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채린의 매끈한 이마에 붉은 선혈이 배어 나오자, 차진혁은 사색이 되어 그녀를 덥석 안아 들었다.
그는 나를 스쳐 지나가며 오직 짙은 혐오와 실망만이 서린 눈빛을 쏘아붙였다.
“한서희, 당신 정말 이 정도밖에 안 되는 여자였어? 실망을 넘어 소름이 돋네.”
나는 어느새 물집이 잡혀 욱신거리는 팔을 힘없이 늘어뜨렸다. 차진혁을 향한 마지막 기대가 비참하게 바스러지는 순간이었다. 예전엔 가시 하나만 박혀도 온 세상을 잃은 듯 걱정하던 남자였다. 그런 남자의 눈에 지금 내 팔의 화상 따위는 보이지도 않는 모양이었다. 그 비겁하고도 다정했던 눈동자엔 이제 오직 불쌍한 척 굴어대는 내연녀만이 가득했다.
나는 허탈하게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읊조렸다.
“전부…… 끝났어.”
응급 처치를 마치고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돌아온 집. 공기는 지독하리만치 차가웠다. 하지만 침실에 닿기도 전, 문틈 사이로 외설적인 신음과 노골적인 육성이 흘러나왔다.
“아, 진혁 씨! 조금만 더, 천천히……!”
문틈 너머로 들려오는 민채린의 날카로운 교성이 고막을 찔렀다. 문고리를 잡으려던 내 손이 그대로 굳어버렸다.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차진혁은 민채린의 몸 위에서 짐승처럼 거칠게 몰아붙이고 있었다
얼마나 서 있었을까. 나는 기괴한 강박에 사로잡힌 채 그들의 파렴치한 행위가 끝날 때까지 그 모든 소리를 낱낱이 귀에 담았다.
마침내 문이 열렸을 때, 내 눈에 들어온 건 민채린의 다리 사이를 다정하게 닦아주는 차진혁의 모습이었다. 결벽증이 있다며, 나와 관계를 맺은 후에는 늘 나 혼자 욕실로 보내 뒷정리를 하게 했던 남자였다
심장이 난도질당하는 통증이 아까보다 더 선명하게 몰려왔다.
결벽증이 있었던 게 아니라, 그저 나에게만 역겨움을 느꼈던.
민채린이 나를 먼저 발견했다.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차진혁의 목에 팔을 감으며 애교 섞인 목소리로 속삭였다.
“진혁 씨, 우리가 이러는 거 사모님이 알면 화내시지 않을까요?”
차진혁은 그녀의 뺨에 입을 맞추며 태연하게 대꾸했다.
“감히 누가 누구한테 화를 내? 주제 파악도 못 하고. 내가 주는 돈으로 먹고살면서, 차진혁 사모님 소리 계속 듣고 싶으면 알아서 납작 엎드려야지.”
비릿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지난 세월 우리가 쌓아온 감정이 이토록 역겨운 조롱거리였다니. 한참 뒤에야 나를 발견한 차진혁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지만, 그는 곧 오만하게 바닥에 떨어진 속옷 한 장을 발로 툭 차며 던졌다.
“채린이 팬티가 좀 더러워졌네. 당신이 깨끗하게 빨아와.”
차진혁과 함께한 뒤로 그의 속옷은 늘 내 손으로 직접 빨았다. 곱게 자란 내 손은 오직 그를 위해 궂은일을 자처해 왔다. 그런데 지금, 이 남자가 내게 무엇을 시키는 건가?
나는 발치에 떨어진 속옷을 그대로짓이겨 밟으며 차갑게 내뱉었다.
“차진혁, 이혼해.”
차진혁은 멍한 표정을 짓더니 이내 코웃음을 치며 소리를 질렀다.
“이혼? 고작 이런 일로 이혼하겠다고? 제정신이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가슴은 난도질당했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단호했다.
더러워진 관계라면, 필요 없다.
“한서희, 채린이를 다치게 한 건 당신이야! 난 상처받은 채린이를 달래주려고 집으로 데려온 거라고. 고작 속옷 한 장 빨아주는 게 그렇게 힘들어? 당신, 언제부터 이렇게 속 좁은 여자였어?”
속이 좁아고?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자신의 눈앞에서 남편이 외도하는 걸 견딜 수 있는 여자가 어디 있을까? 남편이 상간녀와 우리 침대에서 뒹구는 걸 지켜봐야 하는 아내의 심정을 누가 알까.
안방 침대 머리맡에 걸린 웨딩사진이 지독하게도 가식적이었다. 더는 말을 섞고 싶지 않아 몸을 돌리려던 찰나, 내 손의 붕대를 발견한 차진혁이 다급히 다가와 내 손을 붙잡았다.
“당신 손이 왜 이래? 당장 병원 가자.”
그 손을 뿌리치려던 찰나, 민채린의 비명이 울려 퍼졌다.
“아앗! 진혁 씨, 배…… 배가 너무 아파요!”
차진혁은 일말의 주저도 없이 내 손을 팽개치고 그녀에게 달려갔다. 민채린은 나를 향해 승리자의 미소를 지어 보이며 신음했다.
“아까 대표님이 너무 거칠게 하셔서 그런가 봐요…… 밑이 아파요, 피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말에 눈먼 짐승처럼 차진혁은 민채린을 안아 들고 밖으로 돌진했다. 그 과정에서 내 어깨를 거칠게 치고 나갔고, 부상당한 팔에 다시 한번 극심한 통증이 몰려왔다. 차진혁은 뒤를 돌아보며 잠시 망설이더니 차갑게 툭 던졌다.
“한서희, 당신은 이미 치료받았잖아. 채린이부터 병원에 데려다주고 올게.”
서둘러 떠나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내 마음은 완전히 얼어붙었다. 내가 정성껏 꾸몄던 이 집을 마지막으로 눈에 담았다. 나는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미련 없이 그 지옥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