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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의 안면실인증은 선택적이었다

남편의 안면실인증은 선택적이었다

Modi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 재벌가 안주인들 사이에서 은밀하게 공유되는 '최악의 바람둥이' 리스트가 하나 있는데, 내 남편 안민규는 늘 그 명단의 맨 꼭대기에 당당히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 1년 동안 저택으로 여자를 끌어들이는 횟수가 부부 관계를 맺는 횟수보다 훨씬 많았으니까.
  • 그럼에도 나는 아직 이혼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 안민규가 늘 이렇게 변명했기 때문이다.
  • "설아야, 그 교통사고 이후로 머리를 심하게 다쳤잖아. 나, 사람 얼굴을 구별 못 해. 안면실인증이래."
  • 집으로 데려온 그 수많은 여자들을 전부 나로 착각했다는 것이다.
  • 하지만 내가 제발 나를 알아봐 달라고 아무리 애원해도, 그는 늘 초점 없는 눈으로 날 바라보며 물었다.
  • "누구세요?"
  • 그러던 어느 날, 그 남자를 구하기 위해 내 목숨마저 내던졌다가 원한을 품은 자들에게 납치당하고 말았다.
  • 경호원들을 대동하고 구출하러 온 남편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옆에 있던 여자를 품에 와락 끌어안았다.
  • "세아야, 무사해서 다행이야. 정말 미치는 줄 알았어."
  • 안면실인증이라던 사람이 그 여자의 얼굴과 이름은 너무나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 결국 모든 것은 새빨간 거짓말이었고,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게 아니라 그저 나를 사랑하지 않았을 뿐이다.
  • ...
  • "안 대표님, 이분이 정말 사모님 윤설하 씨 맞습니까?"
  • 연회장 구석, 재벌가 자제 몇 명이 휴대전화를 치켜든 채 흥미진진한 얼굴로 소파를 에워싸고 있었다.
  • 그리고 그 소파 한가운데에는 붉은 드레스를 입은 여자의 얼굴을 감싸 쥐고 끈적하게 입술을 탐하는 남편이 있었다.
  • 당연하게도 그 여자는 내가 아니었다.
  • 방금 귀국한 안민규의 첫사랑, 한세아였다.
  • 인파 너머에 선 나는 방금 그를 위해 챙겨 온 숙취해소제를 쥔 채,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그 광경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 "당연히 내 아내지."
  • 잔뜩 풀린 목소리로 웅얼거리던 안민규의 손이 한세아의 가슴골 사이로 노골적으로 파고들었다.
  • "우리 아내 살결 냄새는, 죽어도 안 잊어버리거든."
  • 그 뻔뻔한 대답에 주변에서 낄낄거리는 웃음이 터져 나왔다.
  • "어머, 윤설하 씨. 남편분 안면실인증이 또 도지셨나 봐요?"
  • 누군가 나를 발견하고는 작정하고 망신을 주려는 듯 목소리를 높이며 내 쪽으로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었다.
  • 내 이름이 들리자 그제야 안민규가 멍한 얼굴로 고개를 치켜들었다.
  • 나와 눈이 마주친 순간,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 그는 몇 초간 내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다가 제 품에 안긴 한세아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당혹감으로 하얗게 질린 얼굴을 했다.
  • 허겁지겁 한세아를 밀쳐낸 안민규가 내 앞으로 달려와 '쿵' 소리가 나게 무릎을 꿇고는 매달리듯 내 다리를 붙잡았다.
  • "여보! 언제 왔어? 나 진짜 미치겠네, 다른 사람이랑 잠깐 얘기하는 사이에 내 품에 있는 사람이 바뀌어 버렸다니까?"
  • "여보, 화났어? 다 내 잘못이야. 내가 빨리 여보를 못 알아본 탓이야. 나 정말 일부러 그런 거 아닌 거 알지?"
  • 나를 바라보던 그의 눈 밑바닥에 스쳐 지나간 역겨움을 보지 못했더라면, 이 구질구질한 변명에 또 한 번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 무수한 카메라 플래시 세례 속에서 오열하는 그의 꼴은, 당장 연기대상을 쥐여줘도 손색없을 정도였다.
  • 내가 싸늘하게 내려다만 보자 그는 더 절박하게 변명을 늘어놓았다.
  • "여보도 잘 알잖아. 3년 전 그 빌어먹을 교통사고 이후로 뇌가 어떻게 돼 버렸는지, 내 눈엔 세상 모든 여자가 다 당신으로 보인다고."
  • "저 여자 드레스가 당신이 오늘 입고 나간 드레스랑 비슷하길래, 나는 정말 당신인 줄 알았단 말이야!"
  • 그 시각, 소파에 기대어 앉은 한세아는 그제야 여유롭게 흐트러진 옷깃을 추스르며 도발적으로 턱을 치켜들었다.
  • 목덜미에 새겨진 선명하고 붉은 키스 마크를 과시하듯 내보이면서.
  • "설하 씨, 민규 오빠 너무 원망하지 마요. 설하 씨를 너무 사랑한 나머지 우리를 전부 설하 씨로 착각하는 거잖아요."
  • 한세아는 짐짓 안민규를 감싸는 척 다가오더니, 내 속을 긁어내듯 비아냥거렸다.
  • "뭐, 설하 씨 대타로 취급받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고. 전 아무렇지도 않아요."
  • 나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두 사람의 역겨운 삼류 연극을 서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 예전 같았다면 마음이 약해졌을지도 모른다.
  • 3년 전, 나를 살리려고 핸들을 꺾어 가드레일을 들이받던 안민규의 처절한 모습이 떠올라 또다시 용서하고 말았겠지.
  • 그때 의사는 뇌 손상으로 인해 그에게 심각한 후유증이 남았다고 진단했으니까.
  • 하지만 지난 3년 동안, 이놈의 '착각'은 유독 내 뒤통수를 칠 때마다 반복되었다. 무엇보다 얼마 전 병원에서 빼낸 그의 진료 기록부에는, 이미 '완치'라는 두 글자가 또렷하게 찍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