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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생일 축하해

  • 벽시계가 일곱 시를 가리키자, 이소영은 식탁으로 성큼성큼 가서 반찬을 하나하나 정갈하게 놓았다.
  • 이 집 식구들이 곧 내려올 거라서 저녁은 절대 늦추면 안 된다.
  • 시간 맞춰 못 차리면, 그날부터 고생길이 열리는 거니까.
  •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불안한 마음을 꾹 눌렀다.
  • 저녁 준비는 늘 머리를 더 써야 했다.
  • 이주원은 맨날 다이어트 중이라 채소 수프에 샐러드랑 과일을 곁들여야 하고, 계모 나혜진은 달걀 카레에 밥을 좋아한다.
  • 아버지는 기름기 있는 건 아예 못 먹는다.
  • 이소영이 칼같이 맞춰서 준비하지 않으면, 뒷일이 심각해진다.
  • 이소영은 식탁을 쓱 훑어보며 모든 게 제대로 됐는지 확인했다.
  • 땡, 벽시계가 또 시간을 알리고 곧이어 발소리가 울렸다.
  • 그녀는 고개를 돌려 계단을 바라봤다.
  • 심장이 쿵, 쿵, 빨라졌다.
  • 이주원과 엄마가 먼저 내려오며 수다를 떨었다.
  • 이소영을 훑는 그 비웃는 눈길도, 이제 새삼스럽지 않다.
  • 곧 아버지도 내려왔고, 셋은 자리에 앉았다.
  • 아버지는 가운데, 나혜진과 이주원이 양옆.
  • 이소영은 조용히 옆에 서 있었다.
  • 셋은 각자 먹고 싶은 것만 골라 담아, 아무 말 없이 젓가락을 놀렸다.
  • 방 안은 숨 막히게 고요했다.
  • 간간이 그릇 부딪치는 소리만 찌르르 났다.
  • 이 시간이 끝도 없이 늘어지는 느낌이었다.
  • 음식 냄새가 코를 간질이고, 이소영의 배에서는 꼬르륵 소리가 터졌다.
  • 입안에 침이 고이는 걸 참아가며, 그냥 저녁이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 그녀는 늘 남은 음식으로 배를 채우면서도, 그래도 이 집에서 잘 곳과 먹을 걸 주는 것엔 감사해야 한다고 스스로 다독였다.
  • 드디어 저녁이 끝났다.
  • 식탁 위엔 음식이 꽤 남았다.
  • 이소영은 재빠르게 식탁을 치우고, 그릇을 씻어 식기세척기에 넣었다.
  • 남은 음식을 접시에 담아 부엌 구석으로 쓱 숨어들었다.
  • 첫 숟갈을 막 뜨려는 순간, 익숙한 목소리가 그녀를 불러 세웠다.
  • "소영아, 당장 내 방으로 와."
  • 나혜진이었다.
  • 그녀는 접시에 덮개를 덮어 놓고 허둥지둥 자리에서 일어났다.
  • 계모 말 어기는 대가는, 감당할 수가 없다.
  •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걸 겨우 누르며, 이소영은 나혜진 방 앞에 서서 살짝 두드린 뒤 문을 밀고 들어갔다.
  • 이복언니 이주원, 계모 나혜진, 그리고 아버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 표정이 싸늘했다.
  • 큰일을 얘기하려는 얼굴이었다.
  • "소영아, 들어와."
  • 아버지가 차갑게 말했다.
  • 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 이 집에선 그들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 "왜 그렇게 꾸물대니?"
  • "이 집 규칙, 네가 제일 잘 알잖아."
  • 이소영의 온몸에 전기가 오는 듯 떨림이 번졌다.
  • 그녀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스스로가 작아지고 하찮아지는 느낌이었다.
  • "일주일 뒤, 넌 박재언과 결혼한다."
  • "그런 집안에 시집가게 됐으면 감사할 줄 알아."
  • 아버지가 불쑥 선언했다.
  • 이소영의 두 눈이 크게 벌어졌다.
  • 세상이 와르르 무너지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것 같았다.
  • 박재언이 누군지도 모른다.
  • 어떻게든 도망칠 방법이 있을까, 자신에게 선택권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긴 할까,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 "신부는 이주원이 아니었어요?"
  • 이주원은 손톱을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 "그 인간 바람둥이잖아."
  • "결혼도 딱 3년짜리래."
  • "난 싫어."
  • 나혜진이 한숨을 쉬었다.
  • "그래도 회사 협력을 위해선 혼인이 필요해."
  • "그래서 우리가 너한테 그동안 공 들인 거야."
  • "거래에 쓸모 있는 말판의 졸이 되게 하려고."
  • 이소영은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 가족이 자기 이야기를 '물건'처럼 하고 있었다.
  • 아버지는 그녀를 사업을 위한 칩으로만 봤다.
  • 자신의 인생 전체가, 그들의 판 위를 굴러다니는 도구였다는 사실이 뼈에 사무쳤다.
  • 그녀는 숨을 깊게 들이마시고, 난생처음 용기를 쥐어짜냈다.
  • "아버지, 제발 그 집안에 저를 밀어 넣지 마세요."
  • "내일이면 저 스무 살이에요."
  • "더 이상 아버지 짐으로 살지 않을게요."
  • "제 인생을 살 기회를 한번만 주세요."
  • 하지만 돌아온 건 아버지의 얼음장 같은 얼굴뿐이었다.
  • "이미 결정했다."
  • "넌 박재언과 결혼하는 것 외엔 선택지가 없어."
  • "난 네가 싫다."
  • "내 인생을 망친 그 년의 딸이니까."
  • "이건 네 엄마가 남긴 빚 갚는다고 생각해."
  • "3년 계약 끝나면, 그때는 자유니까."
  • 아버지의 눈엔 역겨움이 가득했다.
  • 친아버지조차 그녀가 어떻게 사는지 하나도 관심이 없는데, 또 누굴 믿을 수 있을까.
  • 이소영은 그날, 하나를 확실히 배웠다.
  • 아무도 믿지 마.
  • 이주원은 그녀보다 세 살 많다.
  • 알고 보니 아버진 엄마가 살아 있을 때부터 이미 이주원을 두고 있었다.
  • 아버지는 줄곧 나혜진을 사랑했고, 할머니 할아버지의 압박에 못 이겨 엄마와 결혼했을 뿐이었다.
  • 엄마가 세상을 떠나자마자, 아버지는 곧장 나혜진과 재혼했고, 둘을 이 집으로 들였다.
  • 나혜진이 손을 툭 내저어 대화를 끝냈다.
  • "나가도 돼."
  • "내일부터 결혼 준비 시작해."
  • "그런 집안에 시집가게 됐으면, 하늘이 도왔다고 생각해."
  • 입가에 감추지 못한 득의의 웃음이 떠올랐다.
  • 나혜진은 몰랐다.
  • 이소영은 그런 집안에 들어가는 일에, 손톱만큼의 관심도 없다는 걸.
  • 그녀는 엄마가 어떻게 죽어갔는지 두 눈으로 봤다.
  • 괴롭힘에 질식하듯 끝까지 몰렸다.
  • 그날 이후 그녀는 믿었다.
  • 돈 많은 남자들?
  • 다 똑같다.
  • 피도 눈물도 없는 괴물들.
  • 이소영은 천천히 부엌으로 돌아왔다.
  • 접시에 밥이 반 공기 남아 있었다.
  • 그런데 한 숟갈도 삼키고 싶지 않았다.
  • 목이 꽉 막힌 것처럼, 커다란 돌멩이를 삼켜버린 느낌이었다.
  • 벽시계를 힐끗 보니, 시침과 분침이 자정을 가리키고 있었다.
  • "소영아, 생일 축하해."
  • 그녀는 아주 작게 중얼거렸다.
  • 이소영의 생일을 축하해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이제 막 스무 살이 됐다.
  • 오래도록 기다린 날이었는데, 막상 닥치니 모든 게 산산이 부서지는 기분이었다.
  •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엄마 사진을 끌어안았다.
  • 사진을 가슴팍에 바짝 붙이자, 눈물이 와르르 쏟아졌다.
  • 그녀는 밤을 꼬박 새워 울었다.
  • 이 터무니없는 운명이 원망스러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