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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사랑의 완벽한 복수

첫사랑의 완벽한 복수

Astraea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 정신 상태 안정 소견서 한 장을 손에 쥔 채 귀국했다.
  •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전남친 박준혁에게서 문자가 들어왔다.
  • [돌아와서 반가워, 지안아.]
  • 일주일 뒤, 나는 카페에서 그와 마주쳤다.
  • 그의 새 아내와 함께.
  • 내 대학 후배, 강하린.
  • “선배, 오랜만이네!”
  • 강하린은 내가 가장 좋아하던 하얀 원피스를 입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 박준혁의 시선이 그녀의 옷차림에 닿는 순간, 얼굴이 싸늘하게 굳었다.
  • “그 옷, 왜 입었어? 당장 갈아입어.”
  • 세 달 뒤.
  • 나는 병상에 누워 있었다.
  • 얼굴은 핏기 하나 없이 창백했고, 입술은 바짝 말라 있었다.
  • “신장이 적합하는 사람은 너뿐이야.”
  • 나는 박준혁을 보며 조용히 말했다.
  • “줄지 말지, 네가 정해.”
  • 그는 이를 악물고 동의서에 사인했다.
  • “널 위해서라면 뭐든 할 수 있어.”
  • 결혼식 당일.
  • 하객석은 빈자리 하나 없이 꽉 들어차 있었다.
  • 박준혁이 내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 “지안아, 드디어 오늘이네.”
  • 나는 마이크를 받아들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 시선 끝에는 대형 스크린이 있었다.
  • “여러분.”
  • 나는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 “오늘, 재밌는 구경 하나 시켜 드릴게요.”
  • 그때였다.
  • 내 뒤에서 강하린이 천천히 무대 위로 올라왔다.
  • 그녀의 손에는 임신 확인서가 들려 있었다.
  • “이제 시작인데.”
  • 우리는 서로를 마주 보며 웃었다.
  • “안 그래? 전남편.”
  • ……
  • 나는 서류 맨 아래에 ‘서지안’ 세 글자를 적어 넣었다.
  • 펜촉이 종이를 긁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 맞은편에 앉은 금발 의사가 늘 그렇듯 반듯한 미소를 지었다.
  • “서지안 씨, 축하드립니다. 평가 결과가 아주 좋게 나왔어요. 박준혁 씨도 기뻐하시겠네요.”
  • 좋은 결과라니.
  • 발톱은 전부 뽑히고, 모난 곳은 죄다 깎여 나가고,
  • 악몽을 꾸다가도 소리 한 번 제대로 못 지르는 사람.
  • 그런 상태를 저 사람들은 ‘좋다’고 불렀다.
  • 나는 입꼬리를 천천히 끌어올렸다.
  • 그리고 도장이 찍힌 소견서를 받아들었다.
  • 얇고 가벼운 종이 한 장.
  • 하지만 이건 내가 그 도시로 돌아갈 수 있게 해 주는 유일한 허가였다.
  • 5년 동안 순한 척, 얌전한 척, 완전히 길들여진 척하며 버틴 끝에 겨우 손에 넣은 종이였다.
  • 창밖의 구름이 서서히 걷혔다.
  • 익숙한 도시의 윤곽이 비행기 아래로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
  • 심장이 묵직하게 내려앉았다가, 다시 세게 뛰기 시작했다.
  • 박준혁.
  • 나 돌아왔어.
  • 착륙 후 휴대폰 전원을 켜자마자 문자 한 통이 들어왔다.
  • [돌아와서 반가워, 지안아.
  • 기억해. 넌 영원히 내 거야.]
  • 박준혁이었다.
  • 겨우 몇 글자뿐인데도 숨이 턱 막혔다.
  • 여전했다.
  • 문자 몇 줄만으로도 사람 숨통을 조여 오는 그 집요한 소유욕은, 5년 전과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 그는 늘 그런 식이었다.
  • 내 꿈을 짓밟을 때도, 내 자존심을 무너뜨릴 때도,
  • 언제나 다정한 얼굴로 가장 잔인한 말을 골라 했다.
  • “지안아, 넌 너무 말을 안 들어.”
  • 그는 손끝으로 내 뺨을 부드럽게 쓸었다.
  • “바깥세상은 널 망가뜨려.
  • 넌 조용한 데 있어야 해.
  • 아무것도 보지 말고, 아무것도 듣지 말고, 나만 보면 돼.”
  • 그래서 나는 해외로 보내졌다.
  • 겉으로는 유학.
  • 실제로는 감금.
  • 그가 마련한 저택은 지나치게 아름다웠다.
  • 유능한 사용인들이 있었고, 빈틈없는 경비가 있었고, 원하기만 하면 무엇이든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대신 밖으로는 한 발짝도 나갈 수 없었다.
  •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
  • 내 정신 상태를 평가한다는 저 금발 의사가 찾아왔다.
  • 나는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을 줬다.
  • 손마디가 하얗게 질릴 정도로.
  • 5년 동안 나는 많은 걸 배웠다.
  • 감시 카메라를 향해 웃는 법.
  • 통화 너머로 달콤한 목소리로 그리움을 속삭이는 법.
  • 그리고 미움과 공포, 분노와 절망을
  • 모조리 잘게 부숴 항우울제와 함께 삼켜 버리는 법까지.
  • 그제야 박준혁은 확신했을 것이다.
  • 자신이 길들이던 카나리아가 완전히 얌전해졌다고.
  • “지안아!”
  • 익숙한 목소리가 공항의 소음을 가르고 날아들었다.
  • 고개를 들자, 절친 한소민이 멀리서 손을 흔들고 있었다.
  • 나는 그녀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걸어갔다.
  • 그리고 그녀가 두 팔을 벌리자, 말없이 몸을 맡겼다.
  • 짧은 포옹이었다.
  • 잠깐이었지만, 온몸에 들러붙어 있던 한기가 조금은 가시는 것 같았다.
  • 한소민의 차에 올라타자 창밖 풍경이 빠르게 뒤로 밀려났다.
  • 분명 내가 알던 도시인데도, 어쩐지 전부 낯설었다.
  • 한소민은 차를 모는 내내 쉬지 않고 말을 쏟아냈다.
  • 지난 몇 년 사이 바뀐 것들, 새로 생긴 건물들, 사라진 가게들.
  • 그러다 어느 순간, 그녀의 말이 뚝 끊겼다.
  • “지안아.”
  • 한소민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 “박준혁… 결혼했어.”
  • 나는 창밖을 본 채 담담하게 대답했다.
  • “알아.”
  • 한소민이 놀란 듯 나를 돌아봤다.
  • 나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돌려 그녀를 마주했다.
  • “그래서 돌아온 거야.”
  • 한소민이 운전대를 쥔 손에 힘을 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