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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시청 앞. 누런 가로등 불빛이 내 그림자를 길게 끌어당겼다.
  • 검은 롤스로이스 한 대가 길가에 서 있었다.
  • 문이 열리고, 남자가 휠체어를 밀며 내렸다. 휠체어에 앉은 그는 말끔한 수트 차림, 얼굴은 곱상했지만 혈색이 좀 없었다.
  • 휠체어에 있어도, 특유의 귀티 나고 차가운 아우라는 가려지지 않았다.
  • 그가 바로 백제우였다.
  • 한때 전 도시가 떠받들던 남자, 카네기 그룹의 후계자.
  • 그리고 이준호에게 밟혀서 정점에서 추락하고, 사람들 앞에서 ‘폐물’이라 모욕당했던 그의 앙숙.
  • 그가 휠체어를 굴려 내 앞에 멈췄다. "결정, 확실해요?"
  • 목소리는 낮았지만 묘하게 마음을 가라앉히는 힘이 있었다.
  •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눈빛은 단단했다.
  • "지금만큼 확실한 때가 없거든요."
  • 그는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내게 손을 내밀었다.
  • "그럼, 잘 부탁해요, 아름 씨."
  • 나는 그의 손바닥에 내 손을 얹었다. "저도 잘 부탁해요, 백제우 씨."
  • 더 말할 것 없이 곧장 시청으로 들어갔다. 열다섯 분 뒤, 우리 손엔 막 받은 혼인증서가 들려 있었다.
  • 오늘부로 나는 백제우의 아내다.
  • 이준호, 네 앙숙의 아내지.
  • 네가 이 혼인증서를 보면, 그 잘도 연기하던 기억상실 얼굴에 어떤 표정이 떠오를까?
  • 난 진심 기대돼.
  • 백제우와 저택으로 돌아왔을 때, 이준호와 차서연은 거실 소파에서 끈적하게 붙어 있었다.
  • 문 여는 소리가 나자 이준호가 못마땅하다는 듯 고개를 들었다. 날 보더니 눈빛에 노골적인 혐오가 번졌다. 비웃듯 말했다.
  • "여길 왜 와? 짐이라도 덜 챙겼냐, 아니면 빌러 왔어?"
  • 내 뒤의 백제우를 본 차서연은 잠깐 굳더니 금세 날카롭게 깔깔댔다.
  • "어머, 정아름. 저거 백씨 집안 그 불구 아니야?"
  • "뭐야, 이렇게 빨리 새 애인 마련했어?"
  • 이준호도 백제우를 훑었다. 윗선이라도 된 듯한 경멸이 눈에 가득했다. "정아름, 넌 참 취향이 늘 그 모양이야."
  • 나는 그들의 비아냥을 씹고, 담담히 말했다.
  • "내 물건 가지러 왔어."
  • 말을 마치고, 손에 든 혼인증서를 탁자 위로 툭 던졌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나 결혼했어."
  • 새것 같은 혼인증서가 불덩이처럼 그들의 눈을 확 데웠다.
  • 이준호의 무표정이 결국 갈라졌다. 벌떡 일어나 혼인증서를 낚아챘다. 거기 적힌 내 이름과 백제우의 이름을 보는 순간, 기억상실 가면이 순식간에 확 깨졌다. "정아름!"
  • 낮게 으르렁댔다. 이마에 핏줄이 튀고, 눈동자엔 삼킬 수 없는 분노가 활활 탔다.
  • "감히 이런 짓을 해?"
  • 기억상실 쇼, 더는 못 이어가겠지.
  • 그가 미친 듯이 성내는 걸 보니, 속에서 통쾌함이 콸콸 솟았다.
  • "서이준, 말 조심해."
  • 나는 백제우 팔을 끼고, 고개를 바짝 들고, 이준호를 정면으로 노려봤다.
  • "나는 이제 백제우 씨 부인이야. 당신이 소리칠 상대가 아니거든."
  • "너…!"
  • 이준호는 분에 겨워 온몸을 떨었다. 날 가리키는 손가락까지 덜덜했다.
  • 그가 상상이나 했겠나. 언제나 그의 말이면 다 따르던, 목숨처럼 사랑하던 내가, 버림받고 한 시간 만에 다른 남자와 결혼할 줄은!
  • 게다가 그 남자가 그가 가장 깔보던 불구, 백제우라니!
  • 그에게 이건 모욕 중의 모욕이다.
  • 이준호가 무너지는 표정을 보니, 내 속에서 또 한 번 짜릿한 복수의 쾌감이 치밀었다.
  • 이준호의 분노는 거실 전체를 태울 기세였다.
  • 그는 날 노려 뜯었다. 당장 씹어 삼킬 듯이.
  • "정아름, 너 진짜 천박하게!"
  • "날 엿먹이겠다고, 하필 불구랑 붙어?"
  • "그렇게 굶주렸냐? 가릴 것도 없지?"
  • 차서연도 잽싸게 맞장구쳤다.
  • "맞네 맞아, 우리 준호 씨가 질릴 만큼 갖고 놀던 값싼 년이랑, 일어설 줄도 모르는 폐물이랑 딱이네. 천생연분이야 아주!"
  • 그녀는 백제우를 위아래로 훑었다. 경멸이 눈에 훤했다.
  • "백제우, 너도 참 딱하다. 남이 버린 쓰레기 줍고 싶니?"
  • 둘이 한통속이 되어 우리를 있는 대로 짓밟았다. 나는 당장이라도 달려들어 그 입부터 찢어버리고 싶었다.
  • 그런데 백제우가 내 손등을 살짝 두드렸다. 진정하라는 뜻이었다.
  • 그는 고개를 들어 그들의 경멸을 담담히 받아냈다. "이준호 씨, 지금 혹시… 후회하는 겁니까?"
  • 말투는 담담했고, 목소리도 크지 않았다. 그런데도 묵직한 압박이 스며들었다.
  • 이준호와 차서연은 그의 그 태연함에 잠시 말문이 막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