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안면실인증'. 그럴싸한 병명까지 들먹인 이 모든 쇼는, 결국 나를 기만하고 당당하게 다른 여자들과 뒹굴기 위한 천박한 핑계에 불과했다.
- 남편의 병을 고치겠다며 내 모든 걸 걸고 세웠던 계획들이, 이 순간 처참한 코미디로 전락해 버렸다.
- "안민규, 일어나."
- 나는 바닥에 엎드린 안민규를 싸늘하게 내려다보며 내뱉었다.
- 안민규는 잠시 흠칫하더니, 이내 내가 용서라도 한 줄 알았는지 벌떡 일어나 내 어깨를 감싸 안으려 들었다.
- "여보, 역시 자기가 최고야. 얼른 집에 가자, 응? 내가 맛있는 거 해줄게."
- 나는 소름 끼치도록 역겨운 그 손길을 쳐내듯 피했다.
- "내 살결 냄새로 사람을 알아본다고 했지?"
- 안민규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 "그, 그럼! 자기 향수 냄새를 내가 어떻게 잊어."
-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려 웃었다. 물론 눈에는 한 치의 웃음기도 담겨 있지 않았다.
- "근데 어쩌지? 나 오늘 뿌린 거, 우리 회사에서 아직 출시도 안 한 테스트용 향수인데. 분명 이틀 전에 말해줬잖아."
- 순간, 안민규의 안면 근육이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관자놀이를 타고 굵은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 "나, 나 지금 너무 취해서… 그래서 코도 제정신이 아니었나 봐."
- 궁지에 몰리고도 얄팍한 변명으로 이 상황을 모면하려는 꼴이 우스웠다.
- 그때, 한세아가 비웃음 섞인 콧방귀를 뀌며 안민규의 귓가로 바짝 다가왔다. 우리 셋만 들릴 법한 은밀한 목소리였다.
- "오빠. 윤설하 저 여자, 소문만큼 멍청하진 않은가 봐?"
- 안민규는 사색이 된 얼굴로 잇새를 꽉 깨물고 으르렁거렸다.
- "입 닥쳐!"
- 그러고는 고개를 돌려, 언제 그랬냐는 듯 애절한 순애보 연기를 펼치기 시작했다.
- "설아야. 네가 믿든 안 믿든, 내 마음속엔 진짜 너 하나뿐이야."
- "오늘 일은 내가 다 사과할게. 대신 일주일 뒤에 있을 자선파티에서 내 회사 지분을 전부 네게 양도하겠다고 발표할게. 네가 내 유일한 상속자라는 걸 세상 사람들에게 다 증명해 보이겠다고!"
- 예전의 윤설하였다면 그 제안을 단칼에 거절하고, 굳건한 믿음으로 그를 감싸 안았겠지.
- 하지만 그의 완치 진료 기록을 두 눈으로 확인하고, 휴대폰에 수십 명의 여자들이 '자기 1', '자기 2' 따위로 저장되어 있던 걸 보기 전의 이야기였다.
- 지금은 그저, 이 쓰레기가 스스로 판 무덤에서 어떻게 발악하는지 지켜보고 싶을 뿐이다.
- "좋아. 기대할게, 자기야."
-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아내인 양, 사르르 웃으며 그의 팔짱을 꼈다.
- 이 모든 대화는 하이에나 같은 재벌 2세들의 카메라에 고스란히 담겼다. 이젠 어쭙잖은 변명으로 약속을 주워 담는 건 불가능할 것이다.
- 그의 어깨에 다정하게 기대는 순간, 그의 몸이 통나무처럼 뻣뻣하게 굳어버리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 안민규는 깊은 한숨을 삼키더니, 억지로 내 허리를 감싸 안고 카메라를 향해 어색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 "여, 여보. 나 좀 피곤하네. 얼른 들어가자, 응?"
- "그래."
- 나는 고개를 비스듬히 빼며 한세아를 향해 속삭였다.
- "다음에 뵙죠, 세아 씨."
- 방금 전 그녀가 던졌던 역겨운 도발을, 이자까지 쳐서 고스란히 갚아주었다.
- 한세아가 독기 어린 눈으로 우리를 노려보며 이를 갈았다.
- "내일 봬요, 윤설하 씨."
- 내일?
- 나는 쥐고 있던 숙취해소제 병을 꽉 움켜쥐었다. 찌그러진 플라스틱 병에서 기괴한 마찰음이 터져 나왔다.
- 하지만 파티보다 먼저 나를 찾아온 것은, 다름 아닌 끔찍한 납치극이었다.
- 약속된 파티 하루 전날, 정신을 잃었다가 깨어난 내 눈앞에 보인 것은 한세아의 얼굴이었다.
- 한세아는 내 귓가에서 연신 훌쩍거리며 불안하게 중얼거렸다.
- "민규 오빠는 왜 아직도 안 오는 거야? 우리 이대로 죽는 거 아니지?"
- 그 징징거리는 소리에 골이 다 울릴 지경이라, 나는 차갑게 쏘아붙였다.
- "시끄러우니까 입 좀 다물지? 그럴 시간에 힘이나 아껴."
- 나는 휑한 폐공장 내부를 샅샅이 훑어보며 도주 경로가 있을지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 미처 돌파구를 찾기도 전에, 우리를 이곳으로 끌고 온 납치범 무리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 "이 여자들이 안민규가 끼고 돈다는 그 애들인가?"
- 얼굴에 흉측한 칼자국이 난 사내가 서늘한 단도를 짤그락거리며 우리를 희롱하듯 훑어보았다.
- 묘하게 낯이 익은 얼굴이었지만, 흐려진 의식 탓에 그가 누군지 좀처럼 떠오르지 않았다.
- 내 집 침대에서 여기까지 끌려오는 데 걸린 시간은 고작 하룻밤뿐이었다.
- 내가 한 치의 기척조차 느끼지 못한 채 당했다는 건, 이 짓을 꾸민 배후가 내부인인 안민규라는 것 외에는 도무지 설명이 되지 않았다.
- 깡패 놈들 손을 빌려 나를 조용히 처리하고, 한세아를 완벽한 안주인으로 앉히려는 수작인가?
- "미인이 둘씩이나, 안민규 그 새끼 정말 여자 복 하나는 타고났군."
- 흉터 남자가 바짝 다가와 휴대폰 카메라를 들이대며 우리 얼굴을 찍어댔다. 액정을 몇 번 두드리던 남자는 느긋하게 영상 통화 버튼을 눌렀다.
- 얼마 지나지 않아, 스피커 너머로 잔뜩 다급해진 민규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 "허튼짓하지 마! 돈은 원하는 만큼 줄 테니까, 절대 몸엔 털끝 하나 건드리지 마라!"
- "사진 봤냐?"
- 흉터 남자가 이죽거렸다.
- "몸값 1,000억 원. 오늘 밤 안으로 입금해. 날 넘기면 이년들 모가지를 하나씩 썰어버릴 테니까."
- "그럼 내일 아침 뉴스 1면에, 재계 신흥 재벌의 조강지처와 첩년이 참혹하게 유린당한 채 변사체로 발견됐다는 특종이 도배되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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