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산 뒤, 남편이 버리지 말라며 애원한다
stephenwriter
Last update: 1970-01-01
제1화
- 남편 강재우와 결혼한 지 2년. 그는 늘 어른이면 감정은 알아서 소화해야 한다고 했다.
- 늘 나더러 알아서 버티고, 자기한테 민폐 끼치지 말란다.
- 지난번엔 쓰레기 버리러 내려가다 넘어져 뼈에 금이 갔다. 강재우한테 전화했더니.
- “나 지금 회의 들어가야 해. 구급차 네가 불러.”
- 나는 한 발로 폴짝거리며 휴대폰을 찾았다. 아파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 그뿐만이 아니다.
- 엄마가 위중해서 입원해야 했다.
- 공항에 같이 가서 모셔오자고, 두 시간만 내달라고 그렇게 애원했는데, 강재우는 시간 없다고 했다.
- 대신 계좌로 돈만 툭 보내왔다. 자기 시간은 간병인 값보다 비싸다나.
- 나는 엄마를 모시고 병원 뛰어다니며 검사했다. 꼬박 일주일 쉬지 못하고 굴러 거의 기절할 뻔했다.
- 밤에 침대에 누워 요즘 힘들다고 그와 얘기 좀 하려 했더니, 그는 몸을 홱 돌려 내게 등을 보였다.
- “넌 내 아내잖아. 이런 감정 하나 못 다스리면, 내가 가는 자리들에서 어떻게 나랑 맞추려고 그래?”
- 나중에 중증 우울증 진단까지 받았다. 진단서를 들고 집에 와서 강재우와 얘기해 보려 했다.
- 그는 힐끗 보더니 종이를 바로 파쇄기에 넣었다. 얼굴을 찌푸리며 내가 오버한단다.
- “맨날 집에만 있고 출근도 안 하잖아. 우울할 게 뭐가 있어? 그냥 한가해서 그런 거지.”
- 그러다 어느 날, 엄마가 중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나는 병원에서 쓰러졌고, 깨어나 보니 이미 유산돼서 소파술이 필요했다.
- 수술실로 실려 가는 길, 흐릿한 시야로 강재우가 한 여자를 안은 채, 빨갛게 부은 발목 좀 봐달라고 의사에게 부탁하는 게 보였다.
- 그 여자의 얼굴은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 바로 박하은, 나의 절친.
- 순간 박하은이랑 눈이 마주쳤다. 박하은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갔다.
- 강재우는 쭈그리고 앉아 그녀의 발목을 주물렀다. 목소리는 걱정으로 덜덜 떨렸다.
- “다 내 탓이야. 하이힐 신으라고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다음엔 내가 플랫슈즈 챙겨올게.”
- 피식, 허무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 그는 절제와 독립을 중시하는 게 아니었다. 나를 애초에 지켜줄 사람 목록조차 올리지 않았던 거다.
- ……
- ……
- 수술실 불빛이 번져 눈이 아렸다.
- 간호사가 내 폰을 꽉 쥐고, 서른일곱 번째로 긴급 연락처로 전화를 걸었다.
- 간호사의 간절함이 통했는지 드디어 전화가 통했다.
- “윤지아 씨 남편분 맞으세요? 아내 분이 방금 사고로 유산했고, 소파술이 필요합니다. 보호자 서명이 필요해요.”
- 강재우는 성가신 기색으로 말을 딱 잘랐다.
- “그까짓 일, 본인이 서명 못 해요? 난 지금 바쁜데.”
- 배경에서 작게 박하은의 나긋한 목소리가 들렸다.
- “재우 씨, 난 괜찮아. 얼른 지아한테 가봐. 난 혼자 걸을 수 있어.”
- 강재우는 다정하게 그녀를 달랬다. 목소리가 한없이 부드러웠다.
- “안 가도 돼. 걘 아주 독립적이거든. 너처럼 살짝만 부딪혀도 한참 우는 애는 아니라서 괜찮아.”
- 간호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혹시 내가 들을까 봐 허겁지겁 수화기를 막았다.
- 하지만 강재우의 목소리는 또렷하게 새어 나왔다.
- “수고스럽겠지만 윤지아에게 전해줘요. 어른이면 이젠 좀 스스로 감당하라고.”
- 간호사는 다급해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도 애써 말을 이었다.
- “지금 아내 분께서 몸이 너무 약해요. 방금 아이를 잃었고……”
- 강재우는 푸흣 웃었다. 비아냥이 가득했다.
- “유산? 일부러 그랬겠죠. 나 봐라고, 관심 끌려고 쇼하는 거라니까요.”
- 그의 목소리가 한층 더 싸늘해졌다.
- “윤지아, 네가 듣고 있는 거 알아. 정말 죽네 사네 할 거면, 내게 전화하지 마. 재수 없으니까.”
- 통화는 거기서 끊겼다.
- 간호사가 다시 걸었지만, 이미 차단돼 있었다.
- 모니터에서 날카로운 경고음이 울렸다.
- 혈압이 쭉쭉 떨어졌다. 눈앞이 새까맸다.
- 나는 간호사의 손목을 덥석 잡고, 마지막 힘을 짜냈다.
- “내가 죽으면, 장기 전부 기증해요. 그 사람에겐 알리지 말고요.”
- 강재우의 원칙대로라면, 내가 죽어도 자기 시간 날렸다고, 돈 버는 데 방해됐다고 또 뭐라 하겠지.
- 심전도 파형이 점점 더 엉망이 됐다.
- “내가… 살 수 있다면……”
- 그다음 말은 미처 끝내지 못했다. 스르륵, 그대로 눈이 감겼다.
- 다시 눈을 떠 보니, 옆의 간호사 몇 명의 눈이 호두처럼 부어 있었다.
- “이제야 깼네요. 서른 시간 넘게 주무셨어요.”
- “우린 다… 에휴, 괜찮으면 됐어요. 다음부턴 절대 그런 어리석은 짓 하지 마세요.”
- 간호사 아가씨들이 돌아가며 나를 꼭 안아줬다. 이상하게 소독약 냄새가 하나도 거슬리지 않았다.
- 따뜻한 물에 푹 담긴 것처럼 마음이 풀리는데, 아릿하게 아팠다.
- 예전엔 억울한 일이 있더라도, 강재우가 따뜻한 물 한 컵만 건네줘도 반나절은 행복했었다.
- 연애할 땐 비 맞고 세 블록을 뛰어가 내가 좋아하는 그 카페 커피를 사 왔다. 손이 새빨갛게 얼어 있었고, 앞으로 내 일은 전부 자기가 짊어지겠다고 했다.
- 결혼식장에서 그는 모든 친지와 친구들 앞에서 맹세했다. 평생 나를 서럽게 하지 않겠다고, 어떤 일이든 내가 걱정할 필요 없게 하겠다고.
- 그 말은 아직도 귀에 선명한데, 사람은 달라졌다.
- 입원 일주일 내내, 강재우는 한 번도 오지 않았다.
- 메시지 한 줄도 없었다.
- 나는 매일 천장만 봤다. 수액 방울은 느리게 또르르 떨어지고, 시간은 끝없이 늘어졌다.
- 복도에서 간호사 둘이 수다 떠는 소리가 들렸다.
- “야 어제 왔던 그 여자 봤어? 발목 좀 부은 것뿐인데 남편이 난리더라. 내내 안고 다니고, 물도 입에 대주고.”
- “맞아 맞아. 내가 어제 그 여자 분 약 갈아줬는데, 남편이 옆에서 계속 얼굴을 찌푸리더라고. 우리 손 힘이 세다고. 그래서 우리가 더 쫄았잖아.”
- “사람이 참 비교되더라. 우리 남편이 반만이라도 그렇게 다정하면, 꿈꾸다가도 웃으면서 깰 텐데.”
- 엄마가 임종 직전 내 손을 꼭 잡고, 네가 걱정된다고 하던 모습이 번쩍 지나갔다.
- 병원 복도에서 쓰러졌을 때, 곁에 손 한번 잡아줄 사람도 없던 그 순간도 스쳤다.
- 끝내 장면은, 강재우가 쭈그리고 앉아 박하은 발목을 문지르던 데서 멈췄다.
- 가슴이 꽉 막혀 숨이 안 쉬어졌다.
- 만약 그들이 내가 강재우의 진짜 아내라는 걸 알면, 얼마나 우스울까.
- 비명을 삼키려 손등을 악물었다. 이가 살을 파고들어 핏맛이 번졌다.
- 한쪽 귀에는 병든 엄마의 걱정 섞인 목소리, 다른 쪽에는 강재우가 박하은을 다독이며 그녀는 아프다며 속삭이는 다정한 목소리가 울렸다.
- 나는 다른 손으로 수액 꽂힌 팔을 미친 듯이 긁었다. 손톱에 살이 그어져 선명한 피자국이 줄줄이 생길 때까지.
- 입술이 파랗게 떨렸다. 나는 강박처럼 중얼거렸다.
- “미안해, 엄마. 내가 너무 못나서 내 아이도, 남편도 지키지 못했어.”
- 눈물이 피 범벅인 팔 위로 뚝뚝 떨어졌다. 그런데도 아프단 감각이 전혀 없었다. 결국 절망한 채 멍하니 허공만 노려봤다.
- 주치의가 회진을 왔다. 눈 뜬 채 멍하니 있는 나와 피로 얼룩진 팔을 보고, 조용히 한숨을 쉬었다.
- “정신건강의학과 선생님 좀 불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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