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사무실로 돌아와 문을 걸어 잠갔다. 문에 등을 기댄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하지만 울지 않았다. 눈물만큼 세상에서 쓸모없는 건 없으니까.
- 나는 곧바로 휴대폰을 꺼내 방금 찍어둔 영상을 클라우드에 백업했다. 혹시라도 서진혁이 달려들어 삭제할 것을 대비해, 일부러 망원 카메라를 미끼로 던져둘 생각이었다.
- 똑, 똑-!
- 얼마 지나지 않아 신경질적인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서진혁이 문고리를 덜컥거리며 짜증 섞인 목소리로 외쳤다.
- “이수진, 문 열어.”
- “쇼케이스 시작까지 한 시간밖에 안 남았어. 언제까지 애처럼 굴 거야?”
- 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흐트러진 표정을 다잡았다. 그리고 차갑게 문을 열었다.
- 내 앞에 선 서진혁은 잔뜩 미간을 찌푸린 채였다. 삐딱하게 돌아간 넥타이, 그리고 그에게서 풍겨오는 강희주의 진한 향수 냄새. 그는 대답도 없이 손부터 내밀었다.
- “카메라 내놔.”
- 나는 일부러 눈을 깜박이며 천연덕스럽게 되물었다.
- “무슨 카메라?”
- 서진혁의 인내심이 바닥을 쳤는지, 그는 성큼 안으로 들어와 내 어깨를 거칠게 잡아챘다.
- “이수진, 나 지금 너랑 유치한 장난질할 시간 없어! 당장 사진 지워!”
- “이거 밖으로 새 나가는 순간, 우리가 몇 년 동안 피땀 흘려 쌓아온 게 전부 박살 난다는 거 몰라?”
- 나는 몸을 비틀어 그의 손을 뿌리치고는 서늘한 시선으로 그를 쏘아보았다.
- “서진혁, 지금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명령질이야?”
- “내 남편으로서? 아님 상사로서? 그것도 아니면 강희주 전담 가슴 모델러로서?”
- 정곡을 찔린 듯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 “너 꼭 그렇게 비꼬아야 속이 시원하겠어?”
- “이건 다 비즈니스야! 우린 당당하다고!”
- “생각을 해봐. 이번 신제품 타깃을 고려하면 희주처럼 몸매 좋은 애가 필요하잖아. 너처럼 A컵도 안 되는 여자한테 본을 뜨겠어?”
-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으며 노골적인 멸시가 담긴 눈빛을 던졌다.
- 가슴 한구석이 날카로운 칼에 베인 듯 따끔거렸다. 회사를 키우겠다고 밤낮없이 기획안을 짜고 현장을 뛰어다니다 살이 10킬로나 빠졌다. 그 과정에서 줄어든 가슴 사이즈가, 이제 와서 그가 바람을 피운 정당한 핑계가 되다니.
- 참담할 정도로 역겨운 논리였다.
- 나는 팔짱을 낀 채 싸늘하게 실소를 흘렸다.
- “그렇게 당당하고 깨끗하다는데, 대체 뭐가 무서워서 이래?”
- “오히려 잘됐네. 우리 제품을 위해 두 사람이 얼마나 예술적으로 몸 바쳐 헌신했는지 세상 사람들이 다 알면, 홍보 효과 제대로겠는데?”
- 서진혁의 관자놀이가 파르르 떨렸다. 그는 목소리를 낮추고 한결 부드러워진, 아니 비굴해진 어조로 속삭였다.
- “수진아, 제발 부탁할게.”
- “오늘 우리한테 얼마나 중요한 날인지 알잖아. 판 망치지 말자, 응?”
- “사진만 지워주면 내가 약속할게. 앞으로 희주랑 사적으로 거리 확실히 둘게.”
- 그는 마치 대단한 양보라도 하는 양 진지한 얼굴로 나를 설득하려 들었다. 바로 그 순간, 약속이라도 한 듯 강희주가 문을 밀치고 들어왔다. 그녀의 뒤로는 이른바 ‘강희주 수호대’ 노릇을 자처하는 직원들이 우르르 따라붙어 있었다.
- 나도 모르게 헛웃음이 터질 뻔했다. 불륜녀 하나를 가운데 두고 보호한답시고, 조강지처이자 회사의 기둥인 나를 공공의 적으로 몰아세우는 꼴이라니.
- 강희주는 눈가를 발갛게 적신 채 가련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 “수진아, 진혁 씨랑 그만 싸워. 다 내 잘못이야.”
- “내가 생각이 짧았어. 회사를 위해 헌신한다는 게 그만… 화풀이하고 싶으면 나한테 해.”
- 그러더니 정말로 손을 들어 제 뺨을 때리려는 시늉을 했다.
- “오늘 쇼케이스만 망치지 않게 해준다면, 난 뭐든 할게. 제발…”
- 서진혁이 잽싸게 그녀의 손목을 낚아채며 세상 무너진 것 같은 얼굴을 했다.
-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쳤어?”
- “네 잘못 아니니까 자기 몸 상하게 하지 마!”
- 강희주는 기다렸다는 듯 서진혁의 품으로 무너져 내리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 “두 분이 나 때문에 싸우는 거 보기 괴로워서 그래요… 전… 전 그냥 시키는 대로 일하는 직원일 뿐인데…”
- 옆에 있던 김 과장이 크게 한숨을 내쉬며 가당찮다는 듯 거들었다.
- “이수진 씨, 이쯤에서 좀 그만합시다.”
- “희주 씨는 속도 깊은 애예요. 테스트 일정 맞춘다고 뜨거운 석고에 데여서 피부까지 빨개졌다니까?”
- “사람을 이렇게까지 몰아붙이는 건, 좀 너무한 거 아닙니까?”
- “맞아요. 다 회사 잘되자고 한 일인데, 매일 얼굴 보는 사이에 이럴 것까지 있나요?”
- 그들의 ‘우리끼리 단결’ 신파극을 보고 있자니 위장이 뒤틀리는 기분이었다. 서진혁은 강희주를 품에 끼고는, 나를 향해 얼음장 같은 눈빛을 던졌다.
- “이수진, 이제 만족해? 모두를 이렇게 곤란하게 만드는 게 네가 진짜 원하던 거야?”
- 나는 천연덕스럽게 숨을 들이마시고는 입꼬리를 차갑게 올렸다. 연극을 계속하고 싶다 이거지? 좋아, 기꺼이 주연 배우를 시켜주마.
- “알았어, 알았어. 다들 왜 이렇게 정색하고 그래? 그냥 농담 좀 해본 건데.”
- 나는 한 걸음 다가가 강희주의 어깨를 톡톡 두드렸다. 그녀는 화들짝 놀라며 겁먹은 토끼처럼 서진혁의 품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었다. 나는 생긋 미소를 지으며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 “미안해, 희주야. 내가 잘못했네. 요즘 쇼케이스 준비하느라 예민했나 봐.”
- “너도 회사 위해서 고생했다는 거 잘 알아. 방금은 내가 너무 욱했어.”
- “그 사진들, 지금 바로 지워줄게. 다들 보는 앞에서.”
- 내 태도가 180도 바뀌자 현장의 공기가 순식간에 굳었다. 서진혁조차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쳐다봤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그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모든 사진을 선택하고 삭제 버튼을 눌렀다.
- “자, 다 지웠어. 됐지?”
- 카메라를 가볍게 흔들어 보이며 떳떳하게 웃어 보였다. 서진혁은 그제야 눈에 띄게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긴장을 풀었다. 김 과장이 가장 먼저 비굴한 웃음을 터뜨리며 아부를 떨었다.
- “거 봐요, 제가 뭐랬습니까! 우리 이 본부장님이 얼마나 공사 구분 확실하고 그릇이 크신 분인데! 역시 대인배십니다, 본부장님!”
- “자자, 시간 지체하지 말고 나갑시다. 곧 행사 시작이에요!”
- 서진혁에게 이끌려 방을 나가던 강희주가 슬쩍 뒤를 돌아 나를 쳐다봤다. 그녀의 입꼬리에는 승리자의 우쭐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나는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 지금 마음껏 비웃어 둬.
- 이제 곧, 그 입꼬리를 다시는 올리지 못하게 만들어 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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