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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화

  • 다시 눈을 떴을 때, 병실 안은 이미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우리 엄마에게 연신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는 박 회장이었다. 그녀는 이번 일로 발생한 모든 정신적, 물질적 손해를 완벽히 보상하겠다며 거듭 약속했다. 그 옆에 선 의붓아버지 윤산과 강진혁의 부친인 강 회장은, 이 상황이 가져올 달콤한 이권에 취해 입가에 번지는 비굴한 미소조차 숨기지 못하고 있었다.
  • 그 소란스러운 인파 한편에 강진혁이 서 있었다. 그는 뭐라 형용하기 힘든 복잡미묘한 눈빛으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 “......엄마.”
  • 목소리가 형편없이 갈라졌다. 타는 듯한 갈증에 옆에 놓인 물컵을 가리키자, 엄마가 움직이기도 전에 강진혁이 먼저 컵을 낚아채듯 가져와 내밀었다.
  • 물을 몇 모금 들이켜고 나서야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다. 나는 침대맡에 앉은 박 회장을 향해 속이 비칠 듯 투명하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 “할머니, 전 괜찮아요. 다들 가서 쉬세요.”
  • “겨우 이만한 상처 가지고 유난 떨 거 없어요.신경 쓰지 마세요.”
  • 박 회장이 입을 떼기도 전이었다. 강진혁이 씩씩거리며 날 선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 “원하는 게 있으면 그냥 똑바로 말해. 가증스럽게 괜찮은 척하지 말고.”
  • “미리 말해두는데, 지금이 무슨 조선 시대도 아니고 목숨 구해주면 혼인으로 갚는 그딴 구닥다리 신파극은 기대하지 마. 강 씨 집안 며느리 자리만 빼고,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 “당장 나가!”
  • 박 회장의 서슬 퍼런 호통이 병실 안을 울렸다. 단 한 번도 할머니에게 이런 취급을 받아본 적 없는 강진혁의 얼굴이 당혹감으로 일그러졌다. 강 회장 역시 아들의 철없는 언행에 참을성이 바닥났는지, 인사도 생략한 채 강진혁의 뒷덜미를 잡아채듯 병실 밖으로 끌고 나갔다.
  • 박 회장은 차가운 눈길로 내 엄마를 한 번 훑었다. 그 무언의 압박을 읽어낸 엄마는 서둘러 윤산의 팔을 끌며 자리를 비워주었다.
  • 병실 안에는 오직 나와 박 회장, 단둘만이 남았다. 한동안 무거운 정적이 흐른 뒤에야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이수야, 내가 정식으로 사과하마. 정말 미안하구나.”
  • “…….”
  • “진혁이 그 녀석이 워낙 앞뒤가 다르고 표현이 서툴러서 그래. 입이 험해서 네 마음에 생채기를 냈지?”
  • 원래 박 회장은 강진혁이 그저 좀 철이 없고 반항적인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번 인질 사건을 겪으며 그녀는 나름의 확신을 얻은 모양이었다. 이 정략결혼이 단순한 비즈니스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것을.
  • “넌 참 속이 깊은 아이다. 내가 사람을 잘못 봤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어쩌면 네가 정말 진혁이의 운명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 가슴 한구석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거, 계산기를 너무 세게 두드렸나. 박 회장이 내 '희생'에 감동한 나머지 나를 진짜 손자며느리로 삼겠다고 마음을 굳힌 것 같았다.
  • 하지만 내 계획에는 ‘진짜 결혼’ 따위는 없었다. 애초에 맺은 계약서에도 명시되어 있었다. 대외적으로만 약혼 관계를 유지하되, 실질적인 혼인은 하지 않는다. 강진혁이 후계자로 자리를 잡으면 나는 그 대가로 해외 지사 한 곳의 경영권을 온전히 넘겨받기로 했다.
  • 달콤한 사랑 고백이나 화려한 안주인 자리보다 내게 중요한 건 손에 쥐어지는 확실한 실리였다. 윤 씨 집안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오로지 나만의 제국을 세울 수 있는 실질적인 자본 말이다.
  • “할머니.”
  • “아니, 내 말 먼저 끝내마.”
  • 내가 입을 떼려 하자 박 회장이 손을 저어 가로막았다.
  • “이번에 너도 봤잖니. 진혁이 그 놈, 결코 피도 눈물도 없는 애가 아니다. 네가 의식을 잃고 있는 동안 한숨도 안 자고 여기서 버텼어. 제 몸 상한 건 돌보지도 않고 말이다.”
  • “…….”
  • “지금은 자존심 때문에 입으로만 아니라고 우기지만, 내가 걔 할머니다. 누구보다 잘 알지.”
  • 나는 힘 빠진 웃음을 지었다.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실소였다. 박 회장은 옆에 놓인 키위 하나를 집어 들더니 내게 내밀었다.
  • “진혁이는 이 키위 같은 놈이야. 겉은 까칠하고 못생겼어도 속은 아주 달콤하지. 우리 강 씨네 남자들이 다 그래. 밖에서 들리는 말에 휘둘리지 마라.”
  • 나는 씁쓸하게 입꼬리만 올렸다. 박 회장이 비즈니스에는 귀신같이 밝고 영민한 분인 줄 알았는데, 역시 가족 앞에서는 평범한 할머니가 되어버리는 모양이었다.
  • 나는 세상에서 남자 길들이는 일이 제일 질색이다. 우리 엄마도 두 번이나 남자들을 사람 만들어보겠다고 인생을 갈아 넣었지만, 결국 남은 건 지독한 피로뿐이지 않은가. 나에게는 타인을 위해 희생할 정신도 없거니와,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말을 믿을 만큼 순진하지도 않다.
  • 키위도 마찬가지다. 그 달콤함을 맛보려면 껍질을 까는 동안 손이 끈적해지는 수고를 감수해야 한다. 나는 그 불쾌한 과정이 끔찍하게 싫다.
  • 성인의 침묵은 곧 거절이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법한 상식인데, 박 회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 “당장 대답을 듣겠다는 건 아니다. 그저 시간을 두고 좀 더 지켜보렴.”
  • 태어나서 처음으로 내 선택을 후회했다. 이 목숨값으로 탄탄대로가 펼쳐질 줄 알았는데, 내 예상은 완전히 빗나갔다. 금빛 보상 대신 내게 찾아온 건, 끝도 없이 피곤한 귀찮음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