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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나는 차가운 눈밭 위에서 끝내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를 맞이한 것은 익숙한 침실의 공기였다.
  • 하지만 완전히 눈을 뜨기도 전에 공기를 가르는 거친 마찰음과 노골적으로 젖은 소리가 고막을 사정없이 때려왔다.
  • 내 몸은 순식간에 돌처럼 굳어버렸다. 눈을 뜨는 순간 모든 걸 마주해야 할 것 같아 속눈썹이 떨릴 만큼 눈을 꽉 감았다.
  • 한지호의 낮은 신음과 신민아의 가쁜 숨소리가 번갈아 들려올 때마다,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눈물은 소리 없이 흘러내려 베개를 서서히 적셔갔다.
  • 나는 알고 있다. 이 모든 게 한지호가 꾸민 짓이라는 걸.
  • 그는 일부러 내가 잠들어 있는 이 방에서... 내가 듣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신민아와 몸을 섞고 있는 것이다.
  • 나와는 그 어떤 가능성도, 일말의 여지도 없다는 것을... 내 영혼에 낙인을 찍듯 그렇게 노골적이고 잔인한 방식으로 드러내고 있었다.
  • 그 기괴한 정사가 얼마나 오래 이어졌는지 모르겠다. 그들이 비릿한 향취를 남기며 방을 떠날 때쯤엔 머리맡의 베개 두 개가 전부 내 눈물로 젖어 있었다.
  •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켜 침대 밑으로 내려왔다. 떨리는 손으로 가방 속에서 진통제를 꺼내 물도 없이 입안에 털어 넣었다.
  • 암세포가 갉아 먹는 위장은 여전히 칼로 휘젓는 듯한 통증을 내뱉고 있었다. 나는 흐릿해지는 정신을 붙잡으며 몸에 늘 지니고 다니던 노트를 꺼내 들었다.
  • 그 노트엔 내 유언과도 같은 소원 두 가지가 적혀 있었다.
  • 첫째, 한지호 한 번만 더 보기.
  •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 문장 위에 줄을 그어버렸다. 이미 이뤄졌지만 차라리 이뤄지지 말아야 했을 소원이었다.
  • 뒤틀렸던 위장의 통증이 겨우 잦아들었을 무렵, 거실에서는 저녁 식사가 한창이다.
  • 식탁 위를 점령한 자극적인 매운 음식 냄새가 코끝을 확 찔렀다. 숨을 들이마실 때마다 속이 울렁거려 비명이 터질 것만 같았다.
  • 나는 핏기 하나 없이 하얗게 질린 얼굴로 식탁 끝자락에 앉았다. 신민아가 가식적인 미소를 띠며 내 앞으로 접시 하나를 내밀었다. 그 위에는 시뻘건 양념에 버무려진 고기들이 가득했다.
  • “은비야, 너 몸이 왜 이렇게 말랐어? 고기 좀 많이 먹어 둬.”
  • 나는 접시에 놓인 고기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포크를 쥘 기력조차 없었기에 마지막 동아줄을 붙잡는 심정으로 한지호를 바라봤다.
  •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내가 매운 음식을 전혀 못 먹는다는 사실을. 하물며 지금은 위암이 온몸을 갉아 먹고 있는 상태였다.
  • 이 고기를 삼키는 건 독을 삼키는 것과 다름없었고, 정말 그대로 죽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 하지만 내가 입을 열기도 전에 신민아가 먼저 억울하다는 듯 눈시울을 붉히며 가로챘다.
  • “은비야, 너 아직도 나를 싫어해서... 내가 정성껏 준비한 음식도 안 먹으려는 거야?”
  • “아뇨, 그게 아니라...”
  • 병명을 차마 입에 올리지 못한 채 변명을 시작하려던 그 순간 한지호의 서늘한 목소리가 내 말을 가차 없이 끊어버렸다.
  • “토 달지 마. 이제부터 민아는 네 숙모가 될 사람이야. 어른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먹어.”
  • ‘숙모’라니... 그 잔인한 호칭이 심장에 깊이 박혔다. 온몸의 힘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 나는 자조적인 미소를 지으며 떨리는 손으로 고기를 포크로 찍었다.
  • 그래, 한지호. 네 눈엔 오직 신민아뿐이지.
  • 내가 매운 걸 입에도 못 댄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면서도 그녀의 기분을 위해서라면 나에게 독이라도 억지로 먹일 사람이니까.
  • 시뻘건 양념이 식도를 타고 위장까지 날카롭게 내려갔다. 겨우 가라앉았던 위벽이 다시 뒤집히며 칼로 쥐어뜯는 듯한 통증이 몰려왔다.
  • 굵은 땀방울이 탁자 위로 툭툭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결국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입안의 것을 모조리 토해내고 말았다.
  • 그 모습을 본 신민아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의 눈빛에는 숨길 수 없는 역겨움이 가득했다.
  • 한지호는 얼굴을 잿빛으로 굳힌 채 포크를 탁자 위에 탁 내려놓았다.
  • “나은비, 해외에 나가 있던 3년 동안 예의라는 걸 통째로 잊어버린 모양이네. 오늘 이 접시 다 비울 때까지 여기서 한 발짝도 못 나갈 줄 알아!”
  • 그는 냉정하게 내뱉고는 신민아를 챙겨 자리를 떠났다.
  • 남겨진 김태건은 음침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노려보더니, 커다란 접시에 담긴 고기를 내 입속으로 사정없이 쑤셔 넣기 시작했다.
  • 나는 저항할 힘조차 없었다. 배를 뒤엎는 극심한 고통과 함께 그대로 정신을 잃고 까무러쳤다.
  • 다시 눈을 떴을 때는 병원이었다.
  • 하얀 가운을 입은 의사가 한지호를 호되게 나무라고 있는 소리가 들렸다.
  • “환자 상태를 보고도 이런 매운 음식을 먹게 방치하다니요! 이 환자분은 이미...”
  • 의사의 말에 나는 가슴이 터질 듯 조여들었다.
  • 그 결정적인 순간 갑자기 신민아가 날카로운 비명을 질렀다. 내 침상 곁에 서 있던 한지호는 마치 용수철처럼 튀어 오르듯 그녀에게 달려갔다.
  • 그 바람에 의사는 뒷말을 끝내지 못했다. 이내 그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나를 가련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 “대체 저 사람, 은비 씨랑 어떤 사이입니까? 어떻게 보호자라는 사람이 환자 상태에 이토록 무심할 수가 있죠!”
  • 나는 허탈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애원하는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며 입술을 뗐다.
  • “선생님... 제발 부탁드려요. 그 사람한테는 절대 말하지 말아 주세요. 제 몸 상태는... 제가 제일 잘 알아요.”
  • 의사는 길게 탄식을 내뱉었다.
  • “남들이 몰라줘도 당신만큼은 스스로를 챙겨야죠. 은비 씨가... 이제 길어야 한 달밖에 안 남았단 말입니다.”
  • 그 말에 눈시울이 뜨겁게 뻐근해졌다. 말로 다 표현할 수 없는 억울함이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들끓어 올랐다.
  • 면식도 없는 남조차 나를 이토록 걱정해 주는데 내가 십수 년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해 온 한지호는 의사의 진단 결과 한마디조차 끝까지 들어줄 여유가 없었다.
  • 서러움이 채 가시기도 전, 휴대폰에 뜬 뉴스 알림 한 줄이 나를 산 채로 지옥 밑바닥에 내동댕이쳤다.
  • 3년 전, 내가 처참하게 괴롭힘 당했던 그날의 사진들이 온 인터넷에 유포된 것이다. 하지만 붙여진 제목은 가혹하기 짝이 없었다.
  • [삼촌을 향한 추악한 짝사랑, 뜻대로 안 되자 숙모의 남동생까지 유혹한 여자]
  • 순식간에 SNS와 각종 커뮤니티는 나를 향한 입에 담지 못할 욕설로 도배되었다.
  • 퇴원 수속도 제대로 밟지 못한 채 병원 복도를 지나가고 있을 때 누군가 나를 알아보고 크게 소리쳤다.
  • 이윽고 사람들은 정의의 사도라도 된 양 내게 달려들었다. 그들은 나를 밀쳐 넘어뜨리더니 연달아 내 뺨을 후려쳤다.
  • “천하에 다시없을 불여시 같으니라고! 감히 자기 삼촌을 마음에 품어? 낯짝이 얼마나 두꺼우면 이런 짓을 해!”
  • “거기다 모자라서 남의 남동생까지 꼬셔냈대. 진짜 구역질 난다. 세상에 별의별 인간이 다 있다지만 이건 선을 넘었지.”
  • “근데 사진 보니까 몸매는 꽤 잘 빠졌던데? 지금 몰골은 왜 이 모양이야?”
  • “죄를 하도 많이 지어서 벌 받는 중인가 보지. 이런 년은 그냥 죽어도 싸!”
  • “아니에요. 아니라고!”
  • 나는 비명을 삼키며 두 팔로 머리를 꽉 감싸안았다. 터진 입술 사이로 비릿한 피가 철철 흘러넘쳤다. 그 아수라장 속에서 누군가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가 쐐기를 박듯 들려왔다.
  • “내가 저년 삼촌이라면 이런 더러운 애는 쳐다도 안 봤을 거야.”
  • “아니야! 내가 유혹한 적 없어! 그 자식이 강제로 날 덮친 거라고! 그놈이 나를...”
  • 악을 쓰며 내지른 비명은 그들 눈엔 그저 추악한 변명일 뿐이었다.
  • 누군가는 가래 섞인 침을 내 몸에 탁 뱉어냈고 나는 그 자리에서 완전히 오물 취급을 받으며 짓밟혔다.
  • 그때 인파 너머로 한지호의 모습이 보였다.
  • 그는 겁에 질린 듯한 신민아를 조심스럽게 부축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엔 나를 향한 지독한 경멸과 냉기만이 서려 있다.
  • 나는 마지막 남은 힘을 쥐어짜 피투성이가 된 손을 그에게 뻗었다.
  • “삼촌... 제발, 나 좀 도와줘요... 제발요...”
  • 하지만 그는 내 처절한 부름을 듣고도 힐끗 비웃음을 던질 뿐 아무렇지 않게 신민아를 부축해 차 뒷좌석에 태웠다.
  • 엔진 소리와 함께 그가 멀어지는 순간 내 가슴 속에 간신히 붙어 있던 마지막 생명의 불꽃마저 완전히 꺼져버렸다.
  • 나는 더는 버티지도 반박하지도 않았다. 그저 매질과 욕설을 고스란히 받아내며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 ‘분명 짓밟힌 피해자는 나인데... 왜 이 모든 죄의 대가를 내가 다 떠안아야 하는 걸까.’
  • 터진 입술 사이로 힘없는 실소가 새어 나왔다.
  • ‘그래... 내 유일한 잘못은 사랑해서는 안 될 사람을... 짐승보다 못한 너를 사랑해 버린 거였겠지. 한지호, 이제 끝이야. 난 더는 너를 사랑하지 않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