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가의 친딸로 판명 나 집안에 발을 들인 첫날이었다. 가짜 상속녀인 강리나는 나를 보자마자 대놓고 눈을 흘기더니, 다짜고짜 내 뺨을 후려쳤다.
매서운 손찌검과 함께 돌아간 고개 사이로 차가운 조소가 박혔다. 첫 만남 기념 선물이라나.
“일찍 오든지 아예 늦게 오든지 하지, 하필 내가 재벌가로 시집가려는 이 타이밍에 기어들어 와? 이서윤, 너 돈에 미쳤니?”
말을 마친 강리나는 약혼자의 팔짱을 낀 채, 블랙카드 한 장을 내 얼굴에 휙 던졌다. 빳빳한 카드의 모서리가 뺨을 긋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서윤, 이거 내 약혼자가 준 거야. 나한테 어떻게든 붙어보려는 그 갸륵한 정성을 봐서 이 폐물, 너한테 적선할게. 난 곧 대한민국 최정상 가문의 안주인이 돼. 앞으로 나한테 아는 척도 하지 마. 우리, 사는 세계가 다르거든.”
그녀가 턱을 치켜세우며 덧붙였다.
“가족이랑 상봉했다고 우쭐대지 마. 내 미래 남편이 누군지는 알아야지? 국내 자산 순위 1위, 성진 그룹의 후계자 구진혁 씨야!”
구진혁은 나를 동정하기는커녕, 옆에서 거들며 비아냥거렸다. 한때 내 약혼자였을지도 모를 남자의 눈에는 오직 경멸만이 가득했다.
“자기야, 이 여자가 네가 말하던 그 평민이야? 우리 집안으로 시집오는 거 알고 재산 좀 나눠 먹으려고 나타났다는 그 여자?”
강리나가 깔깔대며 웃음을 터뜨렸다.
“맞아, 진혁 씨. 바로 얘야. 성진 그룹 수백억 자산 잘 감시해 줘. 앞으로 우리 가문 돈은 단 한 푼도 이 년이랑은 상관없게 말이야.”
뺨이 화끈거렸다. 하지만 아픔보다 더 크게 밀려오는 건 지독한 환멸이었다. 20년 만에 찾은 혈육이라는 이들이 과연 내 가족일까, 아니면 사람의 탈을 쓴 괴물 떼일까.
나는 강리나를 한 번 보고, 그 옆에서 비아냥거리는 구진혁을 눈에 담았다. 그리고 내 편은커녕 가짜 딸과 한강 그룹의 안위만 걱정하며 나를 벌레 보듯 하는 친부모를 차갑게 훑었다.
이 오물 같은 공간에서 내가 할 일은 단 하나뿐이었다. 나는 미련 없이 휴대폰의 전송 버튼을 눌렀다.
곧바로 구진혁의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발신인을 확인한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하얗게 질렸다. 스피커폰 너머로 그의 아버지이자 성진 그룹의 정점인 구 회장의 분노가 천둥처럼 쏟아졌다.
“구진혁! 네 블랙카드 당장 정지시켰다! 그리고 넌 이제부터 호적에서 파였으니 당장 집에서 꺼져!”
“아, 아버지? 갑자기 그게 무슨…….”
“감히 건드려서는 안 될 분을 건드린 대가다! 네놈이 그 입으로 평민이라 모욕한 분이 누군지나 알아? 내 목숨보다 귀한 은인의 자제분이자, 내 유일한 정혼자이신 분이다!”
구진혁이 멍청한 표정으로 굳어버린 순간, 내 휴대폰으로 문자 한 통이 도착했다. 보낸 이는 역시 구 회장이었다.
[서윤아, 너무 노여워하지 마렴. 네 손에 들린 그 보기 흉한 블랙카드는 그냥 쓰레기통에 처박아버려라. 내가 이번에 새로 나온 ‘블랙 다이아몬드 VVIP’ 카드로 직접 보내주마. 전 세계 어디서든 네 마음껏 긁고 다녀도 좋다.]
뒤이어 도착한 메시지는 더 가관이었다.
[한도는 아예 설정하지 않았다. 무제한이니 걱정 말고 편히 쓰거라.]
구진혁의 안색은 이제 하얗다 못해 창백한 푸른빛이 감돌았다. 한때 오만함으로 가득 찼던 그의 얼굴은 급격히 일그러져, 마치 정교하게 빚어진 조각상이 처참하게 금 가는 꼴이었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을 꽉 움켜쥐었다. 방금 들은 아버지의 포효가 환청처럼 귓가를 때리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이 집안의 '가짜 공주님' 강리나는 분위기를 파악할 지능조차 사치였나 보다. 그녀는 여전히 구진혁의 팔에 찰떡처럼 달라붙어 콧소리를 섞어가며 애교를 부렸다.
“진혁 씨, 왜 그래? 아버님이 우리 결혼 축하한다고 하셔? 얼른 대답해 줘, 나 친구들이랑 백화점 가기로 했단 말이야.”
그녀는 승리자의 미소를 지으며 나를 비웃었다. 그 뒤에 버티고 선 내 ‘친부모’라는 작자들도 드디어 그 고매하신 입술을 떼기 시작했다.
엄마, 한수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나를 훈계했다.
“서윤아, 너도 리나를 좀 본받아라. 리나는 어릴 때부터 귀하게 자라서 품위가 남다르잖니. 성진 그룹 후계자를 약혼자로 둔 덕에 우리 한강 그룹 체면이 얼마나 살았는지 아니?”
아버지 한 회장 역시 거들먹거리며 한마디 보탰다.
“그래, 이제 한 식구가 됐으니 사소한 걸로 투정 부리지 마라. 리나가 좀 예민해도 네가 언니니까 무조건 양보하고.”
두 사람의 완벽한 화음 속에 나는 순식간에 '질투에 눈먼 천덕꾸러기'가 되어버렸다. 강리나가 내 뺨을 때리고 카드를 던지며 모욕을 준 사실 따위는 그들에게 안중에도 없었다. 그저 리나가 가져올 '성진 그룹'이라는 배경에만 눈이 멀어 있을 뿐.
나는 바닥에 떨어진 검은 카드를 내려다보며 나직하게 실소를 터뜨렸다.
“양보요? 좋죠. 제가 백번 양보해 드릴게요.”
그제야 충격에서 깨어난 구진혁이 나를 뚫어지게 노려보았다. 그 눈빛은 이제 의구심을 넘어 공포로 변해가고 있었다.
“너…… 정체가 뭐야? 우리 아버지가 대체 왜 너한테…….”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강리나가 짜증스럽게 그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진혁 씨! 얘 그냥 시골에서 온 평민이라니까? 왜 자꾸 상종을 해 줘! 우리 빨리 가자, 쇼핑 늦겠어!”
그 말에 구진혁의 얼굴은 더더욱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강리나의 손을 거칠게 뿌리치고 내게 다가왔다.
“구본혁 회장님이…… 아버지가 대체 왜 너한테 무제한 카드를……!”
“뭐가 그렇게 궁금해?”
나는 고개를 들어 그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아냈다. 입가는 웃고 있었지만, 눈동자는 만년설처럼 차가웠다.
“네 블랙카드가 정지된 거? 아니면 네가 집안에서 파문당한 거?”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거실엔 찬물이 끼얹어졌다. 한수진이 비명을 지르며 내 팔을 부러뜨릴 듯 움켜쥐었다.
“너 지금 무슨 헛소리야! 진혁 씨가 쫓겨나다니! 너 어디서 그런 저질스러운 유언비어를 배워온 거니!”
한 회장 역시 고함을 질렀다.
“이서윤! 당장 진혁 씨와 리나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해!”
그들의 눈엔 오직 경멸뿐이었다. 십수 년 만에 찾은 친딸이 아니라, 집안의 복덩이를 망치려 드는 원수를 보는 듯한 눈빛. 화목한 가족이라는 풍경화 속에서 나 혼자만이 지워버리고 싶은 얼룩이었다. 속에서 뜨거운 쓴물이 울컥 치밀어 올랐다.
스무 해가 넘는 시간 동안 시골바닥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며 버텨온 나였다. 그런데 돌아온 집에서 나를 반기는 건 가짜에게 쏟아지는 사랑과 나를 향한 날 선 비난뿐이라니.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팔을 붙잡은 한수진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사과요? 하죠, 뭐.”
나는 바닥에 떨어진 블랙카드를 주워 들었다. 느긋하게 먼지를 닦아낸 뒤 강리나에게 다가갔다. 강리나는 내가 정말 무릎이라도 꿇을 줄 알았는지 오만한 공작새처럼 턱을 치켜세웠다.
“이제야 분수를 좀 아나 보네.”
그녀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카드를 뺏으려 손을 뻗은 순간이었다.
짝―!
거대한 거실에 고막을 찢는 듯한 마찰음이 울려 퍼졌다. 순식간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나는 움켜쥔 카드의 날카로운 모서리로 강리나의 매끄러운 뺨을 사정없이 후려쳤다. 하얀 피부 위로 붉은 선이 번개처럼 그어졌다.
“이, 이서윤……! 너 미쳤어?!”
강리나가 뺨을 감싸 쥐며 비명을 질렀다.
“이 천한 것이 감히 어디서 손을 놀려!”
한수진이 내 머리채를 잡으려 달려들었지만, 나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피했다. 한 회장 역시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진 채 고함을 질렀다.
“이서윤! 당장 무릎 꿇지 못해!”
사과라니. 나는 나를 집어삼킬 듯 노려보는 ‘친부모’와 모욕감에 떠는 강리나를 보며 차갑게 비웃었다.
“귀한 선물을 받았는데, 답례 정도는 해야 예의 아니겠어요?”
그들이 충격에서 벗어나기도 전에 나는 다시 한번 손을 휘둘렀다.
짝―!
이번엔 더 묵직한 손바닥이 반대쪽 뺨에 정확히 꽂혔다. 완벽한 좌우 대칭이었다.
“방금 건 네 카드로 준 ‘적선’에 대한 보답이고, 이건 아까 네가 내게 날린 손찌검에 대한 대가야. 이제 우리 공평하게 퉁친 거 맞지?”
강리나의 눈에서 결국 눈물이 터져 나왔다.
“아악! 죽여버릴 거야! 당장 저년 죽여버리라고!”
그녀가 미친 듯이 달려들려 했지만, 의외로 구진혁이 그녀를 가로막았다. 그의 눈빛엔 이제 경멸이 아닌, 결코 건드려서는 안 될 포식자를 향한 본능적인 공포가 서려 있었다.
나는 블랙카드를 구진혁의 발치에 툭 던졌다.
“네 여자는 네가 알아서 단속해. 아무나 성진 그룹 이름을 팔며 유세를 떨 자격은 없거든.”
구진혁의 몸이 돌처럼 굳었다. 나는 여전히 씩씩거리는 부모를 향해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저보고 강리나를 좀 봐주라면서요? 시키는 대로 했잖아요. 리나는 한 대 때렸지만, 언니인 저는 통 크게 두 대나 때려줬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양보한 거 아닌가요?”
“이…… 이 독한 년! 당장 저년을 다락방에 가둬! 내 허락 없이는 물 한 모금 주지 마!”
한 회장의 명령이 떨어지자 보디가드들이 달려들어 내 양팔을 붙들었다. 지금은 호랑이굴 한복판인 만큼, 일단은 순순히 끌려가 주기로 했다.
계단을 오르며 뒤를 돌아보았다. 한수진은 울부짖는 강리나를 애지중지 달래고 있었고, 구진혁은 구석에서 사색이 된 채 누군가와 급히 통화 중이었다.
진짜 상속녀인 내가 돌아왔음에도, 이 집안에서 나를 봐주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마치 존재 자체가 거대한 오점인 것처럼. 하지만 상관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