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증오, 이제는 끝
stephenwriter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 결혼 3년 차.
- 김도진의 첫사랑 최유리가 귀국했다. 그리고 돌아오자마자 신부전 진단을 받았다.
- 그날 밤, 김도진은 조직적합성 검사 결과지를 내 앞에 툭 던졌다. 지나치게 담담한 얼굴이었다.
- “한지수, 네 신장이 유리랑 맞는대.”
- 나는 한동안 말이 나오지 않았다.
- 탁자 위에 놓인 검사 결과지만 멍하니 바라봤다. 활자 하나하나가 송곳처럼 눈을 찔렀다.
- 김도진은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며 맞은편 소파에 앉았다. 피곤함보다 짜증이 먼저 묻어나는 얼굴이었다.
- “본인이 직접 서명해.”
- “그럼 보상은 해줄게.”
- 그는 잠시 말을 끊더니,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 “아니면 내가 대신 서명해도 되고.”
- 순간, 숨이 턱 막혔다.
- 그제야 알았다.
- 3년 전, 내가 중증 우울증으로 바닥까지 무너졌을 때 그가 내 손을 잡아준 이유.
- 결혼을 받아들인 이유.
- 내 옆에 남아 있는 척했던 이유.
- 전부 오늘을 위해서였다는 걸.
- 남편이라는 자리도, 보호자라는 이름도.
- 결국은 이 순간, 내 신장을 빼앗기 위해 필요했던 명분일 뿐이었다.
- 그의 눈에 나는 아내가 아니었다.
- 그저 최유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장기 제공자.
- 필요할 때 꺼내 쓰기만 하면 되는 예비 부속품.
- 하지만 그는 모른다.
- 그가 아직 멀쩡하다고 믿고 있는 이 몸도, 이미 오래전부터 서서히 망가지고 있었다는 걸.
- ……
- “의사가 그러더라. 수술은 빠를수록 좋대.”
- 김도진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 마치 내 몸에 칼을 대는 일이 아니라, 중요하지 않은 업무 하나를 처리하는 사람 같았다.
- 처음부터 끝까지 통보뿐이었다.
- 설명도 없고, 상의도 없고, 선택권도 없었다.
- 가슴이 순식간에 바닥까지 꺼져 내렸다.
- 3년을 기다렸는데, 돌아온 건 사랑이 아니라 명령이었다.
- 나는 바짝 마른 입술을 겨우 떼어냈다.
- “내가 끝까지 반대하면?”
- 너무 작은 목소리였다. 듣는 사람조차 놓칠 만큼.
- 그 안에 묻은 떨림은 나도 숨기지 못했다.
- 김도진의 미간이 깊게 구겨졌다. 마치 어처구니없는 소리라도 들었다는 듯 비웃음이 스쳤다.
- “네가 무슨 자격으로 거절해?”
- 목소리는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 “그때 그런 너를 내가 받아준 거잖아.”
- “지난 3년 동안 네가 먹고 입고 누린 거, 뭐 하나 우리 집 돈 안 들어간 게 있었어?”
-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말을 이었다.
- “지금은 고작 신장 하나 달라는 거야.”
- “그걸 두고 흥정이라도 하겠다는 거야?”
- 한마디 한마디가 날카로운 칼날처럼 심장을 후벼 팠다.
- 3년 전,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이미 삶의 끝자락에 서 있었다.
- 사고로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잃었다.
- 집안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남은 건 빚과 공허뿐이었다.
- 나는 그대로 중증 우울증에 빠졌다.
- 매일이 진창 같았다.
- 눈을 떠도 사는 게 아니었고, 숨을 쉬어도 버티는 기분뿐이었다.
-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날, 나는 길 위에서 그대로 주저앉았다.
- 그때 김도진이 내 어깨 위에 코트를 덮어줬다.
- 차갑기만 하던 세상에서 처음 느낀 온기였다.
- 그 순간 나는, 너무도 쉽게 그에게 빠져들었다.
- 그가 왜 나와 결혼했는지 그때는 몰랐다.
- 결혼 후에도 그는 내내 차가웠다.
- 무심했고, 다정한 법이 없었고, 나를 진심으로 봐준 적도 없었다.
- 그래도 나는 괜찮다고 여겼다.
- 빨래를 했고, 밥을 차렸고, 집안 어른들 비위를 맞췄다.
- 누가 봐도 흠잡을 데 없는 아내가 되려고 애썼다.
- 언젠가는 그의 마음이 열릴 거라고 믿었으니까.
- 언젠가는 나를 돌아봐 줄 거라고.
-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마음 한구석쯤은 내게 내어줄 거라고.
- 하지만 오늘, 드디어 알게 됐다.
- 그에게 우리의 결혼은 처음부터 거래였다는 걸.
- 내가 받은 건 그 집 며느리라는 허울뿐인 자리와 풍족한 생활뿐이었다.
- 대신 내가 내놓은 건 내 사랑, 내 자존심, 그리고 이제는 내 장기였다.
- 순간 위가 심하게 비틀렸다.
- 익숙한 통증이었다.
- 나는 무의식적으로 배를 감싸 쥐었다. 얼굴빛이 순식간에 새하얗게 질렸다.
- 그런데도 김도진은 싸늘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볼 뿐이었다. 그 눈빛엔 노골적인 혐오만 가득했다.
- “또 시작이네.”
- “불쌍한 척 좀 그만해. 그런 수작에 내가 넘어갈 줄 알아?”
- 나는 옷자락을 힘껏 움켜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을 파고들었지만 아픈 줄도 몰랐다.
- 이미 가슴이 너무 아파서, 다른 감각은 느껴지지도 않았다.
-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그리고 그의 싸늘한 눈을 똑바로 마주봤다.
- “김도진, 그건 내 몸이야.”
- 떨리는 목소리였지만, 끝까지 무너지진 않았다.
- “네 마음대로 가져가도 되는 물건 아니야.”
- 그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 한 걸음.
- 또 한 걸음.
- 큰 체구가 눈앞을 가리자 숨이 막혀 왔다.
- 이윽고 그는 허리를 숙여 내 턱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뼈가 으스러질 것처럼 세게.
- “내가 못 정해?”
- 그가 차갑게 비웃으며 내 귓가에 바짝 입술을 붙였다.
- “한지수, 네 처지나 똑바로 알아.”
- “넌 내 아내야.”
- “네가 가진 건 전부 내 거고, 네 몸도 예외 아니야.”
-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 그는 손을 놓고 몸을 일으켰다. 벌레라도 내려다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 “3년 전 넌 우울증 때문에 죽으려고 하던 애였어.”
- “가족도 없고, 기댈 데도 없는 고아였지.”
- “네 인생 내가 살려줬고, 나는 네 남편이야. 법적인 보호자고.”
- “나 없으면 넌 아무것도 아니야.”
- 말끝마다 사람을 짓밟는 데 익숙한 확신이 배어 있었다.
- “직접 서명하게 해주는 것도 네 체면 봐주는 거야.”
- “안 하면 내가 대신 한다.”
- 그는 손목시계를 힐끗 내려다봤다.
- “내일 오전 아홉 시.”
- “준비 끝내고 병원으로 와.”
- 그 말을 끝으로 김도진은 미련도 없이 돌아섰다.
- 문이 쾅 닫혔다.
- 커다란 소리에 집 안이 통째로 흔들리는 것 같았다.
- 그리고 동시에, 내 안에 남아 있던 마지막 환상도 산산조각이 났다.
- 나는 그대로 소파에 주저앉았다.
- 온몸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 위는 점점 더 세게 비틀어졌다.
- 가방 안을 더듬어 약병을 꺼냈다. 손이 너무 떨려서 뚜껑조차 한 번에 열지 못했다.
- 겨우 하얀 알약 몇 개를 손바닥에 털어 넣고, 물도 없이 그대로 삼켰다.
- 쓴맛이 혀끝을 타고 목구멍 아래까지 깊게 번졌다.
- 나는 소파 위에 몸을 웅크렸다.
- 마치 버려진 짐승처럼.
- 한참 뒤에야 눈물이 흐르고 있다는 걸 알았다.
- 소리도 없이.
- 하염없이.
- 이제야 알겠다.
- 내가 3년 동안 데우려 했던 건 차가운 돌덩이가 아니었다.
- 애초부터 나를 단 한 번도 담아본 적 없는 사람의 마음이었다.
- 내일 오전 아홉 시.
- 그는 내게 최후통첩을 내렸다.
- 하지만 나는 안다.
- 이 몸은 더 이상 무엇 하나 잃어도 버틸 수 없다는 걸.
- 그런데도 내 저항은, 그의 눈엔 그저 우스운 발버둥일 뿐이었다.
- 밤은 길었다.
- 그리고 너무 추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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