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무거웠고, 손에 든 결과 보고서는 글자로 빽빽했다.
나는 꺼져가는 희망을 붙잡으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의사 선생님... 저를 구해준 게 이상현이라는 사람이에요?”
의사는 대답 대신 참혹한 진실을 전했다.
“선천성 심장병을 앓으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으셨더군요. 평소 과로가 심했던 데다 이번에 차가운 바닷물에 너무 오래 방치되었습니다. 그게 치명적이었어요.”
“결과가... 어떤가요?”
“죄송합니다, 연주 씨. 당장 적합한 심장을 찾아 이식받지 못하시면 지금 상태로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나는 흔들림 없는 대답을 원했다.
“모든 조건이 기적처럼 따라준다고 해도... 길어야 한 달이에요.”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이상현이 들어왔다. 그는 말끔하게 정리된 머리에 고급스러운 진회색 정장 차림이었다. 그의 컨디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였다.
“의사가 하는 말 다 들었어.”
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다시는 그가 내뱉을 뻔한 요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연주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와줘.”
“강씨 그룹의 강주혁, 알지? 그에게 접근해서 투자 계획이 담긴 극비 자료를 가져와 줘. 이건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나은이는 아직 어려서 이런 위험한 일에 자신을 희생할 수 없어. 이건 오직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
지옥 같은 한 달을 선고받은 여자에게 그는 기어이 '희생'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결국 또 유나은 때문이었다.
우리가 함께 보낸 10년의 세월도, 그가 곁에 두고 애지중지하는 어린 비서의 안위보다 가벼웠다.
이상현은 내가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똑똑히 보고도 외면했고, 이제는 죽음을 선고받은 내게서 마지막 한 방울의 가치까지 쥐어짜려 하고 있었다.
그는 늘 유나은만을 금이야 옥이야 감싸 쥐었다. 그녀는 쇼윈도에 세워둘, 화려하고 값비싼 화병이었으니까. 남들에게 과시하려면 흠집 하나 없어야 했을 테니...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었을까. 그 화병에 묻은 얼룩을 닦아내고 뒤처리를 도맡는... 언제든 내다 버릴 수 있는 헌 걸레에 불과했다.
“성공하면 큰돈을 줄게. 남은 날 정도는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거야.”
이상현은 아마 이것이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자비라고 굳게 믿고 있을 터였다.
내 인생의 마지막 한 달이 될지도 모르는 그 소중한 시간조차, 그는 오로지 나를 이용할 궁리뿐이었다.
10년 동안 나를 부려 먹은 이 남자는 끝내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를 '잘 길들여진 도구'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나는 침묵 속에 그를 응시했다. 이 모든 상황이 황당할 만큼 우스웠다. 마치 10년 내내 지독한 술에 취해 있다가, 비로소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맑게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심장을 쥐어짜는 지독한 통증을 악물고 버티며 떨리는 목소리를 갈무리해 대답했다.
“좋아, 할게.”
이상현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다가와 손을 뻗더니 내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다.
이상현은 예전부터 그랬다. 내가 그의 골치 아픈 일을 말끔히 해결해 줄 때마다, 그는 마치 말을 잘 듣는 애완동물을 달래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참 잘했다'는 표식을 남기곤 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 피했다.
이상현의 손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멈췄다. 그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언제나 그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던 내가 감히 그를 거부할 줄은.
이상현은 멋쩍은 듯 손을 거두더니 손끝으로 정장 커프스를 만지작거리며 짐짓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좋아. 구체적인 작전은 비서가 전달할 거야.”
이상현은 그 말만 남긴 채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가 문간에 다다랐을 때, 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상현아.”
이상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미세하게 찌푸려진 미간에는 이미 짜증이 서려 있었다.
“기억나? 네가 예전에 그랬잖아. 내 눈이 제일 좋다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기회를 내 눈은 늘 찾아낸다고.”
그의 표정이 잠깐 멍해졌다. 아마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모양이다.
그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다시 등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불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그래, 이상현. 이 눈으로 네가 한 걸음씩 파멸의 구렁텅이로 기어들어 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봐 주겠어. 내게 남은 마지막 시간 동안, 너에게 바쳤던 나의 모든 재능과 기회를 하나도 남김없이 되찾아 올 거야. 그리고 네가 가진 것이 단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내가 널 완벽하게 무너뜨려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