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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아침 6시, 알람도 없이 눈이 떠졌다.
  • 주방으로 내려가는 어머니가 기다렸다는 듯 미지긋한 우유 한 잔을 내밀었다.
  • “그분은?”
  • 내 물음에 어머니는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무심하게 대꾸했다.
  • “버릇없게. 아버지라고 불러.”
  • 나는 짧게 수긍하고는 더 대꾸하지 않았다. 어머니는 정성스럽게 껍질을 벗긴 포도를 내게 건네며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 “어젯밤에 술을 얼마나 퍼마셨는지, 새벽 세 시쯤에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더구나. 이마랑 다리를 좀 다친 모양이야. 당분간은 거동도 못 할 테니, 너도 괜히 가서 심기 거스르지 마라.”
  •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이며 포도를 씹었다.그가 다치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다. 내게 필요한 건 그저 그가 가진 '윤 씨'라는 성뿐이었으니까.
  • 강 씨 저택에 도착했을 때, 강진혁의 할머니인 박 회장은 손자를 호되게 몰아세우는 중이었다.
  • “네가 제정신이냐? 어떻게 이딴 대형 사고를 쳐! 너 하나 때문에 증발한 시가총액이 얼마인 줄이나 알아?”
  • 숙부와 아버지가 밤새 사태를 수습하는 동안 정작 사고 친 놈은 정신 못 차리고 밖으로 나돌 궁리뿐이라며, 박 회장의 호통이 거실을 울렸다.
  • 내가 거실로 들어서자 회장님의 비서가 내 손에 약병과 물컵을 슬쩍 쥐여주었다. 그녀는 익숙한 미소를 띠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 “이수 양, 회장님께서 아직 아침 약을 안 드셨어요.”
  • 나는 약을 받아 들고 곧장 박 회장에게 다가갔다.
  • “할머니, 제가 몇 번이나 말해요. 내 결혼은 내가 알아서 한다고요!
  • 어른들이 멋대로 점찍은 저 나무토막 같은 여자는 죽어도 싫어요! 난 무조건 채유리랑 결혼할 거니까 그렇게 아세요!”
  • 강진혁은 허리에 손을 얹은 채 억울하다는 듯 악을 질렀다.
  • “결혼 자율? 진혁아, 네가 아직도 소꿉장난하는 어린애인 줄 아니?
  • 네가 매일 빈둥거리며 사고만 치고 다니니, 내가 고심해서 유능한 안사람을 붙여주려는 것 아니냐. 그런데도 부족해? 나무토막? 세상에 저렇게 예쁘고 영리한 나무토막이 어디 있다고 그래!”
  • 박 회장은 속이 터지는지 거친 기침을 쏟아냈다.
  • 강진혁이 다시 입을 떼려던 찰나, 내가 먼저 약을 내밀었다.
  • “할머니, 화 푸세요. 건강 상하십니다.”
  • 내가 차분하게 약을 내밀자, 노발대발하던 할머니의 기세가 조금 누그러졌다. 하지만 고개를 돌려 나를 발견한 강진혁의 얼굴은 순식간에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 “누가 마음대로 할머니래? 너, 진짜 소름 끼치게 역겨워.”
  • 강진혁은 내뱉는 말마디마다 노골적인 경멸을 담아 쏘아붙였다.
  • “너는 네 집도 없어? 이른 아침부터 남의 집 안방까지 기어 들어와서 어떻게든 존재감 확인받고 싶어 안달 난 거야? 대답 좀 해보지 그래?”
  • “…….”
  • “윤 씨 집안 식구들은 알아? 네가 이렇게까지 계산적이고 뻔뻔한 애라는 거.”
  • 강진혁은 내 손에 들린 약컵을 마치 오물이라도 보듯 훑어내리더니 비릿한 실소를 흘렸다.
  • “향기도 없는 조화 주제에. 진짜 네가 뭐라도 되는 줄 아나 본데, 착각하지 마. 넌 내 인생에 끼어든 불청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니까.”
  • 비수가 섞인 말들을 사정없이 쏟아낸 강진혁은 아침 식사조차 거른 채, 폭풍 같은 기세로 저택을 빠져나갔다.
  • 박 회장님은 약을 삼키고는 깊은 한숨을 내뱉으셨다.
  • 평생을 거친 비즈니스 전쟁터에서 호령해 온 여장부였다. 두 아들 역시 훌령한 경영자로 키워냈지만, 유일한 손자 앞에서만큼은 속수무책이었다. 참으로 초라하고 쓸쓸한 뒷모습이었다.
  • 그녀가 내 손등을 가볍게 토닥이며 입을 열었다.
  • “네가 고생이 많구나. 이 녀석이 이토록 철없이 굴 줄은 몰랐다.”
  • 할머니가 나를 손자며느리로 낙점한 것은 내 능력뿐만 아니라 외모까지도 마음에 들어 하셨기 때문이었다. 손자를 제 품 안에서 키웠으니 그 취향 정도는 손바닥 보듯 꿰고 있다고 자신하셨던 게다. 하지만 공들여 준비한 이 정략결혼을, 손자는 온몸을 비틀어가며 거부하고 있었다.
  • 사실 강진혁이 왜 저토록 날을 세우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강 씨 가문의 유일한 후계자로 태어난 그는 원하는 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는 권력을 가졌다. 하지만 정작 그에게 허락되지 않은 단 한 가지는, 바로 ‘자유로운 선택권’이었다.
  • 그렇기에 그는 자신을 옥죄는 모든 통제를 증오했고, 그 갈망은 자유에 대한 집착으로 이어졌다. 아마 내 외모가 객관적으로 그의 취향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하필이면 내가 집안에서 정해준 ‘정략결혼 상대’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 사이에 애정 따위가 싹트는 것은 불가능한 기적에 가까웠다.
  • 나는 희미하게고개를 저었다.
  • “괜찮습니다, 전 상관없어요.”
  • 세상엔 좇아야 할 가치 있는 것들이 차고 넘친다. 그중에서도 감정은 가장 쓸모없는 소모품일 뿐이었다. 내 어머니는 진심을 다해 사랑했고 나까지 낳았지만, 그녀에게 돌아온 결과는 무엇이었나. 배신과 원망, 그리고 끝도 없는 비극뿐이었으니까.
  • 진짜 사랑? 천 원짜리 복권 한 장 당첨되어 본 적 없는 내게, 그런 기적 같은 감정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신기루일 뿐이였다.
  • 내 세계를 움직이는 유일한 동력은 오직 ‘이익’이다. 할머니가 나를 선택한 이유 역시 내게 첫눈에 반해서가 아니라, 철저히 내 이용 가치 때문이었다.
  • 3년 전, 해외 생활을 마치고 돌아온 나는 단 1년 만에 무능하기 짝이 없던 의붓아버지 윤산이 윤 씨 집안의 실권을 장악하도록 판을 짰다. 할머니는 그 포식자 같은 본능을 높이 사신 것이다.
  • “진혁이는 어릴 때 몸이 약해서 다들 금이야 옥이야 키웠다. 그랬더니 이 모양이 되었지. 좋게 말하면 순진한 거고, 솔직히 말하면 멍청한 게다. 이수야, 나는 네가 그 녀석을 하루빨리 제대로 된 사냥개로 만들어 주길 바란다.”
  • 그렇다. 나와 할머니 사이의 비밀스러운 합의. 그 최종 목표는 달콤한 신혼생활 따위가 아니라, 철부지 강진혁을 완벽한 경영자로 개조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를 길들이기 위한 온갖 수단을 강구해 왔고, 오늘도 새로운 전략 기획안을 들고 온 참이었다.
  • 하지만 아쉽게도, 그 플랜을 꺼내 보기도 전에 강진혁이 또다시 선을 넘어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