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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 쇼케이스 시작까지 남은 시간은 단 30분.
  • 나는 마지막 미디어 초청 명단을 확인하며 감정을 죽이고 있었다. 그때, 서진혁이 슬그머니 다가왔다. 아까의 살벌했던 기세는 어디 갔는지, 얼굴에는 비굴할 정도로 살가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여보, 아까는 내가 말이 좀 심했어. 예민해서 그랬나 봐.”
  • 그가 주머니에서 작은 벨벳 상자를 꺼내 내 손에 쥐여주었다.
  • “오늘 우리 결혼 5주년이잖아. 나 안 잊었어.”
  • “이거, 당신 주려고 내가 해외 지인 통해서 특별히 공수한 거야. 마음에 들어?”
  • 나는 고개를 숙여 상자를 열었다. 그 안에는 가느다란 은 목걸이가 누워 있었다. 펜던트는 쌀알보다도 작은 싸구려 큐빅 하나. 마감은 거칠기 짝이 없고, 그 흔한 브랜드 로고 하나 박혀 있지 않았다.
  • 나도 모르게 실소가 터져 나오려는 걸 간신히 참았다.
  • 특별히 공수했다고?
  • 웃기지도 않는다. 이건 우리 회사 총무팀에서 행사 사은품으로 뿌리려고 동대문에서 대량으로 떼온 만 원짜리 샘플이다. 그는 심지어 로고가 박힌 회사 박스를 갈아 끼울 성의조차 보이지 않았다.
  • 불과 지난주, 그가 강희주에게 3천만 원짜리 외제차를 계약해 줬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불륜녀에겐 3천만 원, 5년을 함께 피땀 흘린 아내에겐 단돈 만 원.
  • 이게 내가 사랑했던 남자의 민낯이었다.
  • 나는 고개를 들고, 누구보다 행복한 아내의 표정을 지어 보였다. 눈가에 적당히 물기까지 채우면서.
  • “고마워, 진혁 씨. 난 당신이 바빠서 잊어버린 줄 알았어.”
  • “당신이 준 거면 난 뭐든 좋아. 정말 고마워요.”
  • 서진혁은 그제야 완전히 경계를 푼 듯, 내 머리카락을 다정하게 쓸어 넘겼다.
  • “바보같이, 내가 어떻게 잊어? 당신은 내 아내잖아.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사람.”
  • “그러니까 아까 일은 다 잊어버려. 나랑 강희주는 정말 비즈니스 관계일 뿐이니까.”
  • “걔가 이제 막 졸업한 애라 눈치가 좀 없긴 해도, 당신 발끝에도 못 미치는 애야. 알지?”
  • 그의 말은 소름 돋을 정도로 진심처럼 들렸다. 만약 내가 어젯밤, 그가 변호사와 밀담을 나누며 나를 재산 분할 한 푼 없이 빈손으로 쫓아내려던 이혼 계획서를 미리 보지 못했다면.
  • 그랬다면 나는 또 바보처럼 이 남자의 거짓말에 속아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 그때, 강희주에게서 영상통화가 걸려왔다.
  • 서진혁의 얼굴이 찰나의 순간 흙빛으로 굳더니, 본능적으로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려 했다.
  • 나는 그의 손목을 부드럽게 눌러 막으며 환하게 웃어 보였다.
  • “받아봐요. 왜 안 받아? 분명 업무 때문에 급한 일이 생겨서 그런 걸 텐데.”
  • 서진혁은 잠시 망설였다. 하지만 내 표정에서 한 줌의 의심도 읽지 못하자, 안심한 듯 통화 버튼을 눌렀다.
  • 화면에는 강희주가 나타났다.
  • 그녀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VIP 대기실 소파에 요염하게 누워 있었다. 카메라를 일부러 바짝 당겨서 찍었는지, 화면 가득 희멀건 살결이 꽉 들어찼다.
  • “진혁 씨… 흑, 흐윽….”
  • “나 알레르기 올라온 것 같아요. 석고 올렸던 자리가 너무 가렵고 빨갛게 부어올랐어.”
  • “아무 약이나 바르기 무서운데… 와서 좀 봐주면 안 돼요?”
  • 그녀는 말하면서 일부러 몸을 배배 꼬며 가슴을 들어 올려 하얀 피부를 노골적으로 강조했다.
  • 서진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벌게지더니 눈이 풀리기 시작했다. 그가 힐끗 내 눈치를 보며 머쓱하게 헛기침을 내뱉었다.
  • “이게… 저기, 지금은 자리를 비울 수가 없어. 쇼케이스가 코앞이라.”
  • 영상 속 강희주는 더 서럽게 흐느끼며 몸을 잘게 떨었다.
  • “하지만… 하지만 너무 아픈걸요….”
  • 서진혁은 세상에서 가장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나를 향해 궁색한 변명을 늘어놓았다.
  • “여보, 알다시피 희주가 워낙 예민하고 알레르기 체질이잖아.”
  • “혹시라도 진짜 큰일이라도 생기면 회사 차원에서도 골치 아프니까.”
  • 나는 속으로 코웃음을 쳤다.
  • 발정 난 암캐처럼 꼬리치는 거겠지. 무슨 놈의 알레르기.
  • 나는 그의 넥타이를 다정하게 매만져 주며 더없이 너그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 “당신이 대표잖아요. 직원이 아프다는데 가서 챙겨보는 게 당연하지.”
  • “여긴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까, 얼른 가서 확인하고 와요.”
  • 지옥에서 구원이라도 받은 표정으로 서진혁의 눈이 번쩍였다.
  • “여보, 당신 정말…! 역시 내 최고의 파트너이자 안사람이라니까!”
  • “그럼 나 딱 5분만 보고 올게. 금방 올게!”
  • 말이 끝나기 무섭게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복도 끝으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지켜보는 내 얼굴에서 미소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 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부하 직원에게 전화를 걸었다.
  • “영상 준비됐어?”
  • “준비됐습니다, 본부장님. 하지만… 진짜로 송출할까요? 이거 전 플랫폼 실시간 라이브 중계인데….”
  • “틀어.”
  • 나는 손에 들고 있던 만 원짜리 싸구려 벨벳 상자를 쓰레기통 처박았다.
  • “책임은 내가 져.”
  • “기억해. 고화질 원본 그대로, 모자이크 없이, 볼륨은 최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