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 그녀의 팔 안쪽에는 옅푸른 멍이 번져 있었다.
- 손 모양의 멍처럼 선명했고, 가장자리는 희미하게 보랏빛이 감돌았다.
- “지난주에 커피를 실수로 쏟았거든. 그랬더니 그 사람이 그냥 날 확 밀어버렸어.”
- “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는 거지?”
- 내가 경계 어린 눈빛으로 묻자, 강하린은 잠시 멍하니 서 있었다.
- 그러다 이내 쓰게 비웃듯 입꼬리를 비틀었다.
- 툭.
- 참고 있던 눈물이 끝내 바닥으로 떨어졌다.
- “선배… 나 그 사람 사랑해.”
- 그녀의 어깨가 잘게 떨렸다.
- 북받친 울음이 끝내 목 끝을 넘었다.
- “나, 그냥 점점 더 선배처럼만 되면… 언젠가는 날 사랑해줄 줄 알았어.”
- 갈라진 목소리가 복도에 날카롭게 긁혔다.
- “근데 선배가 돌아왔잖아.
- 내가 그동안 들인 거, 전부 다 물거품이 됐어.”
- “이젠 그 사람 눈에 내가 안 보여.”
- “그래서, 그걸 전부 내 탓으로 돌리겠다는 거야?”
- 내가 차갑게 묻자, 강하린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 “그럴 생각 없었어. 진짜로.”
- 그녀는 얼굴을 감싸 쥔 채 괴롭게 숨을 삼켰다.
- “근데 나…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 그러더니 천천히 나를 올려다봤다.
- “나 임신했어, 선배.”
-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 “며칠 전에 그 사람한테 말했어.
- 그래도… 한 번쯤은 나를 봐주지 않을까 싶어서.”
- 잠깐 숨을 고른 그녀가 겨우 말을 이었다.
- “근데 그 사람, 자기 애 아니래. 어떻게든 지우라고 했어.”
- 순간, 내 눈빛이 서늘하게 식었다.
- 강하린이 손끝으로 제 아랫배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 “지난주에 산전검사 받으러 갔을 때도, 그 사람은 얼굴 한 번 안 비쳤어.
- 비서 손에 약병 하나만 들려보냈지.”
- 그녀 눈엔 오래 가라앉지 않은 절망이 남아 있었다.
- 나는 문득 5년 전을 떠올렸다.
- 그때의 나 역시 강제로 약을 삼켜야 했다.
- 그 일 이후, 나는 영영 엄마가 될 수 없게 됐다.
- “어떻게 하고 싶은데?”
- 내가 묻자, 강하린의 눈물이 뚝 그쳤다.
- 대신 눈빛이 단단하게 굳었다.
- “살고 싶어.
- 이 아이도 살리고 싶고.”
- 그녀는 물러서지 않은 채 나를 똑바로 바라봤다.
- “선배, 나를 도울 수 있는 사람은 선배뿐이야.”
- 나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 그저 몸을 돌려 프라이빗룸 쪽으로 걸어갔다.
- 뒤에서 그녀의 목소리가 따라붙었다.
- “내일 선배 사는 데로 갈게.”
- 룸으로 돌아오자, 박준혁이 내 휴대폰을 손에 든 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 “복도에서 무슨 얘기 했어?”
- 그가 고개를 들었다.
- 눈빛 속 소유욕은 아까보다 더 짙어져 있었다.
- 나는 다가가 그의 손에서 휴대폰을 빼내며 담담하게 말했다.
- “별거 아니야. 하린이가 내가 예전에 자주 가던 피부과 주소를 물어봤어.”
- 박준혁이 눈썹을 까딱하며 강하린을 봤다.
- “정말이야?”
- 나를 따라 들어온 강하린이 더듬거리며 말했다.
- “그… 그래. 선배가 원래 그런 데 잘 알잖아.”
- 박준혁은 더 묻지 않았다.
- 대신 스테이크 한 점을 잘라 내 접시에 올려 주며 말했다.
- “빨리 먹어. 식으면 맛없잖아.”
- 다음 날 아침, 초인종이 울렸을 때 나는 막 항우울제 약을 삼킨 참이었다.
- 문을 열자 강하린이 서 있었다.
- 손에는 보온통이 들려 있었고, 안색은 어제보다 더 나빠 보였다.
- “죽 좀 끓여왔어.”
- 그녀가 보온통을 조금 들어 보였다.
- “선배, 들어가도 돼?”
- 나는 말없이 몸을 옆으로 비켜 그녀를 안으로 들였다.
- 거실 창문이 열려 있어 바람이 커튼을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 “선배, 이것 좀 봐.”
- 강하린이 제 손목을 내밀었다.
- 그곳에는 옅은 흉터 하나가 남아 있었다.
- 내 손에 남은 흉터와 거의 같은 자리였다.
- 그 흉터는 내가 5년 전, 도망치려다 난간에 긁혀 생긴 것이었다.
- 나는 짧게 숨을 내쉬었다.
- “네가 말한 약, 가져왔어?”
- 강하린은 기다렸다는 듯 가방에서 흰 약병을 꺼내 내게 건넸다.
- “이거야. 내가 찾아봤는데 환각제래. 오래 먹으면 태아 발달에도 영향 간대.”
- 나는 약병을 받아들었다.
- 라벨에는 염산 플루옥세틴 캡슐이라고 적혀 있었다.
- 하지만 병에 찍힌 일련번호는 가짜였다.
- 박준혁은 위조를 하면서도 성의가 없었다.
- “선배.”
- 강하린이 불쑥 내 손을 붙잡았다.
- 손끝이 얼음장처럼 차가웠다.
- “선배도 그 사람 미워하잖아.
- 우리 손잡자.”
- 나는 그녀의 손을 천천히 떼어 내며 물었다.
- “내가 그를 미워한다는 걸, 어떻게 알아?”
- 강하린이 낮게 대답했다.
- “그 눈빛… 나한테 너무 익숙하니까.”
- 5년 전, 나는 그의 손아귀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을 거라고 믿었다.
- 강하린은 어쩌면 마지막 기회일지도 몰랐다.
- “네가 날 속이면…”
- 나는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
- 목소리는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 “그 뒤는 네가 감당 못 해.”
- 강하린의 눈이 순간 번뜩였다.
- 그녀는 힘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 “안 속여. 선배, 진짜야.”
- 그 말이 끝나자마자 내 휴대폰이 울렸다.
- 화면 위에 뜬 이름은
- 박준혁이었다.
- 나는 강하린을 한 번 힐끗 보고 전화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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