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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화

  • 그녀는 고개를 살짝 돌려 나를 바라봤다.
  • 눈가에 번진 걱정이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했지만, 한소민은 애써 그 감정을 눌러 삼켰다.
  • 차는 어느새 시내 번화가 쪽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 나는 창문에 비친 흐릿한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문득 5년 전 자주 입던 하얀 원피스를 떠올렸다.
  • “저 앞에 새로 생긴 디저트 가게 있거든.”
  • 한소민이 일부러 아무렇지 않은 척,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 “잠깐 들어가서 쉬어 갈래?”
  • 내가 대답하기도 전에 그녀가 갑자기 브레이크를 밟았다.
  • 시선은 대각선 앞쪽, 유리문 너머 어딘가에 박힌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 나도 그녀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들었다.
  • 창가 자리에 박준혁이 앉아 있었다.
  • 손끝에는 아직 불도 붙이지 않은 담배 한 개비가 걸쳐져 있었다.
  • 그 옆의 여자가 머리카락을 쓸어 넘기자, 밤빛이 감도는 갈색 웨이브가 어깨 아래로 흘러내렸다.
  • 한때의 나를 그대로 베껴 놓은 듯한 모습이었다.
  • “박준혁!”
  • 한소민이 반가운 척 손을 흔들었다.
  • 너무 다정해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운 목소리였다.
  • 박준혁의 시선이 한소민의 얼굴을 훑었다.
  • 딱, 삼 초.
  • 마음에 들지 않는 모조품을 훑어보듯 차갑고 무심한 눈빛이었다.
  • 그 짧은 시선에 담긴 노골적인 불만에, 한소민의 웃음이 그대로 굳어 버렸다.
  • 그 순간, 박준혁의 눈길이 한소민을 지나 내게 닿았다.
  • 익숙했다.
  • 사람을 숨 막히게 만드는 그 소유욕 어린 시선도, 나를 발견한 순간 서늘하게 가라앉는 그의 눈빛도.
  • “서지안? 네가 어떻게 여길?”
  • 강하린의 목소리였다.
  • 박준혁의 아내, 강하린.
  • “소민 언니, 오랜만이네!”
  • 나와 한소민은 거의 동시에 입을 열었다.
  • “오랜만이네.”
  • “지안아.”
  • 박준혁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며 웃었다.
  • “정말 오랜만이다.”
  • 마치 지난 5년 동안 단 한 번도 나를 본 적 없는 사람처럼.
  • 마치 나를 해외로 보내 가둬 둔 사람이 자신이 아닌 것처럼.
  •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 속에서 들끓는 감정을 꾹 눌러 담은 뒤, 익숙한 미소를 입가에 걸쳤다.
  • “박준혁, 오랜만이네.”
  • 박준혁은 내가 순순히 받아준 게 만족스러운지 한 걸음 더 다가왔다.
  • 그 순간, 한소민이 재빨리 내 앞을 가로막았다.
  • “와, 진짜 우연이다. 근처에서 밥 먹는 중이었어?”
  • 억지로 밝은 얼굴을 만든 채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 “같이 먹을래?”
  • 박준혁은 눈썹을 살짝 치켜올렸다.
  • 시선이 나와 한소민 사이를 한 번 오가더니, 이내 천천히 입꼬리를 올렸다.
  • “좋지.”
  • 그는 다시 내게 시선을 고정했다.
  • “마침 지안이랑 할 얘기도 있었거든.”
  • 식당 안으로 들어가자 직원이 우리를 창가 자리로 안내했다.
  • 강하린이 자연스럽게 박준혁 옆에 앉으려 했지만, 박준혁은 아무렇지 않게 몸을 틀어 그녀를 비켜 버렸다.
  • “너는 저쪽에 앉아.”
  • 그가 맞은편 자리를 턱으로 가리켰다.
  • “지안이랑 얘기 좀 할 거니까.”
  • 강하린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었다.
  • 손가락이 치맛자락을 세게 움켜쥐었다가, 이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어 보였다.
  • “아, 그래.”
  • 그녀는 얌전히 맞은편 자리에 앉았다.
  • 주문할 때도 박준혁은 망설임이 없었다.
  • “블랙 트러플 스테이크. 미디엄 웰던으로. 버섯수프는 양파 빼고.”
  • 내가 좋아하던 메뉴였다.
  • 정확했다.
  •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 입에도 대지 않는 게 뭔지까지 그는 여전히 모조리 기억하고 있었다.
  • 강하린이 메뉴판을 든 채 잠시 머뭇거리더니 작게 말했다.
  • “저도 똑같이 주세요.”
  • 직원이 주문을 받고 물러나자, 그녀가 억지로 화제를 꺼냈다.
  • “아직도 선배 취향 다 기억하고 있네?”
  • 박준혁은 대답하지 않았다.
  • 대신 내 쪽으로 몸을 조금 기울이며 말했다.
  • “지안아, 기억나? 우리 여기 처음 왔던 날.”
  • 나는 물컵을 쥔 채 천천히 잔 가장자리를 문질렀다.
  • “기억나지. 내가 실수로 네 양복에 레드와인을 쏟았잖아.”
  • 박준혁의 눈빛이 옅게 풀렸다.
  • “그때 너 거의 울 뻔했어. 새 양복 사주겠다고 안절부절못했잖아.”
  • 그 말이 떨어지자, 강하린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졌다.
  • 그녀는 뭐라도 말해 보려는 듯 입술을 달싹였지만, 결국 아무 말도 못 한 채 앞에 놓인 물컵만 만지작거렸다.
  • 나는 고개를 들어 강하린을 바라봤다.
  • 여전히 차분하고 예의 바른 얼굴로.
  • “하린이는 준혁이랑 여기 자주 와?”
  • 강하린이 당황한 듯 눈을 깜빡였다.
  • “아… 응. 자주 와.”
  • “그렇구나.”
  • 나는 가볍게 웃었다.
  • “그럼 준혁이 단 걸 별로 안 좋아하는 건 알고 있겠네.”
  • 강하린의 표정이 순간 멈췄다.
  • 나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 “커피에도 설탕 안 넣고, 디저트도 티라미수 정도만 먹잖아. 그것도 너무 달면 잘 안 먹고.”
  • 강하린의 얼굴이 순식간에 붉어졌다.
  • 조금 전 그녀가 박준혁 앞에 내려놓은 커피에는 시럽이 두 번이나 들어가 있었고, 같이 주문한 디저트는 유난히 단 망고 무스였다.
  •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겨우 변명을 꺼냈다.
  • “알지. 그냥… 가끔은 입맛이 달라질 수도 있으니까.”
  • 그제야 박준혁이 그녀를 한 번 바라봤다.
  • 마치 이제야 제 옆에 앉은 사람이 아내라는 사실을 떠올린 사람처럼.
  • “가끔은 그럴 수도 있지.”
  • 차갑게 식어 버린 공기 속으로 한소민이 재빨리 끼어들었다.
  • “스테이크 금방 나오겠다. 우리 조금만 더 기다리자.”
  • 하지만 그 말로도 분위기는 좀처럼 살아나지 않았다.
  • 강하린은 분명 같은 식탁에 앉아 있었지만, 처음부터 끝까지 이 자리의 주인공이 아니었다.
  • 차라리 그 자리에 세워 둔 장식품 같았다.
  •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날 때였다.
  • 강하린의 시선이 내 쪽을 스쳤다.
  • 짧았지만 선명했다.
  • 웃고 있는 얼굴과 달리, 눈빛만큼은 끝내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 차갑고 날 선 적의가 고스란히 배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