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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 구본혁 회장님의 움직임은 거침없었다.
  • 그가 손을 쓰기 시작한 지 단 하루 만에, 한강 그룹이 파산했다는 소식이 모든 경제지 1면을 장악했다. 한때 사교계의 정점에서 오만함을 떨던 한씨 가문이 하룻밤 사이 모래성처럼 허물어졌다.
  • 한진태 회장 부부는 구름 위에서 진흙탕으로 곤두박질쳤다. 쏟아지는 채권자들의 압박에 저택은 압류되었고, 몸에 두르고 있던 명품과 보석까지 헐값에 처분하며 빚잔치를 벌여야 했다.
  • 가장 비참한 건 강리나였다. 한강 그룹의 공주라는 후광이 사라지고 성진 그룹과의 혼약까지 파기되자, 그녀는 상류층 사이에서 희대의 웃음거리로 전락했다. 영원할 것 같던 '친구'들은 오물이라도 본 듯 그녀를 피했고, 그녀가 그토록 자랑하던 미모와 재능은 차가운 현실 앞에서 아무런 방패가 되지 못했다.
  • 나는 어느 허름한 카페에서 그들을 마주했다.
  • 한수진 씨는 여러 번 빨아 색이 바랜 낡은 옷차림에, 푸석하게 뜬 머리칼을 하고 있었다. 우아하던 귀부인의 자취는 온데간데없고, 얼굴엔 찌든 수척함만 가득했다. 나를 발견한 그녀의 눈에서 독기가 번뜩였다.
  • “이서윤! 이 배은망덕한 것! 감히 우리 은혜를 이렇게 원수로 갚아?”
  • 나는 대답 대신 찻잔 속의 커피를 느릿하게 휘저었다. 상대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했다. 그러자 옆에 있던 강리나가 악에 받친 듯 달려들어 내 코앞에 손가락질을 해댔다.
  • “다 너 때문이야! 이서윤 네가 내 인생을 송두리째 망쳤다고! 당장 구진혁 씨 돌려줘! 내 원래 삶을 돌려내란 말이야!”
  • 그녀가 내 머리채라도 잡을 듯 기세등등하게 손을 뻗었지만,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구 회장님의 경호원이 얼음처럼 차가운 손길로 그녀를 제압했다.
  • 그 순간, 한때 내게 고압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한진태 회장이 비굴하게 꼬리를 내리며 다가왔다. 그의 얼굴엔 역겨울 정도로 아첨 섞인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서윤아, 우리가 이제야 잘못을 깨달았다. 그때는 우리가 잠시 눈이 멀어 너에게 너무 모질게 굴었어. 다 저 강리나가 철이 없어서 그랬던 거니까, 네가 좀 너그럽게 이해해 주면 안 되겠니?”
  • 그는 손바닥이 발갛게 되도록 비비며 내 눈치를 살폈다.
  • “구본혁 회장님께 말씀 좀 잘 드려다오. 제발 한 번만 선처해달라고, 우리 좀 살려달라고 말이야. 그래도 우리가 네 천륜인데, 설마 친부모가 길바닥에 나앉는 꼴을 보고만 있지는 않을 것 아니냐?”
  • 나는 천천히 커피잔을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친부모?”
  • 비릿한 실소가 입가에 번졌다.
  • “스무 해 넘도록 나를 내팽개치고 죽었는지 살았는지 관심도 없었을 때, 당신들 머릿속에 '친딸'이라는 단어가 있기는 했나요?”
  • “강리나가 카드로 내 얼굴을 긁고 모욕할 때, 오히려 내 뺨을 때리며 사과를 강요하던 그 순간에 나는 당신들 딸이었냐고요.”
  • 나는 한 발짝 다가서며 얼음장처럼 차가운 목소리로 쐐기를 박았다.
  • “오로지 저 가짜 강리나를 위해 나를 다락방에 가두고 굶겼을 때, 그때는 내 호적이 기억나긴 했어?”
  • 한강 그룹 부부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 “모든 걸 잃고 나니까 이제야 내가 보이나 본데.”
  • 나는 가방을 챙겨 들며 단호하게 등을 돌렸다.
  • “이미 늦었어. 당신들이 버린 건 기회가 아니라, 나였으니까.”
  • 나는 그들의 비명 섞인 애원을 뒤로한 채, 단 한 번의 뒤돌아봄 없이 카페를 빠져나왔다.
  • 등 뒤로 한수진 씨와 강리나의 악에 받친 저주, 그리고 한 회장의 비굴한 울음소리가 엉겨 붙어 들려왔다. 나는 단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이 내 대신 강리나를 선택했던 그 오만한 순간부터, 우리 사이에 남은 건 차디찬 증오뿐이었으니까.
  • 구 회장님의 펜트하우스로 돌아오자, 거실 조명을 환하게 밝힌 그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넓은 식탁 위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들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 “왔니? 어서 손 씻고 와서 밥 먹자.”
  • 그를 멍하니 바라보던 나는 순간 코끝이 찡해지는 것을 느꼈다. 스무 해가 넘는 세월 동안, 누군가 나를 위해 따뜻한 밥상을 차려놓고 ‘어서 오라’며 기다려준 적이 단 한 번이라도 있었던가. 이 낯설고도 벅찬 온기에 가슴 한구석이 아릿해졌다.
  • “서윤아, 왜 그러니? 어디 안 좋으냐?”
  • 나의 미세한 변화를 알아챈 그가 다정하게 물었다. 나는 애써 고개를 저으며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 “아무것도 아니에요. 배고프네요.”
  • 식사가 중반쯤 이어졌을 때, 내 휴대폰이 요란하게 진동했다. 화면에 뜬 이름은 구진혁. 나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수신 거절을 눌렀다. 하지만 그는 포기를 모르는 듯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어왔다.
  • 결국 나는 미간을 찌푸린 채 전화를 받았다.
  • “무슨 용건이야?”
  • 수화기 너머, 구진혁 씨의 목소리는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다급하고 절박했다.
  • “이서윤…… 너, 너랑 우리 아버지 대체 무슨 사이야? 설마 아니지? 말해봐, 대체 정체가 뭐냐고!”
  • 내가 입술을 떼기도 전이었다. 구 회장님이 자연스럽게 내 휴대폰을 가져가더니 스피커폰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얼음장처럼 차가운 음성으로 전화를 향해 내뱉었다.
  • “이서윤은 내 미래의 아내가 될 사람이다.”
  • 순간, 전화 너머에서 숨이 멎는 소리가 들렸다. 구 회장님의 명령은 칼날처럼 날카롭게 이어졌다.
  • “오늘부터 그녀를 마주치거든, ‘어머니’라고 불러라. 예의를 갖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