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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도련님에게 얽히고 나서야 깨달았다

두 도련님에게 얽히고 나서야 깨달았다

Ethan Quill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 강진혁을 경찰서에서 빼내 오던 날, 집안 어른들은 막 우리의 정략결혼을 확정 지었다.
  • 그는 정작 자신의 '운명의 여인'을 위해 욱해서는 하도윤을 후려친 뒤였다.
  • 나는 그를 위해 사방으로 뛰고 비위 맞추며 비굴하게 굽신거렸다.
  • 하 씨 집안에서 겨우 합의해 주겠다고 했을 때 ,하늘이 이미 잉크를 뿌린 듯 캄캄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 나는 강진혁의 코트를 챙겨 들고 경찰서 문 앞에서 그를 기다렸다.
  • 하지만 밖으로 나온 강진혁은 나를 그대로 지나쳐, 새로 꽂힌 채유리에게로 향했다.
  • 알고 있다. 그는 나를 못마땅해한다. 거절 한 번 못 하고 고분고분하기만 한 내 고지식한 성격에 질색하니까.
  • 그는 채유리처럼 씩씩하고 대담한 타입을 좋아했다.
  • 한 미터쯤 떨어져 서 있던 채유리는 눈가가 벌겋게 달아오른 채 온몸을 빳빳하게 굳히고 있었다.
  • “강진혁, 네가 하도윤을 대신 쳐줬다고 해서 내가 감동할 줄 알아?”
  • “너 벌써 약혼까지 해놓고 내 일에 끼어드는 게 말이 돼?”
  • “나 채유리는 아무리 가난해도 내 자존심은 있어. 절대 상간녀 노릇은 안 해.”
  • 강진혁이 걸음을 딱 멈추고, 얼굴에 역겨움 한가득 담아 나를 돌아보았다.
  • “윤이수, 누가 너한테 말해준 적 없나 본데. 너 진짜 소름 끼치게 역겨워.”
  • “수작 좀 부리면 나랑 유리 사이를 갈라놓을 수 있을 줄 알았어?”
  • “꿈깨. 너 같은 건 돈을 수천억씩 얹어준대도 우리 강 씨 집안 문턱 넘을 일 절대 없으니까.”
  • 서울 사교계 사람들 전부가 이 결혼을 내가 매달려 얻어낸 것이라 믿고 있다.
  • 강진혁조차 그렇게 착각하며 기고만장해 있었다.
  •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이것은 나랑 강 씨 가문 사이의 철저한 거래일 뿐이라는 걸.
  • 겉으로는 윤 씨 집안의 양녀로서 누려온 혜택에 대한 의무를 다하는 척하고 있지만,
  • 사실 나는 이 기회를 발판 삼아 완벽한 자유를 손에 넣을 계획이었다.
  • ……
  • “그럴 가치가 있어?”
  • 차에 올라타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하도윤이 조수석에 올라탔다.
  • 서울에서 강진혁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하 씨 집안의 외동아들.
  • 하도윤의 까다로움은 강진혁보다 한 수 위였다. 강진혁과 엮인 일이 아니었다면, 나 역시 그와 마주칠 일은 만들지 않았을 것이다.
  • “하 본부장님, 농담이 지나치시네요. 집안끼리 맺은 약속인데 그의 일이 곧 제 일이죠. 가치를 따질 단계는 이미 지났습니다.”
  • 나는 무표정한 얼굴로시동을 걸었다.
  • “어디 로 가시죠? 모셔다드리겠습니다.”
  • 하도윤은 비릿한 미소를 지으며 나를 응시하다가, 한참 뒤에야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 “윤 씨 집안이 든든한 우방을 원하는 거라면 하 씨 집안도 나쁘지 않을 텐데. 차라리 강진혁 말고 나를 선택하는 건 어때, 누나?”
  • 어이없어 헛웃음을 삼키며 브레이크를 밟았다.
  • 서울 바닥의 금수저들은 하나같이 제멋대로다. 앞뒤 가리지 않고 내뱉는 그 가벼운 농담 때문에 상대가 어떤 대가를 치러야 하는지는 안중에도 없었다. 들끓는 속을 누르며 차갑게 되물었다.
  • “하도윤 씨는 강진혁 물건을 뺏는 게 그렇게 재밌나요?”
  • “낮에는 여자 하나로 들쑤셔놓더니, 이제는 나까지 건드려 보시겠다?”
  • 하도윤의 표정이 순식간에 굳었다. 그는 거칠게 문을 열고 차에서 내리더니, 이내 분을 못 이기겠다는 듯 다시 내 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 “나 모르는 척하는 건 참아줄게. 그런데 제발 너 자신을 쓰레기통에 처박지는 마.”
  • “강진혁이 뭐라고. 그 새끼가 너랑 결혼할 자격이나 된다고 생각해?”
  • “그런 놈은 오늘 채유리, 내일은 또 다른 여자야. 그걸 네가 다 감당하겠다고?”
  • “내 진심은 이미 3년 전에 말했어. 제발 제대로 좀 생각해 봐.”
  • 나는 그저 미소만 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내게 가장 공포스러운 건 다름 아닌 ‘진심’이다. 특히 이런 고귀한 도련님들의 진심 말이다.
  • 사랑할 땐 세상을 다 줄 것처럼 굴다가도, 마음이 식으면 그뿐이다. 나는 그런 위험한 도박에 인생을 걸 생각이 없었다.
  • 집에 들어서자마자 날카로운 휴대폰이 날아와 내 이마를 강타했다. 뜨거운 피가 뺨을 타고 흐르는 와중에 마주한 건 의붓아버지 윤산의 서슬 퍼런 눈빛이었다.
  • 한때 서울에서 유명한 데릴사위였던 그는 이제 윤 씨 집안의 실권자가 되어 있었다. 10년을 함께 살며 그의 성깔은 훤히 꿰고 있었다.
  • “진혁이를 집까지 배웅하라고 했지! 누가 멋대로 먼저 오라고 했어!”
  • 알고 보니, 강진혁과 채유리가 경찰서 앞에서 포옹하는 장면이 찍혀 실시간 검색어 1위를 장식하고 있었다.
  • 막 정략결혼을 발표한 양가에게는 치명적인 스캔들이었다. 강진혁의 고집을 꺾을 사람은 없으니,만만한 내가 화풀이용 샌드백이 된 것이다.
  • “아버지, 이 정도로 노여워하실 것 없습니다. 제가 바로 수습할게요. 걱정 마세요. 이깟 일로 혼사가 흔들리는 일은 절대 없을 겁니다. “
  • 나는 고개 숙이고 나직하게 달래자 윤산은 비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 “됐어. 윤 씨 집안 딸로 대접받고 싶으면 똑바로 해.근본 없는 티 내지 말고”
  •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부엌에 서 있는 엄마를 힐끗 보며 미소 지었다.
  • “알고 있어요, 아버지. 내일 바로 강 의장님 댁에 가서 사과드리겠습니다.”
  • “다른 일 없으시면, 전 올라갈게요.”
  • 방에 돌아와 익숙하게 구급상자를 꺼냈다. 이런 일은 어릴 때부터 일상이었다. 돈을 얻으려면 허리를 굽혀야 하고, 힘이 없으면웃으며 맞는 법부터 배워야 하니까.
  • 검색어 순위 따위는 내게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이 정도도 해결 못 하면 강 씨 가문과의 협상 테이블에 앉을 자격조차 없다.
  • 전화 한 통에 비서는 준비해둔 톱스타의 열애설을 터뜨렸고, 마케팅 계정들이 일제히 움직였다.
  • 강진혁의 스캔들은 순식간에 자극적인 가십 아래로 매몰되었다.
  • 나는 와인 한 잔을 따르며 창밖의 한강 뷰를 바라봤다. 무언가를 얻으려면 반드시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한다. 10년 전 엄마와 함께 윤 씨 집안을 선택한 순간, 우리는 이미 모든 것을 각오했다.
  • 그러니 지금 겪는 이 정도 수모쯤은, 기꺼이 견뎌낼 수 있었다.더 큰 것을 손에 넣기 위해서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