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 마음이 찬물을 끼얹은 재처럼 식어버린 나는 천천히 전화를 끊었다.
- 내가 직접 디자인한 프러포즈 반지를 손에 들고 있었지만 행복은커녕 피식 씁쓸한 웃음만 나왔다.
- 김시환과 10년을 함께해 온 만큼 이 남자와 정말 아름다운 미래를 만들고 싶었다.
- 예전에 내가 결혼 얘기를 꺼낼 때마다 늘 굳은 얼굴을 하고 있었지만 그땐 그저 아직 결혼 준비가 안 됐다고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준비가 안 된 게 아니라 자기의 진짜 신부를 못 정했을 뿐이었다.
- 나는 반지를 든 채 멍하니 서 있었다.
- 바로 그때 휴대폰이 또 한 번 울렸다. 휴대폰 화면에 뜬 이름을 본 순간, 나는 자리에 얼어붙었다. 김시환에게서 문자가 온 것이다.
- [옷장에 갈색 코트 하나 있어. 호텔로 가져와.]
- 김시환은 원래부터 내 앞에서 달콤한 말을 하지 않았다. 우리가 정말 뜨겁게 서로를 사랑했을 때조차 ‘사랑해’라는 단어도 딱딱하게 내뱉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번에도 무의식적으로 화해하자는 신호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도 늘 그랬으니까...
- 그래서 밖에서 펑펑 내리는 폭설도 신경 쓰지 않은 채, 그가 보낸 위치로 허겁지겁 달려갔다.
- 문 앞에 서서 심지어 머리까지 정돈했다. 이 순간까지도, 김시환이 한 번만 고개를 숙여주면 난 다 용서하겠다고 마음먹고 있었다. 어쨌든 10년이라는 시간이 쉽게 끊어 낸다고 해서 끝낼 수 있는 게 아니니까.
- 하지만 문이 열리는 순간, 가슴이 얼음장처럼 얼어붙었다.
- 서해나가 수건 하나만 두른 채, 활짝 웃으며 나를 빤히 봤다.
- “고마워, 유민주.”
- 내 손에 있는 코트를 낚아챈 서해나는, 익숙한 손놀림으로 주머니에서 콘돔 몇 개를 꺼냈다.
- 그 순간 나는 벼락이라도 맞은 듯 그대로 굳어버렸다. 표정은 말로 할 수 없을 정도로 굳었다.
- 서해나는 내 안색의 변화를 전혀 못 느낀 척, 쉴 새 없이 계속 떠들었다.
- “역시 이 브랜드가 제일 편하더라. 여긴 파는 데가 없더라고. 지난번에 몇 개 남은 게 있어서 다행이야. 너도 나중에 남친이랑 써봐. 남자는 결국 능력이 중요하거든. 시환 씨가 이런 건 꽤 잘하더라고.”
- 나는 재잘재잘 떠들어대는 서해나의 말이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그저 멍하니 코트만 뚫어지게 바라봤다.
- 며칠 전, 김시환과의 10주년 기념일 때, 그가 입고 있던 게 바로 이 코트였다. 그런데 몇 분도 안 돼 회사에 일이 생겼다며 나 혼자 식당에 두고 가버렸다. 아무것도 모로는 나는 멍청하게 그를 두둔하며 회사 일 힘드니까 다 이해해야지 하며 스스로를 달랬다.
- 그런데 이제 보니 그날 그렇게 바삐 돌아다녔던 이유가 나 몰래 서해나를 만나 섹스하기 위해서였다.
- 그 생각이 든 순간,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터졌다. 비웃음이었다.
- ‘결국 내가 호구였네.’
- 더 이상 이 자리에 있으면 안 된다는 생각에 돌아서서 가려고 했다.
- 그런데 서해나가 불쑥 내 손을 잡아챘다.
- “유민주, 뭐가 그렇게 급해?”
- “가지 말라고? 가지 말고 너희 둘 꽁냥대는 거 여기서 지켜보라고? 서해나, 나 망신 주고 싶은 거 알겠는데, 선은 지키지?”
- 비록 내가 김시환과의 관계를 외부에 공개한 적은 없지만, 워낙 눈치가 빠른 서해나인지라 굳이 더 숨길 것도 없었다.
- 정곡이 찔린 서해나는 얼굴이 확 굳었다.
- 우리는 문 앞에서 서로 손을 잡은 채 팽팽하게 대치했다.
- 바로 그때 막 샤워를 마친 김시환이 욕실에서 나왔다.
- 우리 둘을 본 순간 잠깐 멈칫했지만, 이내 우리를 억지로 떼어놓고 서해나를 자기 뒤로 감쌌다.
- “유민주,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 눈이 벌겋게 달아오른 채 나에게 따지는 김시환은 말투에 나를 책망하는 기색이 가득했다.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김시환 마음속에 지금 상황이 어떻든 분명 내가 잘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 “김시환, 나 아무것도 안 했어. 너희들이야말로 이런 짓 하려면 날 부르질 말았어야지. 너희 둘 앞으로 뭘 하든 관심 없어. 보고 싶지도 않고.”
- 나는 김시환을 똑바로 노려봤다.
- 김시환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나와 서해나 손의 콘돔을 번갈아 보고는 바로 눈치챘다.
- 그러더니 차마 내 얼굴 보기가 구차했는지 시선을 피하더니 한참 후에야 나를 끌고 복도로 나갔다.
- “유민주, 서해나와 싸우지 마. 서해나가 한 말, 악의는 없어. 어릴 때부터 좀 버릇없이 자라서 그래.”
- 다시 입을 뗀 김시환은 목소리가 더욱 부드러워졌다. 하지만 하는 말마다 죄다 서해나를 두둔하는 내용에 나는 속이 뒤집혔다.
- “김시환, 걔가 악의가 있는지 없는지, 너도 다 알잖아. 굳이 억지로 감출 필요 없어. 근데 하나만 부탁할게. 앞으로 이런 사소한 일에 나 부르진 마. 나, 너희 심부름꾼 아니거든.”
- 서해나를 본 순간, 나와 김시환이 다시는 예전으로 못 돌아간다는 걸 알아버렸다.
- 더 이상 이곳에 머물고 싶지 않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고개를 돌렸다.
- 그런데 바로 그때 김시환이 갑자기 내 손을 붙잡았다.
- “유민주, 내가 다 보상할게, 보상하면 되잖아! 우리 회사 실장님과 나의 가장 친한 절친, 장재원. 둘 중 한 명 골라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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