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화
- 언니가 물을 가지러 간 사이,
- 나는 휴대폰을 켜서 약혼식 단톡방에 들어갔다.
- 민서아가 사진을 한 묶음 올렸다.
- 전부 박태율이랑 다정하게 붙어 있는 사진이었다.
- 바닷가도 있고, 레스토랑도 있고, 호텔 방도 있었다.
- 가장 오래된 건 촬영 날짜가 여섯 달 전.
- 여섯 달 전.
- 잠깐 생각해 봤다.
- 그날, 바로 내 생일이었다.
- 박태율은 출장 간다고 했고, 하루 종일 전화 한 통 없었지.
- 새벽까지 기다리다 메시지 보내자 그는 “바빠” 한 줄만 보냈다.
- 이런 거 하느라 바빴구나.
- 나는 계속 아래로 넘겼다.
- 다음 사진. 박태율이 민서아 허리를 감고 있었다. 배경은 내가 제일 좋아하던 그 프렌치 레스토랑.
- 언제는 너무 비싸다며, 10년을 사귀는 동안 한 번도 안 가더니.
- 또 그다음, 민서아 손에 다이아 반지가 끼어 있었다.
- 정말 비둘기알만 했다.
- 캡션에는 “그가 준 반지. 너무 행복해.” 라고 적혀 있었다.
- 맨 위로 올려서 촬영 시간을 확인했다.
- 석 달 전.
- 박태율은 나에게서 돈 빌려갔다.
- 회사 자금이 막혔다며 제발 도와달라고 했다.
- 나는 내 적금을 털고, 언니한테도 한 번 더 빌려서, 겨우겨우 3천만을 쥐여줬다.
- 그는 그 돈으로, 민서아한테 다이아 반지를 사 준 거다.
- 나는 폰을 내려놨다.
- 눈을 감았다.
- 머릿속에 장면들이 번쩍번쩍 스쳤다.
- 초등학교 여름캠프. 민서아랑 2층 침대에서 함께 잘 때.
- 민서아가 말했다.
- “하리야, 우리 평생 베프 하자.”
- 그리고 대학교 때.
- 민서아가 남자친구랑 싸우고 한밤중에 나한테 전화해서 엉엉 울자 나는 택시를 타고 도시 반을 건너가서 옆을 지켰다.
- 사회에 나와서는, 이직할 때마다 내가 이력서 손봐줬다.
- 그녀는 말했다.
- “신하리, 넌 정말 내 최고의 친구야.”
- 눈을 떴다.
- 창밖 비는 점점 굵어졌다. 언니가 뜨거운 물 한 잔을 들고 와서 내 옆에 앉았다.
- “하리야, 울고 싶으면 울어.”
- 나는 그 컵을 바라봤다.
- “안 울어.”
- “왜?”
- 고개를 저었다.
- 슬프지 않은 게 아니다.
- 누구를 위해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 박태율? 민서아? 아니면 십몇 년을 바보처럼 살던 나?
- 언니가 한숨을 쉬고, 커피를 내 손에 쥐여줬다.
- 나는 컵을 꽉 쥐었다.
- 뜨거운 커피가 손바닥을 지졌다.
- 좀 아팠다.
- 그래도 참을 만했다.
- 그다음 이틀, 회사에 휴가를 내고 언니랑 집에서 짐을 쌌다.
- 거실 바닥엔 크고 작은 박스가 쌓였다.
- 박태율, 민서아랑 관련된 건 전부 하나씩 다 박스에 처넣었다.
- 커플 쿠션, 커플 사진, 그가 준 시계, 민서아가 떠준 목도리……
- 싹 다 포장. 이 쓰레기 더미, 버릴 거다.
- 다락방의 낡은 나무 상자를 뒤지다가, 소가죽 봉투 하나가 툭 떨어졌다.
- 열어 보니 차용증이 한 장.
- 박태율이랑 막 창업했을 때, 나한테 돈 빌리며 썼던 그 종이였다.
- 그제야 확 떠올랐다. 이 10년 동안, 창업이니 자금난이니 적자 메우기니 하면서, 그가 나한테 돈을 수없이 빌린 사실이.
- 나는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다. 연인이면 굳이 깐깐하게 나눌 필요 없다고 믿었으니까.
- 상자엔 사진 뭉치도 있었다. 매해 내가 그를 위해 찍어 준 것들.
- 그가 졸업하고, 승진하고, 오픈할 때마다, 나는 큰돈 들여서 파티를 해주고 기념사진을 남겼다. 그의 인생을 내 인생보다 더 소중히 여겼다.
- 옆의 작은 상자에는, 그가 내게 줬던 선물이 전부 들어 있었다.
- 나는 하나씩 꺼냈다.
- 제일 싼 건 열쇠고리 1,300원. 제일 비싼 건 목걸이, 40,000원.
- 10년. 전부 합쳐도 70만 원이 안 됐다.
- 폰 알림이 울렸다. 민서아가 SNS에 올렸다.
- 반지를 자랑했다. 다이아 반짝였고, 캡션은 이랬다.
- 내 남자만의 편애.
- 해시태그에는 이 반지가 2천만 원라고 찍혀 있었다.
- 화면을 보다가, 피식 웃음이 났다.
- 씁쓸했고, 우스웠다.
- 그가 돈 없을 땐, 나는 있는 거 다 끌어모아 도왔다.
- 그가 돈이 생기자, 그의 다정함과 통 큰 씀씀이는 전부 내 약혼자를 가로챈 여자에게 갔다.
- 10년의 진심, 결국 값어치가 한 푼도 없었다.
- 나는 웃음을 거두고, 캡처해서 저장했다. 이체 내역, 소비 영수증, 차용증. 전부 하나씩 정리해 암호 폴더에 넣었다.
- 이 계산, 끝까지 깔끔하게 할 거다.
- 정리 막 끝냈는데, 폰이 울렸다. 박태율한테서 온 거였다.
- 사과나 변명이라도 하겠지 싶었다. 열어 보니, 차갑게 한 줄.
- “약혼식 장소 대관비, 케이터링, 그리고 지난 10년간 내가 너한테 쓴 모든 비용. 총 8천5백만 원. 빨리 송금해. 서로 깨끗하게 끝내자.”
- 나는 화면을 노려봤다. 손끝에 힘이 살짝 들어갔다.
- 깨끗하게 끝내자고?
- 바람핀 건 그고, 배신한 것도 그고, 내 약혼식을 망친 것도 그인데, 이제 와서 내가 돈을 갚으라고?
- 나는 두 글자만 보냈다.
- “기다려.”
- 그리고 그의 메시지를 캡처해서 증거 폴더에 추가했다.
- 언니가 커피를 들고 와서 내 폰 화면을 보더니, 부들부들 떨다가 컵을 탁 내려놨다.
- “감히 어떻게 이래? 하리야, 우리 소송 걸자!”
- 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따뜻한 액체가 목을 타고 내려갔지만, 마음은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 “걱정 마. 소송 걸 거야. 근데 지금은 아니야.”
- 난 그가 가장 찬란하게 빛날 때, 가장 처참하게 나가떨어지게 만들 거거든.
- 창밖 비가 그쳤다. 구름 사이로 햇빛이 들어와, 정리해 둔 증거 위에 내려앉았다.
- 어떤 건, 부서지면 그냥 거기까지다.
- 하지만 나한테 빚진 건, 한 푼도 빼지 말고 돌려받을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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