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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화

  • 차진우는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 “그건 안 돼. 하나는 임신 중이야. 나 없이 이 바닥에서 버틸 수 있을 리가 없잖아. 전 직장 사람들에게 보복이라도 당하면 어쩌라고?” “다른 조건은 다 들어줄게. 하지만 하나와 결혼하는 것만큼은 양보 못 해.” “설아, 기분이 안 좋은 건 알겠지만, 벌을 주든 욕을 하든 나한테만 해. 하나는 아무 죄도 없어. 그 사람은….”
  • 나는 비릿한 실소를 터뜨리며 그의 말을 잘랐다.
  • “진우아, 농담 좀 해본 건데 너무 진지한 거 아냐?” “나 임설아가 언제부터 남이 버린 쓰레기에 욕심냈다고. 특히 너처럼 신의도 없는 물건은 쳐다만 봐도 눈이 오염되는 기분이라.”
  • 내 직설적인 화법에 차진우의 안색이 순식간에 붉으락푸르락 변했다. 그는 결국 싸늘하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었다.
  • “임설아, 5년이 지나도 여전히 제멋대로에 오만하구나.” “하나를 좀 본받아 봐. 배려심 있고 조신한 태도를 배워야지. JS 그룹의 배경이 없다면, 네 그 지랄맞은 성격을 받아줄 남자가 이 바닥에 한 명이라도 있을 것 같아? 누가 진심으로 너랑 결혼하고 싶어 하겠냐고.”
  • 가당치도 않은 훈계질에 신물이 난 나는, 우리 둘의 이니셜이 새겨진 만년필을 집어 들고 차갑게 돌아섰다.
  • “내가 어떤 모습이든, 네가 판단할 자격은 아니야.”
  • 창고를 빠져나와 정원 회랑을 걷던 중, 민하나와 마주쳤다. 나를 발견한 그녀의 눈에 당혹감이 스쳤으나, 이내 온화한 미소로 위장하며 다가왔다.
  • “설아 씨, 마침 감사 인사를 전하려던 참이었어요. 회장님이 마련해 주신 객실이 정말 근사하더라고요.”
  • 내가 거리를 두려 한 걸음 물러서자, 그녀는 잽싸게 내 팔짱을 끼며 친한 척 굴었다.
  • “진우 씨랑 제가 어떻게 만났는지 얘기 안 하던가요?” “그이가 오지 시장에서 함정에 빠져 약이 든 술을 마셨던 날, 제가 우연히 발견해서 밤새 곁에서 간호했거든요….”
  • 그녀는 수줍은 듯 고개를 숙였지만, 목소리에는 은근한 자부심이 배어 있었다.
  • “그 후에 제가 몰래 떠나려 했는데, 진우 씨가 제 손을 꽉 잡고 놓아주질 않더라고요. 반드시 책임지겠다고, 결혼하자고….”
  • 수줍게 웃는 척하면서도, 그녀의 시선은 집요하게 내 손에 든 만년필을 향해 있었다. 도발적인 눈빛이었다.
  • “이 정도 말했으면 알아들으셨죠? 저희는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이에요. 진우 씨처럼 유능한 남자를 노리는 여자가 많다는 건 알지만, 이미 결혼 날짜까지 잡혔는데 눈치 없이 굴 사람은 없겠죠?” “JS 그룹은 가풍이 엄격하기로 유명하잖아요. 남의 약혼자를 탐내는 몰상식한 자식을 키웠을 리는 없겠죠. 안 그래요, 설아 씨?”
  • 결국 돌고 돌아 나를 '남의 남자를 탐내는 여자'로 몰아가려는 속셈이었다.
  • 나는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비웃어 주었다. 그리고는 손에 든 만년필을 그대로 휘둘렀다. '깡!' 하는 소리와 함께 만년필이 민하나 바로 옆 조각 난간에 박혔다. 펜촉이 나무 틈새로 깊숙이 박혀 파르르 떨렸다.
  • “너희가 어떻게 '우연히' 만났는지는 네 스스로가 제일 잘 알 텐데?”
  • 민하나는 겁에 질려 다리가 풀린 듯 주저앉았다. 그러다 멀리서 달려오는 차진우를 발견하자마자 눈빛에 생기가 돌며 날카롭게 소리쳤다.
  • “임설아! 진우 씨는 이제 내 남편이야! 그런데도 옛날 물건이나 들고 미련 떨면서 꼬시는 의도가 뭐야?” “진우 씨 마음엔 나밖에 없어! 당신을 조금이라도 아꼈다면 파혼 얘길 먼저 꺼냈겠어? 제발 현실 파악 좀 하고 포기해!”
  • 나는 차가운 눈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며 손을 치켜들었다.
  • “수작 부려서 신분 세탁한 비서 나부랭이가, 감히 차진우가 널 평생 지켜줄 거라 믿는 거야?”
  • “임설아, 지금 뭐 하는 거야!”
  • 내 손목을 낚아챈 건 분노로 이글거리는 차진우였다. 나는 가차 없이 손을 뿌리치며 그를 쏘아붙였다.
  • “너, 네가 뭐라도 된 줄 아나 본데 착각하지 마. 넌 그저 내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수행비서였을 뿐이야. 우리 아버지 아니었으면 넌 지금쯤 길바닥을 구르고 있었을 거라고.” “네 여자 관리 잘해. 한 번만 더 내 귀를 더럽히면 그땐 입을 찢어버릴 테니까.”
  • 차진우는 내 일갈에 얼어붙은 듯 굳어버렸다. 한참 뒤에야 바닥에 주저앉은 민하나를 내려다보았다. 민하나가 울먹이며 하소연하려던 찰나, 차진우는 난간에 박힌 만년필을 조심스럽게 뽑아냈다. 그리고 묻은 먼지를 정성스럽게 닦아 내게 내밀었다.
  • 그가 무슨 꿍꿍이인지 추측할 가치조차 느끼지 못한 나는, 독기 어린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민하나를 비웃으며 몸을 돌렸다.
  • “방으로나 데려가. 네 씨를 가졌다는데, 내 눈앞에서 알짱거리는 거 역겨우니까.”
  • 두 걸음 정도 옮겼을까, 나는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만 돌려 차진우를 응시했다.
  • “아, 그리고. 앞으로 나를 마주치면 꼬박꼬박 '아가씨'라고 예우해. 네 주제가 뭔지 잊지 말고.”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대지도 마. 불쾌하니까.”
  •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정원 분수대로 걸어갔다. 그리고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 만년필을 분수대 물속으로 던져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