마워?”
  • 그는 티슈를 뽑아 신다온의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
  • “그나마 네게 심장을 줄 수 있어서 그 작자 인생이 헛되지 않은 거야. 아니었으면 진작에 죽었을 목숨이니까.”
  • 그는 너무나도 당연하게 말했다. 마치 그것이 사람의 목숨이 아니라, 시장 좌판의 물건이라도 되는 것처럼.
  • 내 시선이 닿지 않는 각도에서, 신다온의 입꼬리가 살짝 말려 올라가는 게 보였다.
  • 강혁이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내 번호를 눌렀다. 나는 바로 문 밖에 서 있다.
  • 르르릉-
  • 적막한 복도에 벨소리가 날카롭게 울려 퍼졌다. 나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 “김세린, 병실로 들어와“
  • 철저한 명령조였다.
  • “다온이의 부모님이 널 직접 보고 감사하다고 하고 싶어서.”
  • 그는 잠시 말을 멈추더니, 선심 쓴다는 듯 덧붙였다.
  • “기회를 줄 테니까, 어른들 앞에서 눈치 있게 말해. “
  • 나는 딱 한 글자만 대답했다.
  • “응”
  • 전화를 끊었지만, 나는 곧장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차가운 벽에 기대어 휴대폰 화면을 켰다.
  • 화면이 밝아지고, 나는 저장해 둔 오디오 파일을 재생했다.
  • 이어폰 너머로 신다온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웃음기가 섞인, 거만하고 잔인한 목소리.
  • “그냥 살짝 밀었을 뿐이야. 누가 내 앞길을 막으래? “
  • “그 조그만 잡종 새끼, 지 엄마랑 똑같이 거슬린단 말이야. “
  • “하지만 걱정 마. 강혁은 날 믿고 사랑하니까. “
  • 녹음 파일 배경음으로는 ICU 모니터의 규칙적인 기계음이 들려왔다. 삐- 삐- 삐-
  • 이안이 사고를 당한 다음 날이었다. 내가 면회를 갔을 때, 그녀는 굳이 따라 들어와 내 귀에 대고 저주를 퍼부었다.
  • 그녀는 내가 충격에 빠져 무너질 것이라고만 생각했을 것이다. 내가 주머니 속에서 녹음 버튼을 눌렀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한다.
  • 기대해, 신다온. 내 아들의 목숨값을, 뼈저리게 치르게 해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