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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철문 밖에서 발걸음이 딱 멈췄다.
  • 문잠금장치가 딸깍 소리를 냈다.
  • 눈이 시릴 만큼 밝은 빛이 문틈으로 확 들어왔다.
  • 집사 최병택이 문간에 서 있었고, 손에는 하인들 유니폼인 회색 옷 한 벌을 들고 있었다.
  • “아가씨, 회장님께서 분부하셨어요.”
  • “오늘 밤은 정가에서 아가씨를 정식으로 가족으로 소개하는 연회예요. 상류 사회의 명사들이 죄다 옵니다.”
  • “근데 아가씨가 연회에서 또 발작하듯 설치고 귀빈들 들이받을까 봐,”
  • “회장님께서 대외적으로는 지은 양이 정가의 유일한 딸이라고 발표하시기로 했습니다.”
  • “아가씨는요……”
  • 최 집사가 그 거친 유니폼을 내 발치에 툭 던졌다.
  • “이거 갈아입고 뒷주방 가서 설거지나 도와요.”
  • “명심하세요. 앞홀엔 절대 나타나면 안 됩니다.”
  • 바닥에 놓인 유니폼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싸늘하게 웃었다.
  • “가족으로 인정한다는 연회가, 가짜 딸을 인정하겠다는 거였어?”
  • “정가, 뻔뻔함의 끝장을 보네 진짜.”
  • 최 집사가 미간을 찌푸리며 목소리를 세웠다.
  • “아가씨, 말조심하시죠.”
  • “지은 양은 어릴 때부터 뭐든 뛰어났고, 사교계가 인정하는 명문 아가씨입니다.”
  • “아가씨는요? 포크랑 나이프도 제대로 못 잡아서 정가 망신만 시키잖아요.”
  • “회장님이 이렇게 정하신 것도 정가 체면 지키려고 그런 겁니다.”
  • 나는 벽을 짚고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무릎에서 칼로 베는 듯한 통증이 치받아 올라와, 숨을 싸늘하게 들이켰다.
  • “내가 굳이 홀로 나가겠다면 어떡할 건데?”
  • 최 집사의 얼굴빛이 싸늘해졌다.
  • “그땐, 사정 안 할 겁니다.”
  • 그가 손뼉을 탁탁 쳤다.
  • 덩치 큰 보디가드 둘이 그의 뒤에서 나와, 좌우로 서서 내 어깨를 꽉 눌렀다.
  • “아가씨를 뒷주방으로 끌고 가. 내 허락 없이는 한 발짝도 못 나가게 해.”
  • 나는 강제로 질질 끌려가 긴 복도를 지나갔다.
  • 뒷주방엔 매캐한 기름 냄새가 코를 확 쳤다.
  • 싱크대엔 더러운 접시가 산처럼 수북이 쌓여 있었다.
  • 주방장이 걸레 한 장을 내 얼굴에 퍽 던졌다.
  • “멍하니 뭐 해? 빨리 손 안 놀려?”
  • “이 접시 못 끝내면, 오늘 밤은 밥은커녕 남은 찌꺼기라도 못 얻어먹어!”
  • 나는 표정 하나 안 바뀌고 걸레를 잡아 쓰레기통에 내던졌다.
  • “안 해.”
  • 주방장이 눈을 부릅뜨고 손을 번쩍 들어 내리치려 들었다.
  • “촌구석 촌년이 어디서 말대꾸야!”
  • 그때 뒷주방 문이 쾅 하고 발로 차여 열렸다.
  • 정지훈이 맞춤형으로 제작한 고급 수트를 입고 성큼성큼 들어왔다.
  • 그가 주방장을 거칠게 밀쳐내고, 서늘한 눈빛으로 나를 꽂아봤다.
  • “정보아, 또 무슨 수작이야?”
  • “경고하는데 오늘은 지은이랑 호철이 형 약혼식이야.”
  • “망치기라도 하면, 그땐 정말 죽여 버린다!”
  • 나는 번쩍 고개를 들었다.
  • “약혼?”
  • “한호철은 내 약혼자 아니었나? 누가 무슨 권리로 정지은이랑 약혼시키는데!”
  • 정지훈은 나를 바보 보듯 훑어봤다.
  • “지은이가 너보다 만 배는 뛰어나니까, 그걸로 충분하지!”
  • “호철이 형은 너 같은 촌티 나는 애, 진작 질렸어.”
  • “지은이는 판 깨지 않으려고 스스로 양보해서 호철이 형의 청혼을 받아준 거야.”
  • “네가 오히려 지은이한테 감사해야지!”
  • 그가 성큼 다가와 내 머리채를 왈칵 잡아챘다.
  • “여기서 얌전히 처박혀 있어.”
  • “뒷주방 문턱 넘기만 해 봐. 다리 부러뜨린다.”
  • 정지훈은 손을 홱 놓더니, 기름때 가득한 바닥으로 나를 힘껏 밀쳐 넘어뜨렸다.
  • 그는 역겨운 듯 손을 털고, 뒤도 안 돌아보고 나갔다.
  • 뒷주방 문은 바깥에서 꽉 잠겼다.
  • 나는 더러운 물에 주저앉은 채, 앞홀에서 흘러오는 잔잔한 피아노 선율을 들었다.
  • 피아노 치는 사람은 정지은이었다.
  • 사회자의 격앙된 목소리가 벽을 뚫듯 들려왔다.
  • “이어서 정가의 귀한 외동딸, 정지은 아가씨, 그리고 그녀의 약혼자이자 한씨 그룹의 후계자, 한호철 도련님을 모시겠습니다!”
  • 천둥 같은 박수가 터졌다.
  •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살을 깊게 파고들어 욱신거렸다.
  • 뒷주방 녹슨 작은 창문이 갑자기 밖에서 두드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