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

+ 서재에 추가하기

이전 화 다음 화

제3화

  • "돈은 이미 다 준비해 놨어. 대신 두 사람의 안전부터 확실히 보장해."
  • 안민규가 이 악문 소리로 말했다.
  • 흉터 남자는 비릿한 웃음을 흘리며 카메라 렌즈를 우리 쪽으로 돌렸다.
  • 화면 너머로 우리를 확인한 순간, 안민규의 동공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
  • "설하야! 한세아!"
  • 그는 당장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 처절하게 울부짖었다. 마치 우리의 안위가 제 목숨보다 소중하다는 듯이.
  • 하지만 나는 예리하게 알아챘다. 그의 시선이 오직 한세아에게만 끈적하게 들러붙어 있다는 것을.
  • 게다가 지금 한세아의 옷차림은 나와 완전히 달랐다. 무엇보다 어젯밤까지만 해도 난 안민규랑 같이 있었다.
  • 그러니 우리를 헷갈린다는 건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 "돈은 다 준비됐다고 했잖아! 지금 당장 그쪽으로 갈 테니까!"
  • 화면을 향해 악을 쓰던 안민규가 으르렁거렸다.
  • "그 여자들 머리카락 하나라도 건드렸다간, 네놈들 뼈도 못 추리게 만들어 버릴 줄 알아!"
  • 흉터 남자는 호탕하게 낄낄거렸다.
  • "역시 안 대표, 쿨해서 좋네."
  • 그 순간, 폐공장 밖에서 요란한 경찰 사이렌 소리가 울려 퍼졌다.
  • 순식간에 남자의 험악한 얼굴이 기괴하게 일그러졌다.
  • "이 미친 새끼가, 경찰을 불러?!"
  • 신경질적으로 통화를 끊어버린 흉터 남자는 품에서 시한폭탄 하나를 꺼내 들더니, 등을 맞대고 묶여 있는 나와 한세아의 결박 틈새로 그것을 쑤셔 넣고는 곧장 타이머를 눌러버렸다.
  • "아가씨들, 안 대표가 룰을 깼으니 어쩔 수 없지. 당신들은 여기서 사이좋게 뒤져줘야겠어!"
  • 할 일을 마친 납치범 무리가 썰물처럼 빠져나가고, 이 거대한 폐공장에는 오직 우리 둘만이 남겨졌다.
  • '띡, 띡-'
  • 줄어드는 카운트다운 소리가 마치 사신의 낫처럼 서늘하게 목덜미를 옥죄어 왔다.
  • "사람 살려! 살려주세요! 민규 오빠, 나 좀 살려줘!"
  • 한세아는 미친 듯이 발버둥 치며 비명을 질러댔고, 그럴수록 거친 밧줄이 여린 살을 파고들어 붉은 피가 배어 나왔다.
  • 나는 붉은빛을 내며 곤두박질치는 숫자를 허망하게 바라보며, 차갑게 식어가는 심장을 느꼈다.
  • 내 끝이, 고작 이런 거였나?
  • 그 인간쓰레기가 치밀하게 쳐놓은 사기극의 제물이 되어서?
  • 바로 그때, 육중한 철문이 '쾅!' 하는 굉음과 함께 뜯겨 나갔다.
  • 흙먼지를 일으키며 안민규가 수십 명의 경호원들을 이끌고 들이닥쳤다.
  • "윤설하! 어디 있어?!"
  •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른 안민규가 허둥지둥 주변을 살피며 절박하게 울부짖었다.
  • 얼어붙었던 내 마음 한구석에, 아주 얄팍한 희망의 불씨가 피어올랐다.
  • 어쩌면, 이 모든 게 그가 파놓은 함정이 아닐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는 정말 나를 사랑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 그동안의 일들이 전부 내 과대망상이 만들어낸 끔찍한 오해였던 건 아닐까?
  • "나 여기 있어!"
  • 나는 힘을 쥐어짜 내어 그를 불렀다.
  • 그 처절한 외침을 들은 안민규가 홱 고개를 돌려 내가 있는 쪽을 쳐다보았다.
  • 찰나의 순간, 퀴퀴한 먼지가 맴도는 허공에서 우리의 시선이 얽혀들었다.
  • 그리고 나는 똑똑히 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스치고 지나간, 찰나의 망설임과 잔혹한 살기를.
  • 내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에, 그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내 옆으로 몸을 날렸다.
  • 내 등 뒤에 묶인 한세아를 와락 끌어안는 그 동작은, 수천 번은 연습해 본 것처럼 지독하게 자연스럽고 애틋했다.
  • "세아야! 무서워하지 마, 내가 왔잖아!"
  • 그가 귓가에 속삭이듯 다정하게 불렀지만, 내 귀에는 그 이름이 뼛속까지 시리게 내리꽂혔다.
  • 그는 일말의 주저함도 없이 한세아를 옥죄고 있던 밧줄을 풀어 던지고는, 그녀의 몸을 제 품에 감싸 안았다.
  • "오빠! 저 폭탄 곧 터진단 말이야! 빨리 여기서 나가야 돼!"
  • 한세아가 미친 듯이 깜빡이는 타이머를 가리키며 악을 썼다.
  • 안민규는 고작 30초밖에 남지 않은 숫자를 한 번, 그리고 여전히 시멘트 기둥에 결박되어 있는 나를 한 번 번갈아 보았다.
  • "설하야..."
  • 놈이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달싹이며 무언가 변명을 내뱉으려 했다.
  • 그러나 다음 순간, 그는 세아를 번쩍 안아 들고는 단 한 번도 뒤돌아보지 않은 채 출구를 향해 내달렸다.
  • "미안해! 한 사람밖에 구할 수 없었어!"
  • 매캐한 바람을 타고 날아온 그 비겁한 목소리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내 심장을 잔인하게 난도질했다.
  • 콰앙-!
  • 고막을 찢을 듯한 거대한 파열음이 폐공장을 뒤흔들었다.
  • 시뻘건 화마가 내 시야의 모든 것을 집어삼켰다.
  • 의식이 아득하게 끊어지는 마지막 순간, 나는 어둠 속으로 빠져나가는 안민규의 등을 두 눈에 끔찍하게 새겨 넣었다.
  • 그는 제 몸을 내던져 한세아를 완벽하게 보호하고 있었다. 그녀의 옷깃에 작은 먼지 하나 튀지 못하도록.
  • 반면 나는, 길가에 나뒹구는 쓰레기처럼 버려져 무참한 불길 속에서 한 줌 재로 바스라지고 있었다.
  • 안민규, 이 악마 같은 새끼.
  • 그 빌어먹을 안면실인증, 오직 나 윤설하에게만 도지는 선택적 불치병이었구나.
  • 생사가 오가는 그 절박한 순간에도, 너는 애초에 답을 정해두고 있었던 거야.
  • 만약 내가 여기서 살아남는다면, 반드시 뼈저린 대가를 치르게 해주마.
  • 네가 내뱉는 숨결 하나조차 지옥의 고통이 되도록, 뼛속까지 짓밟아 주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