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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 나는 병원으로 끌려왔다.
  • 그런데 도착한 곳은 병실이 아니었다.
  • 환자 접견실.
  • 최유리는 환자복 차림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핏기 하나 없는 얼굴에,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한 기색까지 완벽했다.
  • 나를 보자마자 그녀는 기다렸다는 듯 미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 “지수 언니, 미안해.”
  • “도진 씨가 언니를 이렇게 데려올 줄은 몰랐어.”
  • 말끝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눈가가 붉어졌다.
  • “다 내 탓이야.”
  • “내가 아프지만 않았어도…”
  • 그녀는 일부러 말을 흐렸다.
  • 울음을 겨우 참는 사람처럼 입술까지 깨물었다.
  • “도진 씨도 이렇게까지 언니를 몰아붙이진 않았을 텐데…”
  • 기가 막혔다.
  • 저토록 가련하고, 저토록 미안한 얼굴.
  • 누가 보면 내가 사람 하나 잡아먹은 악인이라도 되는 줄 알겠다.
  • 김도진은 곧장 최유리에게 다가갔다.
  • 그리고 망설임도 없이 그녀를 끌어안았다.
  • “유리, 그렇게 말하지 마.”
  •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 내게는 단 한 번도 들려준 적 없는 온도.
  • “이건 네 잘못 아니야.”
  • 그는 그렇게 최유리를 달랜 뒤,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그리고 나를 봤다.
  • 방금 전까지 다정하던 눈빛이, 내 쪽으로 향하는 순간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
  • “한지수, 유리한테 사과해.”
  • 나는 그대로 굳어 버렸다.
  • 나보고 사과하라고?
  • 내가 뭘 잘못했다고.
  • “몸도 안 좋은 애한테 네가 또 자극했잖아.”
  • “불쌍한 척하면서 사람 죄책감이나 건드리고.”
  • 김도진의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정말 질린다.”
  • 둘이 서로 끌어안고 있는 모습이 눈을 찔렀다.
  • 결혼한 지난 3년 동안, 김도진은 나를 저런 식으로 안아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 손을 잡아준 적조차 손에 꼽을 정도였다.
  • 나는 그가 원래 그런 사람인 줄 알았다.
  • 차갑고, 무심하고, 누구에게도 다정하지 못한 사람.
  • 그런데 아니었다.
  • 그의 다정함은 없는 게 아니라, 애초부터 다른 여자 몫이었다.
  • 나는 그저 치워야 할 존재였을 뿐이다.
  • 눈엣가시였고, 거치적거리는 장애물이었고, 필요할 때 꺼내 쓰는 소모품이었다.
  • 순간 위가 다시 한번 세게 비틀렸다.
  • 나는 숨을 죽인 채 배를 꾹 눌렀다.
  • 그리고 차갑게 입을 열었다.
  • “내 신장을 가져가려는 건 너희잖아.”
  • “그런데 내가 왜 사과해야 해?”
  • 최유리는 김도진 품 안에 안긴 채, 아주 잠깐 입꼬리를 올렸다.
  • 정말 찰나였다.
  • 하지만 나는 똑똑히 봤다.
  • 곧이어 그녀의 목소리에 금세 울음기가 실렸다.
  • “도진 씨, 언니 탓하지 마.”
  • “언니도 일부러 그런 건 아닐 거야.”
  • “다 내 몸이 문제라서…”
  • 말이 끝나자마자 그녀는 갑자기 심하게 기침하기 시작했다.
  •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사람처럼.
  • “유리!”
  • 김도진의 얼굴빛이 순식간에 변했다.
  • 그는 다급히 최유리의 등을 감싸 안고 몇 번이고 쓸어내렸다.
  • 그리고 다시 나를 돌아봤다.
  • 그 눈빛엔 노골적인 분노가 서려 있었다.
  • “한지수, 꼭 사람 죽여야 속이 시원해?”
  • 나는 그를 바라봤다.
  • 끝까지 내 고통은 외면한 채, 다른 여자만 감싸고도는 남자를.
  • 그런데 이상하게도 더는 아프지 않았다.
  • 이미 다 타버린 뒤의 재처럼, 안은 텅 비어 있었다.
  • “그래.”
  • 내 대답은 담담했다.
  • 김도진의 눈빛이 서늘하게 가라앉았다.
  • 그래.
  • 어차피 그는 이미 나를 악독한 여자로 정해 놨다.
  • 그렇다면 굳이 아니라고 매달릴 필요도 없었다.
  • “맞아.”
  • “내가 그랬어.”
  • 김도진은 최유리를 놓고 천천히 내 쪽으로 걸어왔다.
  • 한 걸음.
  • 또 한 걸음.
  • 그가 가까워질수록 공기가 팽팽하게 조여 왔다.
  • “다시 말해 봐.”
  • 나는 등을 곧게 편 채 그를 정면으로 마주봤다.
  • “그래.”
  • “내가 그랬다고.”
  • 찰싹.
  • 커다란 소리와 함께 고개가 옆으로 꺾였다.
  • 뺨이 순식간에 불에 덴 듯 타올랐다.
  • 입안 가득 비릿한 쇠맛이 번졌다.
  • 입술 안쪽이 터진 모양이었다.
  • 눈앞이 잠깐 새하얘졌다.
  • 귓가에선 윙윙거리는 소리만 울렸다.
  • 김도진이 나를 때렸다.
  • 최유리 때문에.
  • 나를 때렸다.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돌려 다시 그를 바라봤다.
  • 그의 손은 아직 허공에 남아 있었다.
  • 눈 속의 분노는 조금도 가라앉지 않은 채였다.
  • “한지수.”
  • “네가 자초한 일이야.”
  • 그 목소리는 차갑다 못해 잔인했다.
  • 나는 소리 없이 웃었다.
  •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 입가에 번진 피와 뒤섞여 짜고 쓰게 스며들었다.
  • “김도진.”
  • 나는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글자씩 또렷하게 말했다.
  • “우리 끝이야.”
  • 그 말을 남기고 몸을 돌렸다.
  • 비틀거리는 다리로 접견실을 빠져나왔다.
  •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바닥이 휘청거렸다.
  •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다.
  • 다만 분명한 건 하나였다.
  • 저 둘이 있는 곳에는 더 이상 단 한순간도 있고 싶지 않았다.
  • 숨이 막혔다.
  • 복도로 나오자마자 나는 벽을 짚었다.
  • 천지가 빙글빙글 돌았다.
  • 시야가 까맣게 잠식되기 시작했다.
  • 그대로 무너져 내릴 것 같던 순간—
  • “괜찮으세요?”
  • 낮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 동시에 누군가의 손이 내 몸을 재빨리 붙들었다.
  • 나는 간신히 눈을 들어 그 사람을 바라봤다.
  • 흰 가운.
  • 금테 안경.
  • 단정한 인상에 차분한 눈빛.
  • 이전에 내 검사를 맡았던 의사였다.
  • 정우진.
  • “괜찮아요…”
  • 나는 겨우 몸을 가누며 섰다.
  • 정우진은 부어오른 내 뺨과 입가에 맺힌 핏자국을 보고 미간을 살짝 좁혔다.
  • “괜찮아 보이진 않는데요.”
  • 목소리는 조심스러웠지만, 눈빛은 단번에 심각해졌다.
  • “검사부터 받으셔야겠습니다.”
  •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 그리고 가방에서 구겨질 대로 구겨진 검사 결과지를 꺼내 그에게 내밀었다.
  • “괜찮아요, 선생님.”
  • “제 몸 상태는… 제가 알아요.”
  • 정우진은 말없이 결과지를 받아 들었다.
  • 종이를 펼친 그의 눈빛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