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짧게 수긍하고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정성스럽게 껍질을 벗긴 포도를 내게 건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에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새벽 세 시쯤에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더구나. 이마랑 다리를 좀 다친 모양이야. 당분간은 거동도 못 할 테니, 너도 괜히 가서 심기 거스르지 마라.”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포도를 씹었다.그가 다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다. 내게 필요한 건 그저 그가 가진 '윤 씨'라는 성뿐이었으니까.
강 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 강진혁의 할머니인 박 회장은 손자를 호되게 몰아세우는 중이었다.
“네가 제정신이냐? 어떻게 이딴 대형 사고를 쳐! 너 하나 때문에 증발한 시가총액이 얼마인 줄이나 알아?”
숙부와 아버지가 밤새 사태를 수습하는 동안 정작 사고 친 놈은 정신 못 차리고 밖으로 나돌 궁리뿐이라며, 박 회장의 호통이 거실을 울렸다.
내가 거실로 들어서자 회장님의 비서가 내 손에 약병과 물컵을 슬쩍 쥐여주었다. 그녀는 익숙한 미소를 띠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이수 양, 회장님께서 아직 아침 약을 안 드셨어요.”
나는 약을 받아 들고 곧장 박 회장에게 다가갔다.
“할머니, 제가 몇 번이나 말해요. 내 결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요!
어른들이 멋대로 점찍은 저 나무토막 같은 여자는 죽어도 싫어요! 난 무조건 채유리랑 결혼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강진혁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억울하다는 듯 악을 질렀다.
“결혼 자율? 진혁아, 네가 아직도 소꿉장난하는 어린애인 줄 아니?
네가 매일 빈둥거리며 사고만 치고 다니니, 내가 고심해서 유능한 안사람을 붙여주려는 것 아니냐. 그런데도 부족해? 나무토막? 세상에 저렇게 예쁘고 영리한 나무토막이 어디 있다고 그래!”
박 회장은 속이 터지는지 거친 기침을 쏟아냈다.
강진혁이 다시 입을 떼려던 찰나, 내가 먼저 약을 내밀었다.
“할머니, 화 푸세요. 건강 상하십니다.”
내가 차분하게 약을 내밀자, 노발대발하던 할머니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한 강진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누가 마음대로 할머니래? 너, 진짜 소름 끼치게 역겨워.”
강진혁은 내뱉는 말마디마다 노골적인 경멸을 담아 쏘아붙였다.
“너는 네 집도 없어? 이른 아침부터 남의 집 안방까지 기어 들어와서 어떻게든 존재감 확인받고 싶어 안달 난 거야? 대답 좀 해보지 그래?”
“…….”
“윤 씨 집안 식구들은 알아? 네가 이렇게까지 계산적이고 뻔뻔한 애라는 거.”
강진혁은 내 손에 들린 약컵을 마치 오물이라도 보듯 훑어내리더니 비릿한 실소를 흘렸다.
“향기도 없는 조화 주제에. 진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착각하지 마. 넌 내 인생에 끼어든 불청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비수가 섞인 말들을 사정없이 쏟아낸 강진혁은 아침 식사조차 거른 채, 폭풍 같은 기세로 저택을 빠져나갔다.
박 회장님은 약을 삼키고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셨다.
평생을 거친 비즈니스 전쟁터에서 호령해 온 여장부였다. 두 아들 역시 훌령한 경영자로 키워냈지만, 유일한 손자 앞에서만큼은 속수무책이었다. 참으로 초라하고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그녀가 내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네가 고생이 많구나. 이 녀석이 이토록 철없이 굴 줄은 몰랐다.”
할머니가 나를 손자며느리로 낙점한 것은 내 능력뿐만 아니라 외모까지도 마음에 들어 하셨기 때문이었다. 손자를 제 품 안에서 키웠으니 그 취향 정도는 손바닥 보듯 꿰고 있다고 자신하셨던 게다. 하지만 공들여 준비한 이 정략결혼을, 손자는 온몸을 비틀어가며 거부하고 있었다.
사실 강진혁이 왜 저토록 날을 세우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강 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 태어난 그는 원하는 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권력을 가졌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단 한 가지는, 바로 ‘자유로운 선택권’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옥죄는 모든 통제를 증오했고, 그 갈망은 자유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아마 내 외모가 객관적으로 그의 취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필이면 내가 집안에서 정해준 ‘정략결혼 상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사이에 애정 따위가 싹트는 것은 불가능한 기적에 가까웠다.
나는 희미하게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전 상관없어요.”
세상엔 좇아야 할 가치 있는 것들이 차고 넘친다. 그중에서도 감정은 가장 쓸모없는 소모품일 뿐이었다. 내 어머니는 진심을 다해 사랑했고 나까지 낳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결과는 무엇이었나. 배신과 원망, 그리고 끝도 없는 비극뿐이었으니까.
진짜 사랑? 천 원짜리 복권 한 장 당첨되어 본 적 없는 내게, 그런 기적 같은 감정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신기루일 뿐이였다.
내 세계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은 오직 ‘이익’이다. 할머니가 나를 선택한 이유 역시 내게 첫눈에 반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내 이용 가치 때문이었다.
3년 전, 해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단 1년 만에 무능하기 짝이 없던 의붓아버지 윤산이 윤 씨 집안의 실권을 장악하도록 판을 짰다. 할머니는 그 포식자 같은 본능을 높이 사신 것이다.
“진혁이는 어릴 때 몸이 약해서 다들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 그랬더니 이 모양이 되었지. 좋게 말하면 순진한 거고, 솔직히 말하면 멍청한 게다. 이수야, 나는 네가 그 녀석을 하루빨리 제대로 된 사냥개로 만들어 주길 바란다.”
그렇다. 나와 할머니 사이의 비밀스러운 합의. 그 최종 목표는 달콤한 신혼생활 따위가 아니라, 철부지 강진혁을 완벽한 경영자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길들이기 위한 온갖 수단을 강구해 왔고, 오늘도 새로운 전략 기획안을 들고 온 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