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손을 쓰기 시작한 지 단 하루 만에, 한강 그룹이 파산했다는 소식이 모든 경제지 1면을 장악했다. 한때 사교계의 정점에서 오만함을 떨던 한씨 가문이 하룻밤 사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한진태 회장 부부는 구름 위에서 진흙탕으로 곤두박질쳤다. 쏟아지는 채권자들의 압박에 저택은 압류되었고, 몸에 두르고 있던 명품과 보석까지 헐값에 처분하며 빚잔치를 벌여야 했다.
가장 비참한 건 강리나였다. 한강 그룹의 공주라는 후광이 사라지고 성진 그룹과의 혼약까지 파기되자, 그녀는 상류층 사이에서 희대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영원할 것 같던 '친구'들은 오물이라도 본 듯 그녀를 피했고, 그녀가 그토록 자랑하던 미모와 재능은 차가운 현실 앞에서 아무런 방패가 되지 못했다.
나는 어느 허름한 카페에서 그들을 마주했다.
한수진 씨는 여러 번 빨아 색이 바랜 낡은 옷차림에, 푸석하게 뜬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우아하던 귀부인의 자취는 온데간데없고, 얼굴엔 찌든 수척함만 가득했다. 나를 발견한 그녀의 눈에서 독기가 번뜩였다.
“이서윤! 이 배은망덕한 것! 감히 우리 은혜를 이렇게 원수로 갚아?”
나는 대답 대신 찻잔 속의 커피를 느릿하게 휘저었다.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강리나가 악에 받친 듯 달려들어 내 코앞에 손가락질을 해댔다.
“다 너 때문이야! 이서윤 네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쳤다고! 당장 구진혁 씨 돌려줘! 내 원래 삶을 돌려내란 말이야!”
그녀가 내 머리채라도 잡을 듯 기세등등하게 손을 뻗었지만,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구 회장님의 경호원이 얼음처럼 차가운 손길로 그녀를 제압했다.
그 순간, 한때 내게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한진태 회장이 비굴하게 꼬리를 내리며 다가왔다. 그의 얼굴엔 역겨울 정도로 아첨 섞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서윤아, 우리가 이제야 잘못을 깨달았다. 그때는 우리가 잠시 눈이 멀어 너에게 너무 모질게 굴었어. 다 저 강리나가 철이 없어서 그랬던 거니까, 네가 좀 너그럽게 이해해 주면 안 되겠니?”
그는 손바닥이 발갛게 되도록 비비며 내 눈치를 살폈다.
“구본혁 회장님께 말씀 좀 잘 드려다오. 제발 한 번만 선처해달라고, 우리 좀 살려달라고 말이야. 그래도 우리가 네 천륜인데, 설마 친부모가 길바닥에 나앉는 꼴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 아니냐?”
나는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친부모?”
비릿한 실소가 입가에 번졌다.
“스무 해 넘도록 나를 내팽개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었을 때, 당신들 머릿속에 '친딸'이라는 단어가 있기는 했나요?”
“강리나가 카드로 내 얼굴을 긁고 모욕할 때, 오히려 내 뺨을 때리며 사과를 강요하던 그 순간에 나는 당신들 딸이었냐고요.”
나는 한 발짝 다가서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오로지 저 가짜 강리나를 위해 나를 다락방에 가두고 굶겼을 때, 그때는 내 호적이 기억나긴 했어?”
한강 그룹 부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모든 걸 잃고 나니까 이제야 내가 보이나 본데.”
나는 가방을 챙겨 들며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이미 늦었어. 당신들이 버린 건 기회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나는 그들의 비명 섞인 애원을 뒤로한 채, 단 한 번의 뒤돌아봄 없이 카페를 빠져나왔다.
등 뒤로 한수진 씨와 강리나의 악에 받친 저주, 그리고 한 회장의 비굴한 울음소리가 엉겨 붙어 들려왔다. 나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이 내 대신 강리나를 선택했던 그 오만한 순간부터, 우리 사이에 남은 건 차디찬 증오뿐이었으니까.
구 회장님의 펜트하우스로 돌아오자, 거실 조명을 환하게 밝힌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식탁 위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왔니? 어서 손 씻고 와서 밥 먹자.”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순간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무 해가 넘는 세월 동안, 누군가 나를 위해 따뜻한 밥상을 차려놓고 ‘어서 오라’며 기다려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이 낯설고도 벅찬 온기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서윤아, 왜 그러니? 어디 안 좋으냐?”
나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챈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배고프네요.”
식사가 중반쯤 이어졌을 때, 내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구진혁.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신 거절을 눌렀다. 하지만 그는 포기를 모르는 듯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결국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전화를 받았다.
“무슨 용건이야?”
수화기 너머, 구진혁 씨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다급하고 절박했다.
“이서윤…… 너, 너랑 우리 아버지 대체 무슨 사이야? 설마 아니지? 말해봐, 대체 정체가 뭐냐고!”
내가 입술을 떼기도 전이었다. 구 회장님이 자연스럽게 내 휴대폰을 가져가더니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전화를 향해 내뱉었다.
“이서윤은 내 미래의 아내가 될 사람이다.”
순간, 전화 너머에서 숨이 멎는 소리가 들렸다. 구 회장님의 명령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