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 정우진은 검사 결과를 내려다본 채 미간을 깊게 좁혔다.
-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 있었다.
- 그는 말없이 내 팔을 받쳐 들고 복도 의자까지 데려다 앉혔다. 그리고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한지수 씨…”
- 마침내 입을 연 그의 목소리에는 당혹감과 안쓰러움이 뒤섞여 있었다.
- “이런 결과를 받고도 왜 바로 병원에 오지 않으셨어요?”
-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발끝만 바라봤다.
- “누구한테요.”
- 목소리가 놀랄 만큼 잠잠했다.
- 물결 하나 없는 죽은 호수처럼.
- “저 사람한테 말하라고요?”
- “당신이 그렇게 원하는 신장은 이제 쓸 수도 없다고.”
- “그 말 하라고요?”
- 정우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그는 가만히 나를 바라봤다.
- 그 눈빛엔 여러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 동정.
- 안타까움.
- 그리고 분명한 분노.
- “남편분은 이 검사 결과 모르십니까?”
-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 “몰라요.”
- 입술 끝이 비틀렸다.
- “그 사람은 자기 첫사랑한테 신장이 필요하다는 것만 알아요.”
- “그리고 하필 그게 나랑 맞는다는 것만.”
- 정우진의 턱선이 단단하게 굳었다. 손등 위로 핏줄이 옅게 도드라졌다.
- “미친…”
- 그가 낮게 삼킨 말끝엔 노기가 배어 있었다.
- 나는 그런 그를 올려다봤다.
- “우습죠?”
- “내가 참 한심하죠.”
- 정우진은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 대신 말없이 자신의 가운을 벗어 내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걸쳐줬다.
- 희미한 체온과 소독약 냄새가 스며든 흰 가운이었다.
- “여기 추워요. 이거라도 걸치고 계세요.”
- 그 짧은 말에 이상하게 목이 메었다.
- 누군가의 다정함이 이렇게 낯설 줄 몰랐다.
- 그때였다.
- 복도 저편에서 다급한 발소리가 가까워졌다.
- 뒤쫓아 나온 김도진이었다.
- 그는 나와 정우진이 나란히 앉아 있는 모습을 보더니 그대로 걸음을 멈췄다.
- 내 어깨에 걸쳐진 다른 남자의 가운까지 본 순간,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 “한지수.”
-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 하지만 그 안엔 이미 억눌린 분노가 들끓고 있었다.
- 그는 성큼 다가와 내 팔을 거칠게 낚아챘다.
- 손목이 욱신거릴 만큼 힘이 셌다.
- “저 자식 누구야?”
- 그의 시선이 정우진에게 꽂혔다.
- 노골적인 적의가 서린 눈빛이었다.
- “벌써 다른 남자한테 기대?”
- “병원까지 와서 이 짓이야?”
- 입에 담기도 역겨운 말이었다.
- 정우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차분한 얼굴이었지만 눈빛은 단단했다.
- “말씀 조심하시죠.”
- “환자분 상태가 좋지 않습니다.”
- “환자?”
- 김도진이 비웃었다.
- 그리고 다시 나를 노려봤다.
- “한지수, 네가 언제부터 아팠는데?”
- “왜 난 모르지?”
- 그의 눈엔 여전히 의심뿐이었다.
- “또 수작 부리는 거야?”
- “이런 식으로 사람 흔들면 내가 넘어갈 줄 알아?”
- 나는 그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쳤다.
- 그리고 정우진 쪽으로 한 발 물러섰다.
- “김도진, 이건 이제 네 일이 아니야.”
- 그는 눈을 가늘게 뜨며 나를 노려봤다.
- 나는 떨리는 숨을 억누른 채 또렷하게 말했다.
- “내 병도.”
- “내 몸도.”
- “나도.”
- 잠시 말을 멈췄다가, 끝내 마지막 말을 내뱉었다.
- “이제 너랑 아무 상관 없어.”
- 김도진의 표정이 굳었다.
- 나는 그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 “이혼해.”
- 복도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 김도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 그러다 피식,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 “이혼?”
- 그는 마치 우스운 소리라도 들은 사람처럼 나를 내려다봤다.
- “한지수, 네가 뭘 믿고 그런 소릴 해?”
- “나 없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잖아.”
- 그의 목소리는 차갑고도 확신에 차 있었다.
- “이혼으로 날 협박해서 유리를 포기하게 만들겠다?”
- “그런 꿈 깨.”
- 그는 한 발 더 다가와 다시 내 팔을 붙잡으려 했다.
- 그 순간 정우진이 앞을 막아섰다.
- “그만하시죠.”
-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 “한지수 씨 몸 상태는 지금 자극을 받으면 안 됩니다.”
- “그리고 어떤 장기 이식도 절대 불가능합니다.”
- 김도진의 동작이 멈췄다.
- 그가 천천히 정우진을 돌아봤다.
- “무슨 뜻이지?”
- 정우진은 더 말하지 않고 손에 들고 있던 검사 결과를 그대로 내밀었다.
- “직접 보시죠.”
- 김도진은 의심스러운 얼굴로 서류를 받아 들었다.
- 하지만 종이를 펼친 순간, 그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 진단명 아래 적힌 네 글자가 눈에 박혔다.
- 위암 중기.
- 그의 손에서 종이가 툭 떨어졌다.
- 바닥에 흩어진 검사 결과지 위로 복도 불빛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 김도진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나를 봤다.
- 입술이 몇 번 달싹였지만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 아마 원래라면 또 내가 거짓말을 한다고, 수작을 부린다고 몰아붙였을 것이다.
- 하지만 지금 그의 눈앞에 서 있는 나는 너무도 창백했고,
- 입가엔 아직도 핏자국이 마르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 그제야 그는 본 것이다.
- 내가 정말 아프다는 걸.
- 내가 정말 망가져 가고 있다는 걸.
- 그의 눈빛에 충격이 스쳤다.
- 이어 혼란.
- 그리고 아주 늦은 두려움까지.
- 하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조금도 통쾌하지 않았다.
- 남은 건 지독한 허무뿐이었다.
- 나는 입가의 핏자국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 그리고 벽을 짚고 천천히 몸을 세웠다.
- “김도진.”
- 그를 바라보는 내 목소리는 놀랄 만큼 담담했다.
- “내 신장, 못 써.”
- “이 몸 자체가 이미 망가졌으니까.”
- 그는 그제야 정신이 든 사람처럼 내게 달려들었다.
- 두 손으로 내 어깨를 꽉 붙잡았다.
- “아니야.”
- “이거 거짓말이지?”
- 흔들리는 눈동자였다.
- “이거 조작한 거잖아.”
- “유리 안 살리려고 이딴 짓까지 하는 거지, 그렇지?”
- 그는 거의 미친 사람처럼 나를 흔들었다.
- “한지수, 말해.”
- “이거 다 가짜라고 말해.”
- 어깨가 부서질 것 같았다.
- 그가 한 번 흔들 때마다 속이 뒤집혔다.
- 위가 안에서부터 찢기는 것처럼 아팠다.
- 눈앞이 새까매졌다.
- 그리고 다음 순간—
- 울컥.
- 뜨거운 피가 목을 타고 치밀어 올랐다.
- 나는 그대로 고개를 숙인 채 피를 토했다.
- 뜨거운 피가 울컥 쏟아져 나와 김도진의 새하얀 셔츠 위로 튀었다.
- 그 붉은 핏자국은 마치 눈밭 위에 피어난 절망의 꽃 같았다.
- 시간이 멈춘 듯했다.
- 김도진이 얼어붙었다.
- 그는 자기 가슴 위 핏자국을 내려다보다가,
- 천천히 내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 핏기 하나 없는 얼굴.
- 입가를 타고 멈추지 않고 흘러내리는 피.
- 그제야 그의 얼굴이 사색이 됐다.
- “지수야…”
- 처음이었다.
- 그가 내 이름을 그렇게 불러 본 건.
- 하지만 아무 감정도 움직이지 않았다.
- 그는 허둥지둥 내 몸을 붙들려 했다.
- 무너져 내리는 나를 끌어안으려 했다.
-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그를 밀어냈다.
- “손대지 마.”
- 목소리가 거의 속삭임처럼 갈라졌지만, 그 말만은 또렷했다.
- 다리가 힘없이 꺾였다.
- 바닥이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 의식이 꺼져 가는 마지막 순간,
- 나는 다급히 달려오는 정우진의 얼굴을 봤다.
- 그리고 그 뒤로,
- 후회와 두려움으로 완전히 일그러진 김도진의 눈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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