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3화

  • 추악하고 가식적인 그들의 낯짝을 보며, 나는 그저 차갑고 공허한 비소를 흘릴 뿐이었다.
  • 이제 모든 것이 명확해졌다. 그들은 처음부터 나를 놓아줄 생각이 없었다. 그들이 원하는 건 평생 부려 먹을 노예, 영원히 갈아 끼울 수 있는 대역일 뿐이었다.
  • 빵—!!
  • 차고에서 들려오는 날카로운 경적 소리가 팽팽한 긴장감을 깼다. 서준혁의 기사가 기다리다 지쳐 신호를 보낸 것이다.
  • 하지만 나는 이미 지하실에 워크인 냉동창고 안으로 들어가 문을 걸어 잠근 뒤였다.
  • 밖에서는 언니 채린이 대리석 바닥을 구르며 발광하고 있었다. 부모님은 완전히 이성을 잃은 듯했다. 아빠는 구두 신은 발로 두꺼운 철문을 걷어찼고, 엄마는 문밖에서 입에 담지 못할 욕설을 퍼부었다.
  • 비겁한 년, 배은망덕한 년, 쓰레기 같은 년.
  • 나는 온 힘을 다해 차가운 금속 문을 몸으로 막아섰다. 맨발이 타일 바닥에 미끄러졌지만 절대로 물러서지 않았다.
  •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르던 채린이, 내가 끝내 나오지 않자 광기에 어린 눈으로 집사에게 비명을 질렀다.
  • “온도 최대로 낮춰! 당장! 저 년이 안에서 얼마나 버티나 보자고!”
  • 쿠르릉거리는 굉음과 함께 냉각 시스템이 돌아가기 시작했다. 창고 안의 온도가 급격히 곤두박질쳤다.
  • 얇은 실크 슬립 차림인 내 온몸의 모공으로 칼날 같은 추위가 파고들었다. 뼛속까지 시려 왔다. 살갗이 얼어붙은 금속 문에 달라붙어, 조금만 움직여도 살점이 찢겨 나가는 작열통이 느껴졌다.
  • 점점 의식이 흐릿해지며 기분 좋은 마비가 찾아왔다. 기이할 정도로 깊은 평온함이 나를 감싸 안았다.
  • 그래, 내 의지대로 여기서 죽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적어도 그들에게 더럽혀지지 않은 채 깨끗하게 끝낼 수 있을 테니까.
  • 밖에서 들리던 욕설과 발길질 소리가 서서히 잦아들었다. 아마 포기했겠지. 차라리 잘됐다. 이대로 혼자 고요하게 죽게 해줘.
  •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져 더는 뜰 수 없게 되었을 때, 죽음의 문턱이라 확신했던 순간…… 극심한 추위가 조금씩 가시기 시작했다.
  • 칼바람 같던 공기가 분명히, 확실히 따뜻해졌다. 이어 열쇠 꾸러미가 돌아가는 명확한 금속음이 들렸다.
  • 철컥.
  • 문이 열렸다. 어렸을 때부터 내 곁에 있었던 금순 아줌마였다. 문에 반쯤 얼어붙은 채 입술이 파랗게 질린 나를 본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울음을 터뜨렸다.
  • “채은 아가씨! 오, 세상에! 어떻게 이럴 수가!”
  • 그녀는 떨리는 손으로 문에 붙은 내 몸을 조심스럽게 ‘떼어내’ 준비해온 두꺼운 담요로 나를 감싸 안았다. 따뜻한 물을 몇 모금 마시자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 금순 아줌마는 울면서 앞치마 주머니에서 천에 싼 뭉칫돈을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 “채은아, 이건 내가 평생 모은 돈이야. 이거 들고 당장 도망쳐! 아가씨랑 주인님이 널 동남아로 팔아버릴 계획이야!” “지금 다들 서 그룹 만찬회에 갔으니까 뒷문으로 빠져나가! 다시는 돌아오지 마!”
  • 도망? 나는 그녀를 바라보며 쓰라리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어디로 도망칠 수 있을까. 집안 사람들은 물론이고, 서준혁 또한 절대로 나를 놓아주지 않을 텐데.
  • 내게 탈출구 따위는 없었다. 단 한 곳을 제외하고는.
  • 번개 같은 예감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그녀의 손을 잡고 마지막 힘을 다해 쥐어짜듯 말했다.
  • “아줌마, 제발…… 저를 서 회장님 댁으로 데려다주세요!”
  • 서 그룹 본가 연회장. 내가 입구에 나타났을 때, 안은 한창 화기애애한 분위기였다.
  • 단상 위에 선 서 회장이 마이크를 잡고 선언하고 있었다.
  • “오늘 여러분을 모신 이유는, 사고로 몸져누운 내 막내아들 도진이를 돌봐줄 배필을 찾기 위해서입니다.”
  •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듯 장내가 조용해졌다. 이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 “3년 전 사고로 식물인간이 된 서도진?” “산송장이나 다름없다던데. 시집가는 게 아니라 수발들러 가는 거잖아.” “도진 도련님이 죽기라도 하면 평생 수절해야 할 텐데. 아무리 신탁 자금이 엄청나다 해도 자기 인생을 걸 여자가 어디 있겠어?”
  • 서 회장은 대답 없는 객석을 보며 눈빛이 점차 흐려졌다. 그가 애타는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 “정말로…… 단 한 분도 없으십니까?”
  • 침묵만이 흐르는 가운데,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그때, 나는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홀 안으로 걸어 들어가 손을 높이 치켜들었다.
  • “제가 하겠습니다.”
  • 크지 않은 목소리였지만, 정적 속에 잠긴 연회장 안에 명확하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