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화
- 나는 온몸이 피와 상처투성이가 된 채 오물까지 뒤집어쓴 몰골로 간신히 집에 돌아왔다. 하지만 십수 년을 살아온 내 유일한 안식처, 내 방은 이미 흔적도 없이 비워져 있었다.
- 내가 아끼던 물건들은 마치 폐기물처럼 마당 한구석에 흉하게 쌓여 있다.
- “너희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 내 갈라진 목소리에 김태건이 비릿한 비웃음을 흘리며 나를 훑어내렸다.
- “보면 몰라? 곧 지호 형이랑 민아 누나가 결혼하거든. 누나가 네 방을 터서 드레스룸으로 쓰겠다고 하더라고.”
-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발이 바닥에 눌어붙은 듯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 이 저택이 얼마나 넓은데, 남는 방이 천지에 널렸는데. 왜 하필 내가 숨 쉬던 이 작은 공간까지 뺏어야만 했을까.
- 생각할 틈도 없이 누군가 내 물건들 위로 기름을 붓고 불을 질렀다.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본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몸을 던졌다.
- 그 더미 속에는 한지호와 십수 년 동안 함께 찍은, 내 생명보다 소중했던 단 하나뿐인 사진들이 들어있었으니까.
- 하지만 불길에 가까이 다가가기도 전에 신민아가 나를 거세게 밀쳐 넘어뜨렸다.
- 그녀는 승리자의 눈빛으로 바닥에 비참하게 쓰러진 나를 내려다보며 조소를 흘렸다.
- “이까짓 사진들 붙들고 있어서 뭐 하게? 이거 지호가 태워버리라고 시킨 거야. 너 같은 애랑 찍힌 사진은 전부 네 더러운 망상의 증거일 뿐이라더라. 보기만 해도 역겹다던데.”
- 역겹다니. 사진을 붙잡으려 허우적대던 손이 허공에서 멈춰버렸다.
- 그래, 내 사랑은 한지호에게 치워버려야 할 오물이자 짐일 뿐이었겠지. 그에게 나는... 존재 자체가 역겨운 기억이었을 테니까.
- 그렇다면 주인에게조차 부정당한 이 종잇조각들을 붙잡고 있어서 무엇 하겠는가.
- ‘어차피 난 이제 곧 죽을 텐데.’
- 나는 끝내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 않았다. 불길은 망설임 없이 모든 것을 삼키며 타올랐다.
- 소중했던 기억들은 검은 재가 되어 흩어졌고 가슴 깊숙이 남아 있던 마지막 애정마저 그 불길 속에서 완전히 타버렸다.
- ‘차라리 잘됐다. 이게 더 나아.’
- 나는 갈 곳을 잃은 채 휘청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 그때, 신민아가 나를 낚아채듯 붙잡더니 지하실로 끌고 내려갔다.
- “지호가 그러더라. 네가 결혼식 망치려고 소동 피우지 못하게 오늘부터는 여기서 지내게 하라고.”
- 지하실은 한 줄기 빛조차 허락되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잠겨 있었다. 불을 켜도 등골이 서늘해질 만큼 그 안에는 차가운 냉기가 감돌았다.
- 한지호,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어둠을 가장 무서워한다는 사실을.
- 부모님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셨을 때 나는 밤새 한숨도 자지 못했다. 눈만 감으면 그 참혹했던 사고 현장이 망막 위에 어른거려 숨이 막혔으니까.
- 그때 나를 품에 꼭 안고 등을 토닥이며 잠들 때까지 곁을 지켜준 사람이 바로 한지호다.
- “은비야, 무서워하지 마. 삼촌 여기 있잖아.”
- 그날 이후, 이 저택의 모든 방과 복도에는 밤새 불이 꺼지지 않았다. 어둠을 두려워하는 나를 위해 한지호가 베풀어준 오직 나만을 위한 특별한 배려였다.
- 하지만 그가 주었던 유일한 다정함조차 이제는 완전히 타버린 재처럼 사라져 버렸다.
- 나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것을 체념한 채 스스로 그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갔다.
- 신민아는 내가 들어서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밖에서 문을 단단히 잠가버렸다.
- “내일이 나랑 지호 결혼식이거든. 식 다 끝나고 나서 꺼내줄 테니까 얌전히 있어.”
- 문틈 사이로 쏟아지는 눈 부신 햇살 속에서, 그녀의 가느다란 목에 걸린 루비 목걸이가 번쩍였다.
- 나는 위장을 짓누르는 극심한 통증을 억누르며 갈라진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
- “그 목걸이... 누가 준 거야?”
- 내 물음에 신민아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비웃었다.
- “당연히 지호가 선물해 준 거지. 이 목걸이 이름이 ‘영생’이래. 영원히 나랑 함께하겠다는 약속이라나 뭐라나.”
- 나는 부서져 가는 심장을 겨우 붙잡은 채 애원하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 “그 목걸이... 내 거야. 부탁할게, 나한테 돌려줄 수 있어?”
- 그 목걸이는 돌아가신 엄마가 남긴 유일한 유품이자 내가 노트에 적어 둔 두 번째 유언... 절대 잃지 말아야 할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
- 나는 그 목걸이를 한지호에게 건넸었다. ‘영생’은 곧 영원을 의미했으니까, 그와 영원히 함께하고 싶다는 내 간절한 고백이었으니까.
- 하지만 그는 내 진심이 담긴 유품을 보란 듯이 다른 여자의 목에 걸어주었다.
- “제발 부탁이에요... 그건 우리 엄마가 남겨주신 마지막 물건이에요.”
- 신민아는 목걸이를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잔인하게 웃었다.
- “돌려줄 수도 있지. 대신 내 발밑에서 빌어봐. 네가 천박한 년이라고, 평생 지호를 넘보지 않겠다고 직접 말해.”
- 나는 망설임 없이 입을 열어 그 치욕스러운 말을 스스로 뱉어냈다. 자존심 따위는 엄마의 유품 앞에서 아무런 가치도 없었다.
- “이제 됐죠?”
- 내 물음에 신민아의 입꼬리가 씰룩였다.
- “이런 바보 같긴. 넌 여전히 3년 전이랑 똑같이 멍청하구나? 이건 그냥 너 골탕 먹고 한 소리야! 이 목걸이, 꿈도 꾸지 마.”
- 그녀는 싸늘하게 돌아서며 쐐기를 박듯 덧붙였다.
- “아, 맞다. 지호가 그러더라. 너도 이제 그만 집착하고 연애 좀 하라고. 그래서 내가 너한테 딱 어울리는 남자를 골라놨거든.”
- 그녀는 지하실 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고 전원까지 완전히 차단해 버렸다.
- 순식간에 암흑이 밀려들었다. 그 속에서 곧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짓눌렀다.
- 짐승 같은 손길에 내 옷가지가 갈기갈기 찢겨나갔다. 3년 전의 그 끔찍한 공포가 밀물처럼 나를 덮쳐왔다. 시한부인 내 몸에는 저항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 또 김태건 그놈이다.
- 한지호가 또다시 직접 나를 이 악마의 소굴로 밀어 넣은 것이었다.
- 다음 날은 한지호와 신민아의 결혼식 날이었다.
- 내가 완전히 포기하기를 바랐던 걸까. 한지호는 지하실에 TV를 설치하고 식장의 생중계 화면을 틀어 놓게 했다.
- 십수 년을 일편단심으로 사랑해 온 그 남자가, 이제는 다른 여자의 손을 잡고 화려한 식장 안으로 당당히 걸어 들어갔다.
- 나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못한 채, 차가운 지하실 바닥에 웅크렸다. 뼈마디가 바닥에 닿을 때마다 욱신거렸지만 그마저도 멀게 느껴졌다.
- 암세포가 온몸을 갉아 먹고 있었지만 나는 이미 영혼이 빠져나간 사람처럼 아무런 감각도 느끼지 못했다.
- ‘한지호, 내가 너를 얼마나 깊게 증오하고 있는지... 너는 죽어도 모르겠지.’
- 화면 속에서 그들이 서로의 손가락에 결혼반지를 끼워주려던 찰나, 나는 천천히 눈을 감았다.
- 바로 그 순간 지하실에서 굉음과 함께 폭발음이 터져 나왔고 순식간에 번진 불길이 지독했던 어둠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 성스러운 주례사에 귀를 기울이던 한지호는 갑자기 심장 부근이 뾰족한 송곳에 찔린 듯한 기묘한 통증을 느꼈다.
- 그는 자신도 모르게 걸음을 주춤했다. 찰나의 순간, 그의 눈앞에 나은비의 초췌한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 한지호는 미간을 깊게 찌푸렸다. 매년 남부럽지 않게 돈을 보내줬는데 대체 3년 동안 해외에서 무엇을 했길래 사람이 저렇게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스스로를 방치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 그는 속으로 다짐했다. 이 결혼식만 끝내고 나면 강제로라도 나은비를 붙잡아 영양을 보충시키고 예전의 생기 넘치던 모습으로 되돌려 놓겠다고.
- 곁에 있던 신민아는 한지호가 아무 대답도 없이 멍하니 서 있자 초조한 기색으로 그의 팔을 붙들었다.
- “지호야, 왜 그래? 어디 아파?”
- 그는 잠시 멈칫하더니 이내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 “아니, 괜찮아.”
- 한지호가 사회자를 바라보며 성혼 선언을 하려 입을 떼려는 순간, 그의 비서가 사색이 된 얼굴로 식장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왔다.
- “대표님, 방금 저택에서 원인을 알 수 없는 폭발 사고가 있었습니다! 지하실에서 시작된 불길이...”
- 한지호가 불쾌한 듯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 “지하실에서 무엇을 발견했길래 이 난리야?”
- 비서는 부르르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었다.
- “나은비 아가씨의... 시신이 발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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