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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민채린의 매끈한 이마에 붉은 선혈이 배어 나오자, 차진혁은 사색이 되어 그녀를 덥석 안아 들었다.
  • 그는 나를 스쳐 지나가며 오직 짙은 혐오와 실망만이 서린 눈빛을 쏘아붙였다.
  • “한서희, 당신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여자였어? 실망을 넘어 소름이 돋네.”
  • 나는 어느새 물집이 잡혀 욱신거리는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차진혁을 향한 마지막 기대가 비참하게 바스러지는 순간이었다. 예전엔 가시 하나만 박혀도 온 세상을 잃은 듯 걱정하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의 눈에 지금 내 팔의 화상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 비겁하고도 다정했던 눈동자엔 이제 오직 불쌍한 척 굴어대는 내연녀만이 가득했다.
  • 나는 허탈하게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 “전부…… 끝났어.”
  • 응급 처치를 마치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돌아온 집. 공기는 지독하리만치 차가웠다. 하지만 침실에 닿기도 전, 문틈 사이로 외설적인 신음과 노골적인 육성이 흘러나왔다.
  • “아, 진혁 씨! 조금만 더, 천천히……!”
  • 문틈 너머로 들려오는 민채린의 날카로운 교성이 고막을 찔렀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내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차진혁은 민채린의 몸 위에서 짐승처럼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 얼마나 서 있었을까. 나는 기괴한 강박에 사로잡힌 채 그들의 파렴치한 행위가 끝날 때까지 그 모든 소리를 낱낱이 귀에 담았다.
  •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민채린의 다리 사이를 다정하게 닦아주는 차진혁의 모습이었다. 결벽증이 있다며, 나와 관계를 맺은 후에는 늘 나 혼자 욕실로 보내 뒷정리를 하게 했던 남자였다
  •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통증이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몰려왔다.
  • 결벽증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저 나에게만 역겨움을 느꼈던.
  • 민채린이 나를 먼저 발견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차진혁의 목에 팔을 감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 “진혁 씨, 우리가 이러는 거 사모님이 알면 화내시지 않을까요?”
  • 차진혁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 “감히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내가 주는 돈으로 먹고살면서, 차진혁 사모님 소리 계속 듣고 싶으면 알아서 납작 엎드려야지.”
  • 비릿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지난 세월 우리가 쌓아온 감정이 이토록 역겨운 조롱거리였다니. 한참 뒤에야 나를 발견한 차진혁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지만, 그는 곧 오만하게 바닥에 떨어진 속옷 한 장을 발로 툭 차며 던졌다.
  • “채린이 팬티가 좀 더러워졌네. 당신이 깨끗하게 빨아와.”
  • 차진혁과 함께한 뒤로 그의 속옷은 늘 내 손으로 직접 빨았다. 곱게 자란 내 손은 오직 그를 위해 궂은일을 자처해 왔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가 내게 무엇을 시키는 건가?
  • 나는 발치에 떨어진 속옷을 그대로짓이겨 밟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 “차진혁, 이혼해.”
  • 차진혁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코웃음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 “이혼? 고작 이런 일로 이혼하겠다고? 제정신이야?”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은 난도질당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 더러워진 관계라면, 필요 없다.
  • “한서희, 채린이를 다치게 한 건 당신이야! 난 상처받은 채린이를 달래주려고 집으로 데려온 거라고. 고작 속옷 한 장 빨아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당신, 언제부터 이렇게 속 좁은 여자였어?”
  • 속이 좁아고?
  •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 자신의 눈앞에서 남편이 외도하는 걸 견딜 수 있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 남편이 상간녀와 우리 침대에서 뒹구는 걸 지켜봐야 하는 아내의 심정을 누가 알까.
  • 안방 침대 머리맡에 걸린 웨딩사진이 지독하게도 가식적이었다.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몸을 돌리려던 찰나, 내 손의 붕대를 발견한 차진혁이 다급히 다가와 내 손을 붙잡았다.
  • “당신 손이 왜 이래? 당장 병원 가자.”
  • 그 손을 뿌리치려던 찰나, 민채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 “아앗! 진혁 씨, 배…… 배가 너무 아파요!”
  • 차진혁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내 손을 팽개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민채린은 나를 향해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신음했다.
  • “아까 대표님이 너무 거칠게 하셔서 그런가 봐요…… 밑이 아파요, 피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 그 말에 눈먼 짐승처럼 차진혁은 민채린을 안아 들고 밖으로 돌진했다. 그 과정에서 내 어깨를 거칠게 치고 나갔고, 부상당한 팔에 다시 한번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차진혁은 뒤를 돌아보며 잠시 망설이더니 차갑게 툭 던졌다.
  • “한서희, 당신은 이미 치료받았잖아. 채린이부터 병원에 데려다주고 올게.”
  • 서둘러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내 마음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내가 정성껏 꾸몄던 이 집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나는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미련 없이 그 지옥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