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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서연주 씨, 깨어나셨네요.”
  •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침대 곁으로 다가왔다. 그의 표정은 한없이 무거웠고, 손에 든 결과 보고서는 글자로 빽빽했다.
  • 나는 꺼져가는 희망을 붙잡으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 “의사 선생님... 저를 구해준 게 이상현이라는 사람이에요?”
  • 의사는 대답 대신 참혹한 진실을 전했다.
  • “선천성 심장병을 앓으면서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으셨더군요. 평소 과로가 심했던 데다 이번에 차가운 바닷물에 너무 오래 방치되었습니다. 그게 치명적이었어요.”
  • “결과가... 어떤가요?”
  • “죄송합니다, 연주 씨. 당장 적합한 심장을 찾아 이식받지 못하시면 지금 상태로는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습니다.”
  • “얼마나 더 살 수 있는지, 정확히 말씀해 주세요.”
  • 나는 흔들림 없는 대답을 원했다.
  • “모든 조건이 기적처럼 따라준다고 해도... 길어야 한 달이에요.”
  • 그때 병실 문이 열리며 이상현이 들어왔다. 그는 말끔하게 정리된 머리에 고급스러운 진회색 정장 차림이었다. 그의 컨디션은 더할 나위 없이 좋아 보였다.
  • “의사가 하는 말 다 들었어.”
  • 나는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다시는 그가 내뱉을 뻔한 요구를 듣고 싶지 않았다.
  • “연주야,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도와줘.”
  • “강씨 그룹의 강주혁, 알지? 그에게 접근해서 투자 계획이 담긴 극비 자료를 가져와 줘. 이건 우리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마지막 기회야. 나은이는 아직 어려서 이런 위험한 일에 자신을 희생할 수 없어. 이건 오직 너만 할 수 있는 일이야.”
  • 지옥 같은 한 달을 선고받은 여자에게 그는 기어이 '희생'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렸다.
  • 결국 또 유나은 때문이었다.
  • 우리가 함께 보낸 10년의 세월도, 그가 곁에 두고 애지중지하는 어린 비서의 안위보다 가벼웠다.
  • 이상현은 내가 차가운 바닷속으로 가라앉는 것을 똑똑히 보고도 외면했고, 이제는 죽음을 선고받은 내게서 마지막 한 방울의 가치까지 쥐어짜려 하고 있었다.
  • 그는 늘 유나은만을 금이야 옥이야 감싸 쥐었다. 그녀는 쇼윈도에 세워둘, 화려하고 값비싼 화병이었으니까. 남들에게 과시하려면 흠집 하나 없어야 했을 테니...
  • 그렇다면 나는 무엇이었을까. 그 화병에 묻은 얼룩을 닦아내고 뒤처리를 도맡는... 언제든 내다 버릴 수 있는 헌 걸레에 불과했다.
  • “성공하면 큰돈을 줄게. 남은 날 정도는 편하게 보낼 수 있을 거야.”
  • 이상현은 아마 이것이 자신이 베풀 수 있는 최고의 자비라고 굳게 믿고 있을 터였다.
  • 내 인생의 마지막 한 달이 될지도 모르는 그 소중한 시간조차, 그는 오로지 나를 이용할 궁리뿐이었다.
  • 10년 동안 나를 부려 먹은 이 남자는 끝내 마지막 순간까지도 나를 '잘 길들여진 도구' 그 이상으로 보지 않았다.
  • 나는 침묵 속에 그를 응시했다. 이 모든 상황이 황당할 만큼 우스웠다. 마치 10년 내내 지독한 술에 취해 있다가, 비로소 찬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맑게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 나는 입꼬리를 살짝 끌어올렸다. 심장을 쥐어짜는 지독한 통증을 악물고 버티며 떨리는 목소리를 갈무리해 대답했다.
  • “좋아, 할게.”
  • 이상현은 내 대답을 듣자마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다가와 손을 뻗더니 내 얼굴을 쓰다듬으려 했다.
  • 이상현은 예전부터 그랬다. 내가 그의 골치 아픈 일을 말끔히 해결해 줄 때마다, 그는 마치 말을 잘 듣는 애완동물을 달래듯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참 잘했다'는 표식을 남기곤 했다.
  •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의 손길이 닿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 피했다.
  • 이상현의 손이 허공에서 어색하게 멈췄다. 그는 상상조차 못 했을 것이다. 언제나 그의 말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던 내가 감히 그를 거부할 줄은.
  • 이상현은 멋쩍은 듯 손을 거두더니 손끝으로 정장 커프스를 만지작거리며 짐짓 태연한 척 입을 열었다.
  • “좋아. 구체적인 작전은 비서가 전달할 거야.”
  • 이상현은 그 말만 남긴 채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가 문간에 다다랐을 때, 나는 낮은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불렀다.
  • “상현아.”
  • 이상현은 뒤를 돌아보았다. 미세하게 찌푸려진 미간에는 이미 짜증이 서려 있었다.
  • “기억나? 네가 예전에 그랬잖아. 내 눈이 제일 좋다고. 남들이 보지 못하는 기회를 내 눈은 늘 찾아낸다고.”
  • 그의 표정이 잠깐 멍해졌다. 아마 자신이 언제 그런 말을 했는지조차 가물가물한 모양이다.
  • 그는 대꾸할 가치도 없다는 듯 다시 등을 돌려 병실을 나갔다.
  • 나는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이불 속에서 주먹을 꽉 쥐었다.
  • ‘그래, 이상현. 이 눈으로 네가 한 걸음씩 파멸의 구렁텅이로 기어들어 가는 모습을 똑똑히 지켜봐 주겠어. 내게 남은 마지막 시간 동안, 너에게 바쳤던 나의 모든 재능과 기회를 하나도 남김없이 되찾아 올 거야. 그리고 네가 가진 것이 단 하나도 남지 않을 때까지, 내가 널 완벽하게 무너뜨려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